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민국 칼럼] 비 오는 날의 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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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없는 하늘은 종일토록 끈적거리는 한숨을 내쉰다. 후덥지근하다. 비가 올 모양이다. 귀밑머리가 희어지면서부터 비를 기다리는 마음이 너그러워졌다. 비가 오면 그윽한 생각에 잠기게 된다. 마음이 착 가라앉는다. 먼 기억들이 소록소록 떠오른다. 아스라이 지난날들의 애가가 마음을 파고든다.

비는 박장대소할 추억을 꺼내들 때도 부산스럽거나 호들갑을 떨지 않는다. 미소 한 결로 넘기는 책장처럼 지나간다. 슬픈 기억, 아픈 상처를 안고 다가와도 대성통곡하지 않는다. 소리 없이 눈물 한 결을 뺨에 놓고 사라진다. 비는 씻음이다.

씻기는 것들은 모두 아련한 추억들이다. 인생은 추억을 위한 존립이다. 지금 추억에 잠긴 애잔함 또한 이미 지나간 추억이다. 비가 오면 마음이 풍요로운 것은, 기억들의 창고에 깨끗하게 씻긴 추억들이 쌓이기 때문이다.

비가 오면 저수지에 물이 고인다. 땅 속에서 솟는 샘도 내뿜는 힘이 강해진다. 초록들이 무성한 신록을 이룬다. 농부가 뿌린 씨앗을 자라게 한다. 비는 생명 유지와 직결된 물이다. 인체의 70%가 수분이라니, 그래서 비를 만나면 동질성을 느끼게 되는, 회귀 본능으로 반가운 마음이 드는가 보다.

비는 새로운 풍정을 선사한다. 비가 올 때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고, 들리지 않던 것들이 들리고, 멀리 두었던 소중한 것들을 거두어들일 수 있어서 외롭지 않다. 무엇보다도 평상시에 느껴볼 수 없었던 영감(靈感)을 제공해 주기 때문에 풍성하다. 그래서 비는 희열이다.

언제부터인지 비가 오면 눈을 감는 시간이 길어진다. 삶에 대한 회의가 아니라 삶을 만끽하는 고수의 품새를 흉내내고 있다는 느낌이다. 어쩌면 풍진 세상에 더 봐야 할 것도 바랄 것도 없는 초월심이 작동하는가 싶다. 혹은 어차피 소멸될 육신의 인고와의 작별을 연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더러는 갈등과 반목의 기억들을 지우다가 결국은 삶의 전부를 지워야 할 연습을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비는 지우개다. 생존을 위한 요소 중 기억보다 소중한 가치는 망각이다. 인생은 기쁨과 희열을 동반해도 전반은 고행이다. 죽음을 수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기억해야 할 것보다 잊어야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누구나 예외 없이 고난의 여정이다. 삶은 지나온 발자국을 지우면서 앞으로 걸어야 하는 이중주와 같다.

그러나 삶의 발자취는 낙서된 종이처럼 대충 구겨서 버리면 안 될, 소중한 기억들이다. 한순간까지도 의미 있게 봉인되어야 할 조각들이다. 생명이 다하는 그 날까지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될, 영생의 생명줄도 기억 안에 저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영생의 은혜를 주신 모든 과정은 기억 속에 음각되어 있다. 비는 기억해야 할 것과 망각해야 할 것을 정리해 주는 반려자다.

비는 우리들에게 악한 상념을 잠재우고 선한 가치들을 일깨워 준다. 비에게도 천둥, 번개, 먹구름, 안개 같은 여러 명의 친구들이 있다. 그 중 가장 어여쁜 친구는 안개처럼 위장된 얼굴로 나타나는 운우(雲雨)다. 비가 아닌 듯한 비와 구름이 아닌 듯한 구름이 만나 안개를 내뿜으며 만나는 희붐한 풍정이 운우의 그윽한 자태이다.

운우는 인생들의 허물을 덮어 주는, 관용을 품고 사는 나그네다. 운우를 만나면 허물과 치부가 드러나지 않아서 좋다. 사람도, 단점을 지적하고 흉을 보는 사람보다 허물과 약한 부분을 가려 주는 운우 같은 사람이 좋다.

비가 오면 날개 달린 생명들은 날갯짓을 멈춘다. 날개 젖는 것을 핑계로 쉼을 가질 수 있어 좋다. 낮잠을 자도, 게으름을 피워도, 핑계 댈 수 있는 이유를 제공해 준다. 서글픈 눈물을 안아 주고, 고난의 인생살이 진한 땀내음도 부둥켜 준다. 그래서 비는 차별 없는 친구다.

소리 없이 밤을 흐느끼는 비, 한바탕 우레와 어울려 한풀이를 해대는 비, 소낙비, 이슬비, 가랑비, 장대비, 이른 비, 늦은 비를 때를 따라 조화롭게 하시는, 비의 주인은 범접하지 못할 독보적 경지의 예술가다.  

비 오는 날, 우리들은 안도의 숨을 쉰다. 비의 주인께서 다시는 비를 심판의 도구로 쓰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셨기 때문이다. 비의 주인은 오직 우리들이 성결해지기만을 바라신다. 비 온 뒤 청명한 하늘처럼, 인생들의 마음이 정결하게 씻기기를 바라는 한마음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들은 우울한 우요일(憂曜日)을 살고 있다. 목회자들은 재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평신도는 헌신 없이 방황하고 있다. 신명나는 세상놀이에, 세상 가치관에 흠씬 젖어 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하나님의 심판 날까지도 시집가고 장가들었던 무지몽매한 세상놀이가 지금 똑같은 타락으로 재현되고 있다.

눈을 감고 비 오는 소리를 들으면 신음소리 같은 탄식이 들린다. 문득 섬뜩한 기운에 심령이 오그라든다.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심판의 날, 겉옷도 걸치지 말고 도망하라는 위급한 그 날, 아이와 아이 밴 여자에게 화가 있을 그 날, 재물에 빠진 목회자들과 영생 얻은 기쁨을 소중하게 간직하지 못한 무리들의 주검의 그 날, 비로도 끌 수 없는, 그리스도 예수의 재림의 날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장탄식이 들린다.

비가 내린다. 먼지 가득한 세상이 씻긴다. 땅은 두 팔을 벌려 비를 한껏 끌어안고, 나뭇잎들은 재잘대며 저마다 들고 온 그릇에 비를 담는다. 청명의 산은 높고, 배불러 흐르는 강은 깊다. 시인은 비를 예찬하고, 우리들은 비의 주인을 찬미한다. 오늘은 우산 없이 걷고 싶다. 비에 섞인 하나님의 눈물을 꼭 만지고 싶다.

/하민국 목사(검암 새로운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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