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민국 칼럼] 하산(下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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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에 필요한 배낭 짐을 꾸린 지 두 주일이 지났다. 주일예배로 시작되는 1주일의 꽉 찬 일상 속에서 무탈하게 산행을 계획한다는 자체가 무리일 수 있다. 일상의 시간과 느닷없이 닥치는 애경사는 언제나 산행의 발목을 잡는다.

그래도 올 여름에는 꼭 산행을 강행할 심산이다. 지리산을 함께 오르던 학창시절을 기억하며, 통천문(通天門)에 묻어 둔 10원짜리 동전을 어느 동창이 먼저 와서 꺼내 보았을까 들춰보고 싶다. 벌써 35년이 지난 세월이다.

젊음만 믿고 준비 없이 오르다 염분 부족으로 쓰러졌던 지리산이다. 입 주변이 엉망진창이 되도록 소금을 먹여 준 산행 고수의 도움으로 의식을 회복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배낭을 꾸린 지 세 주일이 지나서야 밤 열차에 몸을 실었다. 서울역 대합실의 열기를 지나 열차의 규칙음에 체면이라도 걸린 사람처럼 아련히 눈을 감기까지, 무엇을 위한 인고인지 분간할 수 없는 시간들이 저마다 당위성을 앞세워 다가온다. 그럴 때마다 고개를 흔들며 밤을 지났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일상들이 하나둘씩 솜처럼 부서져 사라진다.

결국 산행 준비는 필요한 도구들을 챙기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시간들을 털어내는 비움으로 시작된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등산로 입구에 도착했다.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내려앉은 별들은 밤을 지새운 진한 수다도 부족한 양 아직까지 여명을 딛고 모여 있다.

헤드랜턴을 장착해야 등산로가 보이는 새벽 미명이다. 광폭한 물소리만 고요를 업신여기는 듯 큰소리를 치며 흐른다. 헤드랜턴의 불빛을 따라 한 시간여를 오른 너럭바위에서 동이 트는 붉은 하늘을 마주한다. 산야가 단장한 밝은 얼굴을 드러낸다. 아름답고 숭고하기까지 한 산기운이 폐부 깊숙이 파고든다.

신록이 짙다. 진녹색 잎사귀들이 바람 한결에 진한 숲내음을 쏟아낸다. 계곡은 장마의 여파로 거센 물거품을 내뿜으며 대해(大海)로 향한 행군을 멈추지 않는다. 담소를 거슬러 오르는 물고기의 비상 위로 햇살이 눈부시다.

산길이 좋다. 정강이를 스치는 풀잎의 간지러움이 정겹다. 울창한 나무들이 성숙한 여인네의 육감처럼 저마다 긴  머리카락을 바람결에 나부낀다. 위풍당당한 바위가 수사자의 위용으로 나앉아 나무들의 교태를 지긋이 바라본다.

숲과 계곡의 조화를 여유롭게 지나면서 다시 가파른 오르막이다.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장송(長松) 허리를 부여잡고 선 채로 거친 숨을 몰아쉰다. 그래도 좋다. 비 오듯 솟아나는 땀방울까지 정겹다. 바람이 스친다. 개운하다.

물 한 모금으로 가벼워진 발걸음을 재촉한다. 숲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하늘은 아직 먼 정상(頂上)을 알려준다. 어느새 첩첩산중이다. 계곡물 소리가 끊어진 지 오랜 산길은 새소리가 무성하다. 큰 짐승이라도 뛰쳐나올 것 같은 잡목들 사이로 다람쥐가 연신 자리를 옮긴다.

바위를 둘러싸고 있는 소나무 군락 쉼터에 산객들이 모여 있다. 배낭을 내려놓으며 털썩 주저앉는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눈앞에 어깨동무하고 있는 준령들이 산맥을 이루어 펼쳐져 있다. 아, 아름답다. 지극히 경이로운 아름다움이다.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찬양이 절로 나온다.

거친 숨이 잦아들면서 삶의 투영 속에 신음하던 지난날이 바람결에 묻어온다. 언제나 지나고 나면 회한뿐인 인생은 눈에 보이는 육신의 체감만을 위한, 부질없는 현실만을 고집했다. 과거는 돌이켜 보면 항상 그렇듯 관용적이지 못한 시간이고, 적절치 못한 대처 때문에 늘 안타까운 시간이다.

충분한 휴식을 취한 등산객들이 저마다 손을 입으로 모아 소리친다. 메아리가 아득히 멀다. 삶의 뒤안길도 산 깊은 메아리처럼 아름다운 돌이킴이기를 소망해 본다.

정상은 아직 멀다. 그러나 도착할 것이다. 설령 정상에 도착하지 못하더라도 산행의 의미는 이미 삶의 영역에 투영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삶은 과정이 전부다. 우리들의 목적은 이루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루고자 하는 과정을 지나야 하기 때문에 설정한 부표 같은 것이다.

부표를 띄워놓은 위치를 망각할 수도 있고, 반드시 부표를 찾아 나서야 할 이유 자체를 망각할 수도 있다. 그저 우리들의 삶은 부표를 설정하던 그날의 실천들을 과정으로 여기며 숨을 쉬고 있다면 지금 이 순간까지 생존이다.

더러는 부요하고 안락하고 싶은 욕망, 조금은 으쓱거리고 싶은 자만, 누구에게라도 인정받고 싶은 명예, 빈곤과 궁핍 속에서도 자중했노라 소리치고 싶은 충만까지, 우리들은 죽음 문제를 해결해 주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정상이다. 발 아래 준령들이 아득하다. 천왕봉(天王峰)이라고 쓰인 바위에서 사진을 찍기 위해 등산객들이 줄을 서 있다. 이제 우리들은 하산을 해야 한다. 천왕봉이라는 바위를 조성하신 창조주께서, 삼천 층 그 하늘에서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조심스럽게 하산하라고 거듭 거듭 당부하신다.

하산은 배낭 짐이 가볍다. 많은 것이 필요 없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천국 생명책에 우리들의 이름을 기록해 주신 그날부터 우리의 삶은 하산의 과정이다.

/하민국 목사(검암 새로운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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