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500주년 지상 강좌] 루터의 95개 조항과 면죄부(1)
오는 10월 31일은 종교개혁 499주년 기념일입니다. 그리고 내년은 종교개혁이 일어난지 5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이런 의미있는 때, 본지는 조직신학자인 김재성 박사(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의 <종교개혁 500주년 지상 강좌-루터의 95개 조항과 면죄부>를 매주 연재합니다. 본지 편집고문이기도 한 김 박사는 앞으로 이 지상 강좌를 통해 마르틴 루터의 삶과 신앙, 그리고 신학을 살피며 종교개혁의 역사적 의미와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고찰할 예정입니다.
한국교회는 갱신과 개혁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가 물려받은 신앙의 유산에 대해서 너무나 무지하여서 어떤 것이 교회의 개혁이요, 갱신인지를 분간하지 못하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 지금 과연 우리는 교회를 어떻게 개혁해 나가야 하는가?
한국교회를 위해서 사역하는 분들이 루터에 대해서나, 종교개혁에 대해서나, 너무나 모르고 있음에 대해서 깜짝 놀랐다. 루터가 주장한 바에 대해서도 피상적으로 알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루터의 생애와 가정과 공헌에 대해서도 전혀 모르고 있는 실정이다. 부디 이 글을 통해서 무지한 생각과 마음을 깨우치고, 소중한 종교개혁의 정신을 나누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1989년 독일 베를린의 장벽이 무너지고 난 후, 필자를 비롯한 몇 분들이 함께 한국 여권을 가지고 동독 땅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총신대학교 총장을 역임하신 김의환 박사를 비롯하여 몇 분의 신학자들과 함께 루터가 95개 조문을 내걸었던 비텐베르크를 방문하였다. 오랫동안 꿈꾸어 오던 루터의 역사적 현장을 방문하게 되었다. 서베를린에서 동베를린으로 넘어 들어가는 순간, 러시아의 강압통치 하에서 공산주의 위성국가로서 너무나 가난하고 힘들게 살고 있구나 느낄 수 있었다. 당시 동독은 구소련의 위성국가들 중에서 가장 잘 살고 있었다. 그러나 서독에 비하면 동독은 수 십년 뒤떨어진 후진국이었다. 건물과 도로시설, 주민들의 생활공간 등 모든 사회와 경제구조가 서독이 훨씬 앞서 있었다.
놀라운 점은 모든 면에서 서독에 비해서 매우 열악한 동독 땅이었지만, 루터의 유적지가 그대로 보전되고 있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계급투쟁과 혁명노선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기존 질서와 체제에 반항하는 원조로서 루터의 종교개혁을 홍보하였다. 비록 낡은 건물들이지만, 그곳에는 교회당 벽면에 큰 동판으로 95개 조항을 걸어놓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외에 낡은 대학건물과 루터가 머물던 집이며, 학생들이 거처하던 건물들도 돌아보았다.
1. 루터의 결혼과 가정생활
종교개혁의 첫 세대는 엄청난 박해와 오해가 난무하는 가운데, 종교적인 관행과 사회적인 관습을 혁파하는 개혁을 감행했다. 독신주의를 철폐하고, 새로운 세상으로 개혁하는 변화의 상징이 바로 성직자들의 결혼이었다. 루터가 성직자로서 처음 결혼한 사람은 아니다. 비텐베르크에서 그의 동료들이 먼저 결혼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하면, 루터와 종교개혁자들은 사회 혁신을 일궈낸 인물들이었다.
결혼을 금지하고, 독신주의와 금욕주의를 강조한 것은 중세 로마 가톨릭 교회가 율법적인 구원론에 매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오해하고, 곡해하였던 것이다.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 그리스도는 어두움의 권세를 이기신 승리자이다. 에덴동산에서 실패한 아담으로 인해서 사망이 왔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생명과 부활이 주어졌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는 사람이 생각하던 모든 것들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길이다. 율법은 이것을 행하면 당신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행동을 강조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사람의 행위와 선행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수도원의 독신주의와 금욕주의가 성경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루터는 철저히 파헤쳤고, 모범적인 결혼생활로 입증했다. 독신주의와 금욕주의 등 엄격한 생활 규칙만으로는 사회적으로도 유익한 봉사를 할 수 없다는 것을 깨우쳤다. 비텐베르크 어거스틴파 성직자들과 동료 교수들이 결혼식을 올리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났지만, 루터는 결혼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1521년에 보름스 제국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를 당했기에 불명예스러운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독일에서는 농민들의 반란이 확산되고 있어서, 혼란스러웠다. 여성을 유괴하는 것은 법으로 금지하고 있었지만, 수녀원에서는 많은 여성들이 사라지고 있었다.
루터는 뜻밖의 사건에 연루되었고, 결국 결혼으로 이어졌다. 1523년 부활절 저녁에 마리엔트론 수녀원을 탈출하려는 여성들을 자신의 마차에 숨겨서 독신주의의 굴레를 벗어나 자유롭게 살아가도록 도와주었다. 구출된 수녀들은 모두 아홉 명이었는데, 그 중 여덟 명이 비텐베르크로 흘러 들어왔는데, 그 중 한 명만 남기고 모두 결혼하게 되었다. 아직 결혼하지 않고 남아있던 한 수녀는 암스도르프나 루터 박사 둘 중에 한 사람과 결혼하게 될 처지였다.
루터는 신속하게 아버지와의 상의했는데, 심각하게 결혼을 권유하는 아버지의 격려를 받아들여서 갑자기 결혼식을 올렸다. 1525년 6월 27일, 42세의 신랑 루터와 26세의 수녀 캐서린 본 보라 (Katherine von Bora)가 도시 중앙교회에서 예식을 올렸다. 두 사람은 여섯 자녀를 낳으며 행복하게 살았고, 그 중에 두 명은 어려서 죽었다. 그의 아내는 집안에 찾아오는 방문자들과 친구들과 학생들을 위해서 많은 수고를 감당하여 항상 식탁의 즐거움을 나눴다. 독신주의가 왜곡된 것임을 생활로서 입증했다.
2. 종교개혁의 시대상황
위대한 사상과 신앙의 변화를 이룩한 종교개혁은 지난 수 천년의 역사를 거슬러볼 때에 많은 요인들이 결합되어져 있다. 그야말로, 16세기 유럽의 종교개혁은 인류역사의 전환점이었다. 기독교 신앙이 중세말기 사람들에게 구원과 생명의 교훈을 제시하여 새로운 세계를 열어준 일대의 사건들이다. 사람들은 변화의 열망을 가지고 있었지만, 중세 말기의 교회는 권위주의에 매여서 아무 것도 못하도록 압박을 가했다. 성경을 모국어로 읽는 것조차 금지하였다.
그 누구에게나 널리 알려진 역사적 사건이 독일 북부에서 발생하였다.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95개 조항을 비텐베르크 대학교회의 출입문에 꽂아놓았다. 감히 로마 가톨릭의 최고 권세자 교황을 비난하는 말도 들어있었다. 하지만, 루터가 새로운 교회를 세우자고 주장한 것은 아니다. 교회의 권위에 대항하는 반항적 행동을 한 것도 결코 아니었다. 죄사함을 받는 원리가 무엇인가를 놓고서, 면죄부가 아니라는 점을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과 토론하기 위해서였다. 루터가 제기한 질문들은 꺼지지 않는 요원의 불길이 막 피어오르는 서막이 되고 말았다.
면죄부 판매를 거부하는 루터의 반론이 나오기까지, 중세 말기에 유럽 기독교는 여러차례 변화를 겪고 있었다. 종교개혁은 진공상태에서 갑자기 영웅 한 명이 뛰어나와서 사람들을 이끌고 나간 것이 아니다. 그 배면에는 로마 교회 공동체의 균열이 있었고, 새로운 사회를 갈망하는 몇 가지 흐름이 있었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세상의 변화와 흐름이 어떻게 이루어졌던가를 돌아보아야 한다. 현재 한국의 역사적 상황 변화가 매우 혼란스럽고 세속화된 불순물들이 많이 들어있다고 판단한다면, 종교개혁은 어떤 시대를 거쳐서 변화로 이어졌는가를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사람들은 세상이 어디서 어떻게 변했는지를 모른채 살다가 사라지고 만다. 중세 말기가 어떻게 변했는가를 역사학자들이 정리한 것을 돌아보면, 우리가 그 시대를 살았다해도 결코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큼 보이지않는 흐름들이 종교개혁으로 이어졌다는 말이다.
첫째, 중세 말기에 이르러서 통합된 제국이 아니라, 각 지역별로 구분되는 국가주의 혹은 지역주의가 대두되었다. 신성로마 제국의 통일 시대가 지나가자, 각 지역의 언어와 문화와 관습이 각자 다르기 때문에 다른 지역 사람들과는 구별되려는 의식이 형성되었다. 통일제국은 점차 약화되어서 황제가 직접 다스리는 도시는 65개였고, 2천개의 도시들이 군주들이나 독립 도시로 형성되었다. 독일지역과 스위스 등 여러 곳에서 지역의 자주권에 자부심을 가진 사람들이 부쩍 들어났다.
종교개혁은 중세 문명의 통일성을 깨트렸다. 신앙적 차이점들을 바탕으로 하여 정치적인 입장이 지역적으로 표출되었다. 신성로마 제국 챨스 5세 (1519-1556)가 마지막 통합군주라고 말할 수 있다. 황제는 점차 통제력을 잃었고, 독일지역의 선제후들에게도 직접 명령할 수 없을 정도로 정치적인 권력이 약화되었다. 루터의 후견자 프레데릭 3세가 결정한 바에 대해서 반대하면서도 황제는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합스부르그 왕궁은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다가 핵심 지도부를 마련했다. 이 지역은 점차 독립적인 국가로 재구성되어졌다. 스페인은 합스부르그 왕가와 유력한 동맹관계였지만,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완전히 별개의 국가체제로 굳어졌다. 잉글랜드는 귀족들의 의회주의가 정착되었고, 프랑스 국왕 프랑소와 1세는 고문단을 활용하여 지역군주들의 통합을 꾀하였다. 유럽의 각 지역별로 서로 다른 방식으로 통치자의 권세를 세워나갔다.
유럽의 국가체제는 종교개혁이 시작된 초기에 현저하게 서로 다른 정치체제와 구조를 가지고 다르게 발전해 나갔다. 서쪽 유럽은 통일을 향해서, 동부 유럽은 이슬람마저도 관용과 포용을 주장했다. 통일제국의 황제보다는 이탈리아 사람들에게는 사업적인 거래가 더 중요했다. 그러나 다른 지역 사람들은 그들에게 세금을 납부해야할 이유가 없었다. 종교개혁이 전개되면서 피난민들이 발생하여 도시 간의 인구 이동이 잦아지게 되었고, 지주들이나 무역상들은 많은 재물을 축적할 수 있었다.
영국은 로마 교황청과 대립할 정도로 단일 군주제가 정착되었다. 불문법에 기초하여 튜더 왕가의 헨리 8세가 견고한 왕권을 행사했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는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이 형성되었다. 스코틀랜드는 제임스 4세가 잉글랜드에 맞서서 독립국가를 지켜냈다.
둘째, 종교개혁 시대에 유럽의 경제체제는 완전히 전환점을 맞이하였으니, 도시지역에서는 정치적 자유도시들이 토대를 갖추었고, 소규모 자본주의가 발생하였다. 도시에는 사람들이 계속 유입하는 인구 집중현상이 나타났고, 주택부족으로 도시 물가는 엄청나게 상승했다. 인구가 갑자기 불어났기에 음식 값은 6배나 올랐고, 목수와 노동자 임금은 두 배로 뛰었다.
독일 콜론이 가장 큰 대도시였는데 인구가 4만 명을 넘었고, 누렘베르그, 아우구스부르그, 울름, 스트라스부르그, 마그데부르그, 단지히, 비엔나, 프라하, 에르푸르트 등이 2만 명을 넘어선 대도시들이었다. 스위스 쮜리히와 베른 등은 6만 명 이상이나 되었다. 영국에서도 2백 7십만 명이던 인구가 16세기 말엽에는 4백 만 명으로 불어났다. 종교개혁의 여파로 영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바다를 건너 피신을 갔다. 유럽 대륙의 첫 관문이 되는 곳에 16세기에 갑자기 인구가 몰려들었으니, 벨지움의 항구도시 안트워프가 바로 그곳이다. 5만 명에서 10만 명으로 증가했다. 파리, 베니스, 밀라노 등 대도시 거주자는 20만 명 정도였다.
기본적으로 농업이 생업이던 시대가 근본적으로 바뀌게 되었는데 의복제조업, 제철소, 무기제작소, 소상업인들, 가내 수공업이 발전하면서, 신흥 부자들이 재물을 축적하게 되었다. 군주제 하에서 신분사회에 소속되어 살고 있던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가 변해가면서 많은 문제가 드러났다. 지주들은 이윤을 남기기 위해서 더 많은 농부들이 필요했다. 자신들의 권리주장에 눈을 뜬 농민혁명이 있었고, 농부들은 도시로 진출하여 자유로운 소상공인이 되었다. 루터의 영향으로 자유를 주장하는 기독교인들의 생각이 표출되었다. 권세자들과 정부에 대항하여 보다 급진적인 정치적 변화를 주장하는 농민들이 재세례파에 합류하면서 과격한 개혁사상이 널리 확산되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