피렌체(Firenze)는 그리 큰 도시는 아니지만 따뜻한 정감을 느끼게 만든다. 보면 볼수록 이상할 정도로 친밀함을 느끼게 한다. 과거 르네상스의 찬란한 문화를 창출한 도시라서 그런지 모른다.
좁은 골목길을 걸어 보면 중세의 고풍스러운 모습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고 아기자기하여, 마치 타임캡슐을 타고 그 시대로 진입한 것 같은 느낌을 받게 한다. 시내의 옛 건물 벽에는 중세에 마부가 마차를 세워두기 위해 사용했던 고리가 여전히 주인을 기다리는 듯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있다.
시내를 걷던 중 한눈에 보아도 오랜 풍상을 겪었을 건물 앞에 이르자, 교우는 생각났다는 듯 말한다. "이 건물이 바로 단테(Dante Alighieri, 1265-1321)의 생가예요." 피렌체(Firenze) 시내 중심가에 위치한, 5층 정도 되는 아담한 옛 건물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집의 크기나 높이로 자신의 지위와 부를 표현하기를 즐긴다. 그래서 중세 도시인 산지미냐노(S'Gimignano)에서는 상대방의 탑보다 더 높이 올리려는 경쟁이 치열하였다. 인간의 유치한 발상은 헛웃음을 터뜨리게 한다. 인간의 높아지고자 하는 욕망은 전혀 변하지 않는 원초적 본능이지 싶다.
단테는 이곳에서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아버지 대에 와서 가문이 기울게 되었다. 양반이 가세가 기울면 체면 때문에 더욱 고난을 겪듯, 단테도 그랬을 것이다. 교우는 단테의 집에서 가까운 작은 성당을 가리키며 "이곳은 단테가 아홉 살 때 평생의 연인 베아트리체를 만난 곳"이라고 말했다. 들어가 보았더니 나무 의자를 두 줄로 놓았는데, 더 이상 여백이 없는 작은 성당이었다. 세월은 흘러도 역사는 과거의 어떤 지점에 멈춰, 그 안에서 나오기를 거부한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계속하여 변함없는 교훈을 주겠지만.
단테가 아홉 살 때 만난 베아트리체야말로 그의 전 생애에 있어 사상의 동반자로, 이상을 형상화하는 대상으로 자리잡았다. 글을 쓰든 무엇을 하든 말이다. 이상하게 르네상스 시대의 불을 지폈던 문학가들에게는 이런 공통점이 있다. 데카메론을 쓴 보카치오(Giovani Boccaio, 1313-1375)에게는 언제나 피아메타(Piameta)라는 여인이 등장하고, 페트라카(1304-1374)에게는 라우라라는 여인이 나타난다.
이 여인들이란 그들에게 결코 다가갈 수 없는 이상을 의미할 수 있다. 그래서 늘 바라보며, 닮기를 소원하며, 언젠가 만나기를 소망하는 대상이었다. 그 대상을 그리며 현재의 고난을 참아내고, 또한 자신의 결핍을 보충하려고 발버둥치게 된다. 그것은 곧 기독교의 성화를 연상케 한다. 그 대상이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이시지만. 단테는 그 영원한 주님을 바라보며, 영적 안목으로 세상을 관조하였다.
그러나 그의 현실은 끊임없는 고난의 좁은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이었다. 그는 젊어서 피렌체(Firenze)의 정치에 발을 들여 놓았고, 35세에 도시국가의 최고 지위에 올랐다. 그 정도로 재능이 탁월했고, 학식과 지도력도 있었다. 임기는 2개월이었는데, 그 당시는 피렌체가 극심한 당파 싸움으로 대립하던 때였다. 그래서 나라는 불안하기만 했다.
그는 최고의 지위에 올랐다가 정치적 상대가 실권을 잡자 이내 숙청되고 말았다. 정치에서 패한 자가 항상 그렇듯이 그는 반역자로 기소되었고, 1302년에 "2년 동안 국내에 들어올 수 없다"는 판결을 받았으며, 그 후 영구 추방됐다. '국내'라는 것이 사실 작은 지역인 피렌체 도시국가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그는 만일 체포될 경우 화형을 당할 것이라는 무서운 선전포고와 함께 쫓겨났다.
그 후 단테는 자신의 추억과 향수가 묻어 있는 고향 피렌체 땅을 다시는 밟지 못하고 말았다. 그런 상황에서 그는 쓰라린 심정으로 신곡(La Divina Commedia)을 쓰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신곡은 자신의 이상에 대한 하나의 기록물일지도 모른다. 1315년에 피렌체 당국은 단테에게 개심의 뜻을 보인다면 사면하겠다고 제의했지만, 그는 자존심을 포기할 수 없어 거절했다. 그러자 가족까지 영구 추방령을 받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를 친절하게 영접한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라벤나의 공작이었다. 단테는 라벤나를 위해 베네치아와의 관계 개선을 목적으로 사절이 되어 다녀오던 중 말라리아에 걸려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그 후 조국 피렌체는 단테의 위대함을 뒤늦게 깨닫고 그의 유골을 가져오기 위해 애를 썼지만 뜻을 이루지 못해, 해마다 단테가 죽은 날을 기념하여 등을 다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리고 천재를 알아보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그의 작품 신곡을 모든 사람들에게 읽도록 국가적으로 배려하는 것으로 그에 대한 잘못을 속죄하려 했다.
베아트리체는 단테가 눈을 감을 때까지 잊을 수 없었던, 영원한 구원의 여인이었다. 결코 다시 만날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아니, 만날 수 있었다 해도 만나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만든 이상을 현실화시키지 않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베아트리체는 다른 남자를 만나 결혼했으나, 24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단테는 그를 자신만의, 죽을 수 없는 영원한 여인으로 승화시켰다. 그래서 신곡에서 어둠 속에서 갈 바를 모르는 자신을 천국으로 안내하는 여인으로 등장시켰다.
그런데 어느 목사님이 천국을 다녀온 내용을 책으로 엮었는데, 신곡과 비슷하다는 사실에 놀라웠다. 우연의 일치인지, 또는 두 분이 영적 경험을 글로 표현했는데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일치하게 되었는지 모른다.
그가 살았던 피렌체의 중심부에 있는, 5층 정도 높이의 집. 좋은 가문에서 태어난 그가 고난을 통하여 영원히 기억될 수 있는 작품을 남겼다. 그렇다면 그는 고난을 능동적으로 활용한 사람일 것이다. 그는 역사적으로 가장 위대한 시인 중 하나로 인정받는다. 이 시대 사람들은 세계 3대 시성을 호메로스, 베르길리우스, 단테라고 생각한다.
괴테는 이런 말을 했다. 신곡은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낸 최고의 걸작이라고. T.S. 엘리어트는 "근대 세계는 셰익스피어와 단테가 나눠 가졌다. 제3자는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극찬했다.
단테의 신곡 한 구절을 언급하고 싶다. "하나님의 계시를 벗어나면 무지, 환영(幻影), 그리고 감성만 있을 뿐이지요." 그렇다. 시대가 어려울수록 인생은 오직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성서의 말씀에 주목할 수 있어야 한다. 단테는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교훈하고 있다. 고난이라는 이름 때문에 자학하며 원망하는 사람들에게 "나를 본받으라"고 말이다. "나도 고난을 아름답게 승화시켰으니, 당신도 그렇게 살라"고 말이다.
한평우 목사(로마한인교회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