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비가 오는 걸 좋아해요. 화창한 날은 더 우울한데, 이상하게도 비가 오면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우울한 느낌이 사라지는 것 같아요. 하염없이 비 오는 창밖을 내다보노라면, 뭔가 마음의 먼저를 다 씻어내는 느낌이 들어 개운해져요."
어느 여성 내담자의 말이다. 마음의 병을 앓는 분들 중에 신기하게도 비 오는 날을 더 편안해하는 경우가 많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비가 오면 더 우울할 것 같고 화창한 날이 더 좋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왜 그럴까?
봄에 내리는 비는 한여름의 소나기와는 다르다. 부드럽고 고요하게 우리의 내면을 적시며 스며드는 비다. 그 고요한 빗소리가 우리의 깊은 내면을 부드럽게 자극하고 영혼의 창문을 두드린다. 그리고 뭔가가 포근하게 우리를 감싸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사람은 대자연 속에서 호흡하며 그 아름다움과 평안함으로 치유를 경험할 수 있다. 봄꽃의 아름다움, 초록색의 나무들, 따사로운 햇살, 그리고 추적추적 내리는 봄비까지……. 그 모든 자연의 아름다움과 생명력은 우리를 치유하는 자원이 된다.
처마 밑을 지나 하염없이 내리던 빗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었던 어린 시절이 기억난다. 그 빗소리가 외로움을 자극하기도 했지만, 형언할 수 없는 편안한 기분도 느끼게 했었다. 요즘은 아파트 주거생활이 많아 처마 밑의 빗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되었지만, 지금도 그 소리가 그리운 것은 그때의 깊고 부드러운 치유의 느낌 때문일 것이다.
나의 어릴 적은 대부분 홀로 고요한 시간을 많이 보낸, 슬픔이 조금씩 고이던 시절이었다. 우리집 뒷산은 야트막한 언덕배기를 지나 숲으로 이어져 있었는데, 나는 그 숲 속을 걸으며 노래도 부르고 시도 외우고 눈물도 흘렸었다.
가끔 고요한 숲에서 나뭇잎을 흔드는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가만히 눈을 감고 서서 숲의 향기를 들이마시며 긴장을 풀곤 했다. 초록 이파리들 사이로 가랑비가 내리는 날은, 그 맑은 비를 맞으며 내 마음 깊은 곳의 슬픔을 씻어내기도 했었다.
생각해 보면 아름다운 시기였다. 비록 우울증이 있었고 슬픔과 눈물이 더 많았던 시절이었지만, 그래도 자연 속에서 평온한 아름다움과 치유의 빛 또한 가득한 시기였다는 것을 나중에야 깨달았다. 자연의 안아줌, 그 안아줌의 경험이 나를 신과 사람에게 마음을 열고 다가가게 만들어준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사람들은 저마다의 슬픔과 외로움을 가득 지고 산다. 그 감정들이 싫어서 느낄 수 없게 만들기 위해 더 바쁘게 정신없이 사는지도 모른다. 우울증이 점점 진행되어 말기 암환자처럼 극심한 통증을 느껴도 외면하는 사람들이 있다. 미리미리 묵은 감정을 처리해야 한다. 자연 앞에서도 풀어 놓고, 주님 앞에서도 풀어내야 한다. 감정을 눌러 놓으면 병이 된다. 오늘 이 아름다운 봄날에 봄 숲으로 가서 봄 향기를 맡으며 풀어놓을 수 있으면 좋겠다.
오늘 하루를 살면 하루치의 상처가 생기고, 그 상처에서 생긴 감정 또한 내면을 적시며 쌓이게 된다. 이미 치유를 받았더라도 또다시 찾아오는 새로운 상처들, 그리고 그것에서 생겨난 감정들……. 그것들은 우리의 일부가 되어 우리와 함께 서걱거리며 살게 된다. 그러니 외면하지 말고 인정하고 들여다 보아야 한다. 이런 감정을 들여다 보기에는 오늘 같이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 좋지 않을까.
숲으로 갈 수 없다면 통유리로 된 카페의 창가에 자리잡고 앉아 비와 대화하며, 내 마음의 목소리에도 답을 해 주면 좋겠다. 많이 외롭고 슬펐느냐고 물어봐 주면 좋겠다.
고요한 숲에서 봄비가 내리는 동안만이라도 자기자신에게 시간을 주자. 아픔이 사라질 때까지 마음을 들여다 보며 기다려 주자. 하늘을 적시고 대지를 적시고 나무와 숲을 적시고 우리들 마음도 적시는 이맘때에만 내리는 봄비가, 따뜻한 신의 목소리와 눈빛처럼 우리 영혼에 내려앉아 우리를 치유하도록 기다려주면 좋겠다. 너무 서두르지 말고. 너무 조급해하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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