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평우 목사의 로마 이야기] 조선의 광해 같은 헨리 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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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평우 목사(로마한인교회).

▲한평우 목사(로마한인교회).

영국에 갔다가 헨리 8세(Henry, 1491-1547)의 궁을 보여 준다는 말을 듣고 그에 대한 흥미가 생겼다. 헨리 8세는 수많은 화젯거리를 남긴 왕이기 때문이다. 그는 지난 천 년 동안 유럽 최고의 뉴스 메이커라고 한다. 헨리 8세는 역사가들에게 너무나 좋은 안줏거리가 되는 셈이다. 그의 이야기로 셰익스피어는 희곡을 썼고, 도니제티는 오페라를 작곡했다. 또한 사람들은 그를 영화나 연극의 주제로 다양하게 다루며 흥미의 대상으로 이용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연산군이나 광해군처럼 말이다.

로마 제국의 영토를 가장 크게 확장했던 트라야누스 황제는 위대한 황제임에도 불구하고 가십거리를 만들어낼 만한 면을 도무지 찾아낼 수 없어, 역사가들에게는 심심한 대상이다. 굳이 그에게서 약점을 찾는다면 기독교를 일시적으로 핍박했다는 정도다. 그가 치세하던 때에 서머나 감독 익나티우스(Ignatius, 35-98)가 순교했다.

그러나 헨리 8세는 여섯 번씩이나 결혼한 왕이다. 그 중 두 명의 왕비를 죽였고, 세 명의 왕비를 쫓아버렸다. 한 명은 자연사했다. 유명한 시종들 및 자신의 행동에 반대하는 자들을 가리지 않고 죽였다. 이제 그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보도록 하겠다.

헨리 8세는 본부인 캐서린에게 싫증이 났다. 딸 하나만을 낳았을 뿐 그토록 바라던 아들을 낳지 못했고, 이미 나이가 40이 넘었기 때문이다. 사실 아내 캐서린은 형수였다. 형 아서 튜터가 11세에 요절하는 바람에 헨리는 왕세자가 될 수 있었고, 아버지는 당시 강력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칼 5세와 엮이기를 원했기 때문에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형수인 캐서린과 결혼하도록 주선했다.

▲잉글랜드의 헨리 8세. ⓒ한평우 목사 제공

▲잉글랜드의 헨리 8세. ⓒ한평우 목사 제공

그런데 그는 결혼 20년 만에 양심의 가책을 이유로 이혼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사실은 캐서린의 시녀 앤 불린(Anne Boleyn)에게 이미 마음이 꽂혔기 때문이었다. 헨리 8세는 가면무도회에서 만난 그녀에게 한눈에 반했다. 그런데 앤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이미 언니를 임신시킨 왕의 노리개로 전락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앤은 헨리 8세와 정식으로 결혼하여 왕비로서의 권리를 누리고 싶어했다. 어쩌면 장희빈과 비슷한 정치적 야망을 가졌던 것 같다.

헨리 8세는 왕비의 궁녀 출신 앤 불린과 결혼을 하려고, 교황청의 허락을 얻기 위해 비서를 보냈다. 그는 이혼 허락을 받아내기 위해, 자신의 결혼은 잘못된 것임을 신학적으로 증거하는 문서를 첨부했다. 즉 아내는 형수로, 성경 레위기 20장 21절의 형수와의 결혼을 금한다는 사실과, 캐서린은 이미 처녀성을 상실했었으므로 아내 될 자격이 없는 여인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교황 클레멘스 7세는 헨리 8세의 이혼을 허락할 수 없었다. 캐서린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의 친이모이기에, 칼 5세(Charles V)의 눈치를 살펴야 했기 때문이다. 황제의 군대가 1527년 로마를 함락시키고 교황을 생포해 간 적도 있었기에, 단순하게 처리할 수 가 없었다. 그러나 영국에 은혜를 베풀지 않으면 교황에 대한 충성을 포기할지 모르는 판국이었다. 이런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약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교황은 대표에게 판결을 미루라고 했고, 이 문제는 4년 동안이나 질질 끌었다.

그런 중에 헨리 8세는 교황청에 반감을 품었고, 새 대법관에 오른 크롬웰이 1533년 헨리의 첫 번째 결혼이 무효라고 법리적 해석을 함으로 교황청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결국 1534년 헨리는 교황과 결별을 고하고, 6세기부터 로마가톨릭의 지배를 받던 잉글랜드 교회를 독립시켰다. 그러면서 왕 자신이 국가와 교회의 수장임을 선포했다.

▲헨리 8세의 햄프턴 왕궁. ⓒ한평우 목사 제공

▲헨리 8세의 햄프턴 왕궁. ⓒ한평우 목사 제공

▲왕궁 후면. ⓒ한평우 목사 제공

▲왕궁 후면. ⓒ한평우 목사 제공

그리고 로마가톨릭교회와 수도원을 해산시키고 재산들을 경매에 부쳤다. 이에 반항하는 자들은 처형되었는데, 그 중 유토피아의 저자 토마스 모어와 주교 존 피셔, 카르투지오회의 수도사들이 있다. 헨리 치하에서 종교에 도입된 변화가 있다면, 교회에 영어 성경을 사용하게 된 점이었다. 가톨릭과 결별하는 일로 나라는 어지럽게 되었다.

왕은 반드시 아들이 있어야 하는 것일까? 일찍이 로마는 1천 4백 년 전에 황제에게 대를 이을 아들이 없을 때 부하 중에서 똑똑한 장군을 양아들로 삼아 직위를 넘겨 주었다. 당시 영국 국토의 몇 배에 이르는 대제국이었는데 말이다. 그들은 모두 뛰어난 자들로, 역사는 그들을 5현제라고 칭하고 있다. 네르바(96-98), 트라야누스(98-117), 하드리안(117-138), 안토니우스 피우스(138-161),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61-180)로, 그들로 인해 로마는 더욱 융성하게 되었다. 헨리 8세는 이런 역사를 잘 알고 있었을 텐데 왜 그리 아들에 집착했을까? 아무튼 아들을 얻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윤리나 도덕을 무시하게 했다. 그는 수많은 정치적 난관을 무릅쓰고 드디어 앤과 결혼할 수 있었다.

왕비가 된 앤은 자신이 섬겼던 캐서린의 딸 메리를 서출로 만들었고, 본격적으로 하대했다. 메리는 살아남기 위해 온전히 굴종할 수밖에 없었고, 그 반발로 후에 여왕이 되었을 때 독실한 가톨릭교도가 되어 존 녹스와 격렬하게 싸웠으며 '피의 여왕'이란 칭호를 들었다.

앤은 헨리 8세의 염원을 이루기 위해 전력을 다했지만, 딸 엘리자베스만 낳고 말았다. 몇 번을 임신했으나 유산했고, 유산된 아이들이 남자였다는 사실이 그녀를 안타깝게 하였다. 결국 사랑은 시들해졌고, 헨리 8세는 그녀와 이혼하기 위해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게 되었다. 즉 앤은 "오빠와 근친상간을 했고, 여러 명의 남자들과 관계를 가졌고, 또 반역을 도모했다"고 고소당했다. 결국 1536년, 앤은 포박된 채 런던탑에 투옥되었다.

이후 앤은 형장으로 끌려가면서 수행하는 성직자와 이런 대화를 했다. 형장에는 이미 구경꾼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5월이군요. 전에 여기 왔을 때는 나를 위한 축제가 열렸었어요!" "..." "많이 아플까요?" "저, 프랑스에서 특별히 망나니를 불러 왔다고 합니다." "하긴, 괜찮을 거예요. 나는 목이 가느니까..."
 
그 말처럼 그녀의 목은 단번에 도끼에 의해 잘려나가고 말았다. 그를 죽인 헨리 8세도, 그녀의 목에 도끼를 내리쳤던 사람도, 그리고 운집했던 수많은 구경꾼들과 그녀를 수행했던 성직자도 다 죽었다.

하나님의 심판인지, 헨리 8세는 마상 경기 도중 낙마해 다리에 큰 상처를 입게 되었고, 제대로 치료하지 못해 상처가 썩어가기 시작했다. 또한 그의 온몸은 매독균으로 인해 곪은 종기로 뒤덮였다. 더 나아가 몸집이 지나치게 비대해져서, 움직이기 위해서는 특별하게 고안한 기계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이런 상황에 처했을 때 어떤 심정이었을까?

한 사람만 죽여도 그로 인한 공포감에 평생을 지배당한다는데, 그 많은 사람들을 죽인 헨리 8세의 정신적 스트레스는 상상할 수 없는 정도였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궁에는 방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수백 개? 아니 수천 개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아마도 누군가가 자신을 죽일 것이라는 강박관념 때문에, 자신의 침실을 측근들도 모르게 해야 하지 않았을까 싶다. 많은 사람을 죽였던 독재자 스탈린도 자신의 비서에게조차 자신의 당일 숙소를 비밀에 부쳤다는 것처럼 말이다.

헨리 8세는 1547년 55세에 죽어가면서 단말마의 비명처럼 "수도사, 수도사"라고 외쳤다고 한다. 자신이 죽인 수도사들이 환영이 마지막 순간에 보였기 때문이었을까? 그는 전에 가톨릭에 열심을 다하는 성도였다. 그런 공로로 1521년 교황 레오 10세에게 '신앙의 옹호자'라는 칭호를 받기도 했다. 성공회를 만든 후에도 예식은 그대로 유지하도록 했다고 한다. 그의 성채 같은 궁의 정문 양 기둥 한쪽에는 네로의 흉상을, 다른 한쪽에는 티베리우스 황제의 흉상을 새겨 놓았다. 평소에 그들을 흠모하였기 때문인지 모른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그것처럼 해석이 어려운 점은 없을 것 같다. 헨리 8세는 자신을 신실한 신앙인으로 여겼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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