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 잘못된 루머로 엄청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부패한 속성의 질료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들은 소문에 나름대로 각색하고 덧붙이기를 좋아합니다. 이런 본능 때문에 사람들은 큰 상처를 입고, 심지어는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합니다. 더구나 소문을 삽시간에 전 세계로 보낼 수 있는 인터넷의 발달은, 그 당사자에게 더욱 치명적인 결과를 낳게 합니다.
조선의 영조가 이복형인 경종을 죽였다는 소문을 평생 짊어지고 살아가야 했으니, 본인의 고통은 상상할 수 없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소문의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목회자는 특히 이성에 대한 소문에 조심해야 합니다. 기라성같이 뛰어난 목회자들이 이성 문제로 한없이 추락하는 모습은 너무나 가슴 아픕니다. 그런데 19세기 초에 이런 잘못된 소문을 안고 살아가야 했고, 죽은 이후에도 그 때문에 자유롭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황당한 소문으로 죽어서까지 고통당해야 했던 사람이 바로 이탈리아의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입니다.
그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한량으로 노름을 좋아했고 악기를 약간 다룰 줄 알았는데, 어머니는 문맹이었습니다. 그가 네 살 되던 해에 홍역이 창궐하여 동생은 죽었고, 그도 합병증으로 살 소망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기적적으로 깨어났습니다. 그는 가난 때문에 항상 눅진하고 어두컴컴한 방에서 지내야 했고, 그의 어린 시절 유일한 장난감은 아버지의 바이올린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들이 바이올린에 소질을 보이자 매일 대여섯 시간씩 혹독하게 연습을 시켰습니다. 또한 제노아의 여러 음악가들에게 보냈습니다. 그러나 파가니니는 배운 지 6개월만 지나면 선생을 능가하곤 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의 야심은 더욱 커져갔습니다. 아들을 이용해 부자가 되고 싶어하는 단순한 속물적 욕망 때문이었습니다.
파가니니는 당시 유행하던 프랑스식 연주 기법이 아니라, 자신의 독특한 기법을 고안해 냈습니다. 그는 어린 나이에 연주자로 나서게 되었고, 가는 곳마다 열광적인 찬사를 받았습니다. 그의 연주는 표가 항상 매진될 정도였습니다. 그는 도박에 빠져 수 차례의 연주회 수입과 심지어 훌륭한 악기 안드레아 아마티를 날리기도 했습니다. 고로 연주회를 펑크낼 상황이었는데 마침 어느 부유한 프랑스 팬이 과르네리 바이올린을 빌려 주는 바람에 연주회를 예정대로 할 수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지나치게 뛰어난 연주 실력 때문에 항상 고약한 소문이 따라다녔습니다. 파가니니는 아름다운 이탈리아 여인과 치열한 사랑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사랑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애인이 바람을 피웠습니다. 그 사실을 안 파가니니는 발작을 일으켰고, 자신도 모르게 옆에 있던 칼을 여인을 향해 휘둘렀습니다. 그 일로 여인은 죽었고, 그는 4년 동안 감옥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그는 정식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이었기에 글을 쓰거나 읽으며 지루한 감옥생활을 할 수 없어서, 간수에게 바이올린을 넣어 달라고 사정했습니다. 그의 요청이 허락되어 감옥에서 4년 동안 바이올린을 끼고 지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감옥에서 탁월한 연주법을 독학으로 익히게 되었습니다.
그의 실력은 대단하여, 바이올린 줄을 다 끊어 버리고 G선 하나만 가지고 별 희한한 소리를 흉내 내는 등 상상할 수 없는 연주를 할 수 있었습니다. 청중은 그의 연주에 깊이 빠져들었고, 때로는 실신하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보통 사람들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마음과 정신을 흔들어 놓는 연주였기에, 연주회가 끝나면 수많은 사람들은 미친 듯 무대로 뛰어올라가 귀신이 붙은 건 아닌지 알아보기 위해 바이올린을 샅샅이 훑어보는 일이 다반사였다고 합니다. 사람의 재능만으로는 할 수 없는 연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당시 피옴비노와 루카의 여군주 엘리자(Maria Anna Elisa Buonaparte, 1805)는 나폴레옹의 여동생으로, 그의 연주를 들을 때마다 혼절했다고 합니다. 수많은 청중 앞에서 여군주가 연주를 듣는 중 자주 혼절하니, 창피하여 나중에는 커튼 뒤에서 연주를 들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사울에게 들었던 악귀가 다윗이 수금을 탈 때에 떠나갔다고 하는데, 아마도 그에 버금가는 연주를 했던 게 아닌가 합니다.
그에게서 많은 음악적 영향을 받았던 프란츠 리스트(Fraz Liszt)는 1840년 파가니니에 대한 추도사에서 "소문에 의하면 그는 자신의 영혼을 악마에게 넘겼으며, 그가 그토록 매혹적으로 켜던 네 번째 현은 바로 자기 손으로 교살한 애인의 창자로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리스트조차도 파가니니가 신기에 가까운 연주를 할 수 있던 것은 악마의 도움 때문이었다고 생각할 정도였으니, 일반인들은 말할 필요조차 없었습니다.
그뿐일까요? 파가니니가 비엔나에서 연주한 후에 여자들은 너도나도 그의 머리 모양을 따랐고, 남자들은 바이올린 문양이 새겨진 스카프를 둘렀습니다. 단추나 지팡이, 담뱃갑, 약상자 등에도 그의 초상이 새겨졌습니다. 한 마디로 연주를 통해 사람들의 감성을 뒤흔들어 놓은 천재였습니다.
음악가 슈벨트는 그의 연주를 감상한 후, 저런 인물은 다시는 나오지 않을 거라고 탄복했습니다. 당시 비엔나나 베를린에서는 이탈리아 연주자들을 낮게 여기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파가니니의 연주를 본 후에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 화가는 당시의 연주회를 관람하고는 "남자들이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무대 위로 뛰어오르려는 여자들을 가까스로 막아내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당시 성악아카데미의 교장은 연주를 본 후 친구 <괴테>에게 이런 편지를 썼습니다. "이 사람이 이루어내는 것은 비상하며,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남녀노소 누구나 그의 연주에 열광한다는 것, 그리고 같은 악기를 다루는 다른 어떤 대가들도 도저히 흉내 내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그의 연주는 도도하기만 한 영국인들을 또 미치게 했습니다. 파가니니의 연주회는 푯값이 보통 연주자의 몇 배나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연주회에는 항상 표가 매진되었습니다. 얼마 전 정명훈 선생의 스칼라 연주회가 있었습니다. 대체적으로 스칼라의 심포니 연주에는 항상 자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표가 매진되어 극장 앞에서 당황했습니다. 그러나 행복했습니다. 세계 최고의 오페라 극장에서 정명훈 선생님에 대한 인기가 얼마나 높은가를 실감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베를리오즈(Berlioz, 1803-1869)는 파가니니를 만난 후 이런 글을 썼습니다. "나는 한 남자를 만났다. 긴 머리에 꿰뚫는 듯한 눈빛, 피폐한 얼굴, 이제껏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천재성에 사로잡힌 거인 중의 거인. 그의 모습은 내게 큰 충격을 주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파가니니를 수전노라고 비난하였지만, 그는 베를리오즈가 생활고로 시달릴 때 당시 천문학적 금액인 2만 프랑을 아낌없이 주었습니다. 그가 과도하게 돈을 아낀 것은 40살에 둔 어린 아들 때문이었습니다. 아들만은 자신처럼 고생을 시키지 않으려는 순수한 열망이 있었습니다.
그는 결국 니스에서 후두 결핵으로 58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따라다니던 소문 때문에, 사제는 그가 사탄과 결탁하였기에 그런 기막힌 연주를 할 수 있었다고 믿어 장례식 집례를 거절했습니다. 파가니니는 자신의 고향인 제노아에 묻히기를 소원한다고 유언하였으나 주교는 거절하였습니다. 파가니니와 가까웠던 체솔레 백작은 "그를 오래 전부터 알았지만 결코 비기독교적인 태도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선언했으나 소용없습니다.
주교는 그가 부자임을 알고는 "사탄의 도움으로 벌어들인 재산 일체를 교회에 헌납한다면, 이를 참회의 표시로 인정하고 장례를 허락하겠다"고 제의했습니다. 결국 아들 아킬레(Achille)는 아버지가 연주로 벌어들인 그 막대한 돈을 교회에 헌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교회에서 장례를 하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1876년 파가니니가 죽은 지 36년 만에 결국 로마 당국이 청원을 받아들였고, 드디어 가톨릭의 전례에 따라 파가니니의 장례를 치를 수 있다는 통보를 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신자들의 감정을 고려하여 밤중에 조용히 장례를 치르라는 조건이었습니다.
파가니니가 생전에 구라파 사람들을 미치게 만들었던 바로 그 바이올린은 현재 제노아의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그 악기에는 악마가 붙어 있다는 소문 때문에 다른 사람이 연주하기를 꺼리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귀한 악기가 박물관의 유리상자 안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의심 어린 눈길을 견디어내기란 너무 힘들 것 같습니다. 이 시대 또 다른 파가니니 같은 천재가 나타나, 2백 년 동안이나 켜켜이 쌓인 먼지를 훌훌 털어내고 그 바이올린으로 연주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그 바이올린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날을 소망해 봅니다.
그가 작곡한 카프리스 24번의 연주를 들으며, 한 인생이 악한 소문으로 얼마나 힘들어질 수 있는가를 곱씹어 봅니다(참고: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 김지선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