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다시 부활시키는 길도 '자기죽음과 희생'뿐
아이러니하게도 찬란한 생명은 혹독한 자기죽음과 희생을 통해 오게 된다. 봄의 아름다운 생동은 매서운 겨울의 한파를 지나야 하며, 태아의 경이로운 생명도 생사를 넘나드는 산모의 고초를 거쳐 태어난다. 무수히 많은 별들 역시 수명을 다한 별들의 잔해로 탄생되며, 인간의 몸도 스스로 죽는 아포프토시스 세포가 다른 세포의 먹이로 산화되면서 생명력을 유지해 나간다.
15일 동안 먹지 않은 채 알을 돌보다 새끼들의 먹이로 자신의 몸을 내주는 가시나무 물고기나, 흐르는 거친 물살을 헤치고 올라가 산란과 더불어 생을 마치며 새끼의 먹이가 되는 연어의 일생은, 생명과 죽음이 다른 것임에도 하나의 길로 연결되어져 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자기죽음과 희생을 발판으로 생명을 얻고자 하는 것은 종교의 보편적 진리이기도 하다. 힌두교 고전 시는 "요가에 몰입하여 자기를 부정하는 사람은 이 세계에서 태양계를 넘어선다(=자유를 얻는다)"고 노래한다. 각고(刻苦)의 훈련으로 자기를 부정하면 구원에 다다를 수 있다는 뜻이다.
불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욕망의 주체인 자신을 비우면 열반(=구원)에 이른다고 설파한다. 열반에 이르고자 하는 욕구마저 제거되어야 참된 구원이 이루어진다. 완전한 자기소멸이 구원인 것이다.
유대교는 어떠할까? 초막절은 조상의 광야생활을 기념하는 절기인 동시에 새해를 시작하는 명절이다. 흥미로운 것은 "누가 살고 누가 죽을 것인가?"라는 기도로 시작한 후, 10일 동안 "오 나의 하나님,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는 형체가 없는 것과도 같습니다.... 저는 먼지일 뿐이고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라는 참회의 기도를 드린다. 그 후 음식을 곁들인 춤과 노래의 성대한 축제로 초막절은 막을 내린다. 자기죽음을 거쳐 새로 태어난 생명을 즐기는 것이 초막절인 것이다.
이슬람에서는 수행의 길 끝에 도달한 사람을 "수피"라고 한다. 이들의 수행법 중 하나는 명상으로 '알라를 묵상하며 자신을 소멸해 나갈 때, 납덩어리가 같은 영혼이 금으로 승화되고, 천상의 태양(=알라)을 향해 날아가는 독수리가 된다'고 한다. 자기죽음과 희생은 생명으로 나아가는 종교의 보편적 진리인 것이다.
일반 역사에서 자기죽음과 희생은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백의종군한 이순신 장군은 13척으로 왜군 133척을 상대하는 중과부적(衆寡不敵)의 상황에 쳐해 있었다. 안팎으로 해결해야 할 일들도 많았다. 늦가을이라 바다 날씨가 매우 추웠지만, 장졸들에게는 추위를 이길 만한 옷이 없었다. 더욱이 식량이 모자라 굶주리기까지 하였으니 승리를 기대한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었다.
그러나 "必死則生 必生則死(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려고 하면 죽는다)"는 정신으로 전세를 뒤집는 대승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살고 죽는 것이 하나의 길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천문학적 사재(私財)를 정리하여 만주신흥무관학교를 운영하신 이회영 선생도 동일하다. 김좌진 장군을 비롯해 10년 동안 3,000명의 인재를 양성하였지만, 본인은 극심한 가난으로 아사(餓死)하시고야 말았다. 참담한 죽음이지만, 자기죽음과 희생이 생명으로 이어지는 놀라운 길이라는 것을 보여주셨다.
자, 그렇다면 위기에 빠진 한국교회를 다시 부활시킬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 도덕적 탈선과 타락으로 사회적 물의(物議)를 일으키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회생시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자기죽음과 자기희생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요한계시록 5장은 자기죽음과 생명의 긴밀성을 잘 보여준다. 예수님은 가장 높은 천상의 세계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종말론적 통치권과 심판권을 수여받으신다(계 5:7). 온 하늘과 우주의 모든 피조물도 예수님을 찬양하고 경배한다(계 5:11-14).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예수님을 "죽임 당한 어린 양"으로 묘사하고 있다(계 5:6). "죽임 당한(에스파그메논)"이라는 용어는 도살장에서 짐승을 도살할 때 사용하는 단어이다. 예수님의 외모에 도살의 흔적이 선명한 것이다.
더 좋고 아름답게, 더욱 찬란하게 표현해도 부족할텐데, "죽임 당한 어린 양"으로 묘사한 이유가 무엇일까? 예수님의 하늘의 영광과 승리가 십자가의 자기 죽음과 희생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나타내고자 한 것이다. 무엇보다 기독교는 자기죽음과 희생의 종교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한국교회를 다시 부활시키는 길도 그리스도인들의 "자기죽음과 희생의 길"외에는 없다. 더 늦기 전에 "자기죽음과 희생의 삶"을 실천해야 한다. 죽음을 통해 생명으로 이어져 가는 법칙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적용하신 법칙이다. 이 법칙은 자연의 섭리로, 종교적 진리로, 일반 역사를 통해서도 나타나고 있다.
자연의 작은 미물(微物)도 죽고자 하지 않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자기죽음과 희생은 새 생명으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