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민국 칼럼] 여(女)집사의 둥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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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로 가야 하나? 이사를 해야 한다. 보증금을 줄여가면서 작은 집을 전전하며 대여섯 번을 옮긴 지금의 월셋집은 최악의 상황이다. 보증금마저 밀린 월세로 다 까먹었다. 다행히 서울 외곽 전원주택에 사는 지인이 몸만 들어오라고 한다. 그곳으로 가야 하나? 아니, 가도 될까?

벌써 십오 년이 지난 세월이다.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눈물로 보낸 세월이 강산이 두 번이나 변한 시간이다. 어떻게 살아왔나? 돌이켜보면 무지하고 허망한 시간이다. 사업 실패로 교도소에 수감됐던 남편이 신학을 배우겠다고 자처하면서 시작된 불행의 그늘이다.

남편은 불신자였다. 시부모는 종교에 대한 강요는 없었지만 사찰 행사에 적극 참석했다. 남편은 사탕을 얻어먹기 위해 다닌 유년기의 교회 이야기와 졸업한 중·고등학교가 미션스쿨이었다는 이야기를 술버릇처럼 내뱉었다.

극한 어려움에 처한 경제 환경에도 불구하고 처자식에 대한 부양의무를 다해야 하는 남편은, 피폐해진 가정을 짊어져야 하는 삶의 무게가 무척이나 힘들었으리라. 시시때때로 생명의 위협까지 느꼈으리라. 자살이라도 하고 싶은 충동과 현실에 대한 당위성 있는 도피가 신학이 아니었을까.

남편은 신학교에서 유부녀를 만났다. 선교 사역을 위해 신학을 배우러 나왔다는 여자와의 불륜은, 어쩌면 남편에게 삶을 지탱시킬 수 있는 양분처럼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남편의 외박과 외도는 출석 교회에까지 산불처럼 퍼져 나갔다. 어떻게 해야 하나. 심장이 아프다. 전도사들이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들고 심방을 거듭해 주었지만 마음을 안정시킬 수가 없다. 마음에 너무도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다. 어떤 것으로도 메울 수가 없다.

남편은 급기야 이혼을 요구했다. 두 사람은 서로 이혼을 선택하고 새로운 출발을 약속한 모양이다. 작은 체구로 기억되는 여자는 사업 실패로 지친 남편에게 어떤 위로가 되었는지 모른다. 친정 형제들과 지인들이 용서하라는 권면을 종용했지만 용서할 마음이 없다. 남편의 이혼 요구를 들어주기로 마음먹었다. 법정에서 졸도한 것이 못내 수치스럽다.

남편의 옷가지들을 교회 근처 세차장에 내버리듯 맡겨놓은 날, 비가 내렸다. 용서의 덕목과 사과의 마음을 담은 시아버지의 편지를 받았다. 뜻밖의 상황이다. 몇 번을 곱씹으며 읽었다. 마음이 아프다. 남편 때문에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다. 아이들 마음에는 얼마나 큰 상처가 생겼을까.

기침이 잦아지더니 각혈을 한다. 폐결핵으로 사십을 넘기지 못한 친정 어머니처럼 죽는가 보다. 각혈을 하면서 아이들을 남편에게 맡길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서럽고도 서럽기만 하다. 남편을 잃은 여자에게 자녀들까지 맡겨야 하는 비운의 환경은 차라리 실없는 웃음을 터뜨리게 한다. 가끔씩 만나는 아이들의 입에서 제법 부요한 환경이라는 소리를 들려준다. 그래 너희들만 행복하면 된다.

각혈이 잦아들면서 아이들과 다시 가정을 꾸렸다. 가난하고 어려운 환경이지만 서슴 없이 달려온 아이들이 고맙고 기특하다. 남편은 부동산을 하면서 간헐적으로 자녀들의 교육비를 보내왔다. 살아보라지. 그 끝이 어떠할지 무척이나 궁금하다.

남편의 삶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는 풍문을 접할 즈음, 암(癌) 진단을 받았다. 이번에는 암이다. 지겹다. 쓰라린 소식만 전달받는 마음에게 너무도 미안하다. 각혈을 멈추게 하신 하나님, 이제는 암이랍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요. 치료비도 없는 것 아시지 않습니까. 이제 제발 데려가 주십시오. 불러주십시오. 밤새도록 눈물을 쏟아냈다.

남편이 목사가 되었다는 풍문과 시부모까지 신실한 성도가 되었다는 풍문은 차라리 기뻐할 수만 없는 쓴웃음이다. 남편의 가정 복음화를 위해 도구로 사용하신 하나님의 음성은 세월 지나도록 좀처럼 헤아릴 수가 없다.

빈털터리면 어떠하랴. 어차피 빈 몸으로 와서 빈 몸으로 가야 할 세상과의 이별이다. 무엇인가 수족(手足)이 움직일 때, 살아 움직일 때 정리를 하자. 대학생이 된 자녀들의 물품을 정리했다. 다행히 아이들 아빠가 대학교 주변에 세 평 남짓 작은 자취방을 마련해 주었다. 한 가정이 세 조각이 되었다. 그래도 한결 마음이 편하다. 이제 몸만 들어오라는 그곳으로 가면 된다.

새벽이면 찬바람이 느껴진다. 세찬 바람이 아니다. 소리 없이, 요동 없이 내려앉는 서늘한 기운이다. 강하고 강한 여름 폭염이 물러간다. 가을의 무기는 강한 찬바람이 아니다. 유(柔)함이다. 유는, 부드럽고, 성질이 화평하고 순하며, 여리고, 약하고, 무르며, 복종한다는 의미로 쓰인다.

모든 것을 용서할 걸. 모든 사람의 행복을 위해 기도할 걸. 죽을 때가 되면 소는 눈물을 흘리고 사람은 선해진다는 소리가 맞는가 보다. 유함으로 살고 싶다. 유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이삿짐차가 비포장길을 들어선다. 하나님, 오늘은 찬송하지 않으렵니다. 꼭 하루, 오늘만 찬송하지 않으렵니다. 까치 한 마리가 미루나무 둥지로 나앉는다.

/하민국 목사(검암 새로운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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