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500주년 지상 강좌] 루터의 95개 조항과 면죄부(4)
지난 2주간 종교개혁 499주년을 기념해 루터의 95개 조항을 번역하고 그 중심주제를 분석했던 김재성 박사(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가 원래 연재하던 <종교개혁 500주년 지상 강좌-루터의 95개 조항과 면죄부>를 다시 이어갑니다. 내년 종교개혁 500주년을 앞두고 종교개혁의 의미를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하는 기회가 됐으면 합니다.
6. 개혁사상의 횃불들-루터의 3대 명문
활자 기술의 발전으로 루터의 95개 조항은 1518년 초까지 유럽 전 지역으로 보급되었다. 그 시대의 지식인들이라면 이 95개 논쟁의 내용들에 대해서 그 누구도 그냥 지나칠 수도 없었다. 더구나 기독교 성직자들에게는 그 무엇으로도 감출 수 없는 논쟁점이 되었기에, 로마 가톨릭 교회의 핵심사항으로 떠올랐다. 소속 종단에 대한 책임감과 의무감에서 루터는 95개 조항을 브란덴부르그의 대주교 알베르트에게 발송했다. 면죄부를 판매하는 일은 해악을 끼치는 일이므로 중단하도록 청원을 하였다. 알베르트 대주교는 답변을 보내지 않았고, 마인쯔 대학교 신학교수들에게 검토하도록 지시하였다. 2 후에, 대주교는 루터의 95개 조항을 교황청으로 보내면서, 이단적인 문서에 대해서 대응하는 조치를 요청하였다.
점차 루터에 대항하는 기득권자들의 탄압이 나타났다. 인골쉬타트 대학교 교수 요한네스 에크가 탄핵을 주장하면서 루터와의 논쟁에 뛰어들었다. 교황 레오 10세는 1518년 2월 3일, 어거스틴파 수도원장 가브리엘라 델라 볼타 (혹은 베네투스) 에게 루터를 통제하라고 명령했다.
1518년 4월 11일, 루터는 하이델베르그 대학에서 자신의 신학을 변호하는 토론에서 열변을 토했다. 스승 스타우핏츠가 주선한 것이기에, 어떤 면에서는 루터에게 공개적으로 발언할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루터는 면죄부와 같이 예민한 문제들은 피하고, 죄, 자유의지, 은총 등 기독교의 기본적인 신학에 대해서 유명론에 반대하는 신학을 진술했다. 루터가 준비한 28개항에 대해서 논의하였고, 12항목은 동료 레온하르드 베이에르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반대하는 내용으로 제시했다. 루터는 십자가의 신학과 영광의 신학을 대조적으로 설명했고, 그의 진술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도미니크 종단 젊은 수도사 마틴 부써가 참여하였다가 동참을 결심하였고, 훗날 스트라스부르그의 종교개혁자가 되었다.
하이델베르그로부터 돌아오자, 논쟁은 독일 북부 삭소니아 브란덴부르그 지방 전체로 확산되어졌다. 루터가 출교당할 것이라는 소문이 널리 퍼졌다. 루터는 로마 가톨릭에서 시행하고 있는 출교조치가 비성경적이라고 설교했다. 눈에 보이는 사람들에 대해서 출교의 권세를 행사하는 로마 가톨릭 교회는 그럴 권한이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성도들의 영혼에 대해서, 교회의 영적인 모임에 대해서는 가견적 로마 교회가 아무런 권세를 갖지 못한다. 이런 권징은 성도들을 치유하는데 사용되어야만 하는데, 해악을 끼치고 처벌하는 것은 온당치 못한 것이다.
1518년 8월, 루터는 드레스덴의 어거스틴파 수도원에서 루터는 엔세르와 회합을 가졌는데, 그는 루터의 약점들을 파고들었다. 루터는 엔세르를 드레스덴의 염소라고 비난하면서,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증오심을 표출했다. 도미니크 종단에서는 어거스틴파를 낮게 평가했었는데, 루터에 맞서서 마졸리니가 비판하는 문서를 출간했다. 루터는 이에 맞대응하여 논쟁을 주고 받았다.
아우구스부르에서 루터와 카제탄과의 토론이 벌어진 것은 1518년 12월이었다. 로마 교황을 공격하는 루터를 제압하려고, 교황청에서는 루터를 호송해서 로마로 데려오기를 원했다. 그러나 막시밀리안 황제와 교황청이 서로 긴장관계여서, 함부로 정치적인 권세를 발휘할 수 없게 되었다. 막시밀리언은 자신의 아들을 스페인의 통치자로 세우려 했고, 교황청에서는 동의하지 않았다.
1519년 1월 12일, 황제 막스밀리언이 사망하고, 신성로마 제국은 종말을 고했다. 마치 루터가 제기한 문제점들을 어떻게 처리할지 아무런 결론이 매듭되지 않은 것처럼, 장래 정치적인 계략들이 난무했다. 루터의 보호자, 프레데렉은 황제 선출권을 갖고 있었다. 루터는 대학교육의 개혁을 단행하여, 21세의 수재학자 필립 멜랑히톤을 헬라어 교수로 채용했다. 매일 저녁에 같이 식사를 하면서, 처음부터 호감을 가졌던 루터는 더욱 더 젊은 교수를 사랑하고 신뢰하게 된다. 멜랑히톤 역시 사회윤리에서 벗어나서 기독교 복음을 파악하고자 노력하여 많은 저술을 남기게 된다.
루터의 생애에서 가장 복합적으로 혼란스러운 시절이 다가왔다. 1519년 6월 27일부터 7월 15일까지, 라이프찌히에서 열린 논쟁에서는 루터에 대한 공격의 선봉에 칼쉬타트와 에크가 나왔다. 처음에는 칼쉬타트가 루터에게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루터는 칼쉬타트가 너무나 과격하고, 특히 농민혁명에 동조하는 쪽으로 나가자 결별하게 되었다. 라이프찌히는 공작 게오르게가 통치하고 있었는데, 그는 개신교 종교개혁이 성공할 것임을 토론회에서 직감하였다. 왜냐하면 루터가 시종일관 토론에서 좌중을 압도했다.
라이프찌히 논쟁에서 핵심은 교황의 수위권이었다. 그 본질은 성경에서 과연 로마 교황권을 지지하는 내용을 찾아볼 수 있느냐였다. 에크가 주장한 교황의 수위권과 권위에 대해서 초기 11세기까지는 전혀 역사적 근거가 없음을 루터가 논박했다. 교황의 수위권은 면죄부를 판매하기 위해서 정당화하는 것이라고 공격했다. 또 다른 잇슈는 성례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루터는 성례 자체에 대해서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중세부터 시행해 내려온 성찬의 기능에 대해서 거부한다고 주장했다. 에크가 루터를 짓밟고 핍박하면 할수록, 점차 교황권의 조치들에 대한 의문이 늘어만 갔다. 갈수록 더 낳은 의혹과 문제점들이 드러나게 되었다.
루터는 6월 29일 권위에 대해서 설교했다. 마태복음 16장 13-19절에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위임한 천국의 열쇠는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준 것이라고 풀이했다. 결코 그 권위를 로마 교황에게 준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선포했다. 교회는 죄를 사면하는 절대적인 권세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단지 선포할 뿐인데 목회적인 사역에 제한된다.
에크는 보헤미아의 후쓰와 같은 죄를 범하고 있다고 루터를 공격했다. 후스는 로마 가톨릭이 성도 개인의 구원여부에 대해서 마음대로 선포할 수 없다고 맞서면서, 하나님의 예정과 작정에 따르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에크는 후스의 파문을 정당화 하면서, 로마 교회의 수위권을 옹호했다. 루터는 교회의 머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며, 초대교부들의 글과 성경이이를 증거하므로 에크의 해석이 잘못되었다고 공격했다. 루터는 전혀 희망이 없는 로마 교황청에 대해서 신성모독을 범하고 있다고 선언했다.
에크는 루터가 교황의 수위권에 대해서만 공격하는데, 교회의 종교회의도 역시 권위를 가진다고 주장했다. 루터는 어거스틴의 글을 인용하여 종교회의 역시 권위를 주장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루터는 후스가 남긴 것을 보면 대부분 로마 가톨릭의 견해와 일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고 옹호했다. 이제 루터는 교황권을 거부하고, 종교회의의 결정도 비판했고, 권위의 최종 근거는 오직 성경이라고 하는 입장을 확고히 표명한 것이다. 루터의 입장들은 곧바로 여러 논문들 속에 보다 더 선명하게 담겨지게 되었다.
용감하면서도 뛰어난 신학적 진보가 표출된 것은 앞에 언급한 논쟁들을 거치면서 다져진 결과물들이다. 종교개혁에서 다루어질 중요한 내용들은 루터가 남긴 위대한 신학논문들은 1520년에 쏟아져 나왔다. 그리하여, 종교개혁의 결정적인 승리가 눈 앞에 보이는 변화의 시점이 되었다. 라이프찌히 논쟁은 루터로 하여금 교회의 개혁을 확고하게 그려내도록 자극을 주었고, 문제점들을 명쾌하게 지적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독일 귀족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는 루터는 로마 교회가 도저히 교정될 수 없는 집단이어서 자신의 결별은 돌이킬 수 없다고 선언했다. 상하구조로 된 로마 교회의 오류를 시정하기 위해서는 평신도들개혁에 앞장 서 줄 것을 호소했다. 1519년 막시밀리언 황제를 승계한 챨스 5세, 군주들, 기사들, 귀족들, 도시의 지도자들에게 영적인 무기를 사용할 것을 요청했다.
세속 권세를 조종하려고 하는 로마 교황청의 3대 오류를 지적하였다. 첫째는 영적인 검이 세상의 일시적인 검보다 더 우월하므로 세속 권세자들이 영적인 지도자들에 대해서 판결할 권한이 없다는 것은 오류이다. 둘째, 오직 교황만이 성경을 해석할 권한을 가졌다는 것은 잘못된 조항이다. 셋째, 오직 교황만이 종교회의를 소집하고 주관한다는 것도 왜곡된 조항이다.
여기서 루터는 독일 평신도 지도자들에게 매우 호소력 있는 제안을 내놓았는데, 만인제사장설이라고 알려진 매우 중요한 신학사상을 발표하였다. 모든 기독교인들은 하나의 기준에 속해 있으니, 하나님의 은총 아래서 살아가는 구속받은 죄인들이라고 하는 신분 상태이다. 성직자가 평신도보다 영적으로 더 우월하다는 것은 성경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세속적인 일에 종사하든지 혹은 공무적인 일을 하든지 간에, 평신도보다 성직자가 더 높다고 말할 수 없다. 기독교인들은 직분과 직책만 달라서 서로 다른 기능을 감당하고 있을 뿐이며, 신앙적인 의미에서 그들 사이에 질적인 차이점은 없다.
한국교회 목회자들이나 평신도 대표격인 장로들은 자신들이 마치 더 위대하고 더 높은 영적 자격을 갖추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강단에서 호통을 치는 목회자들은 오직 하나님에 대한 열정에서 성경의 가르침을 전파할 뿐이다. 결코, 강단 위에서 설교하는 사람이 더 훌륭하다거나 더 거룩한 사람이라고 높여줄 이유는 없다. 신학수학을 했다고 해서, 지식이 넓은 것이지 그 사람 자체가 특별한 존재라고 할 수는 없다. 교단의 총회장이나, 기독교 단체의 총재 혹은 이사장들이나, 신학대학의 교수진들이나, 선교단체의 설립자들이라 하더라도, 루터의 만인제사장설에 대해서 귀 기울여야할 것이다.
「교회의 바벨로니아 유수」라는 논문은 신학자들을 위해서 라틴어로 작성된 것이다. 영적인 이스라엘에 대해서 로마 바빌로니아가 폭정을 휘두르고 있음을 비유한 것이다. 이 논문에서 루터는 지금 예수 그리스도는 어떻게 무엇을 하고 계신가를 반문한다. 그분은 무엇을 하고 계시며, 지금 우리는 그분을 어떻게 갖게 되는가? 믿음으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믿음으로 그분의 몸과 피를 받으며, 성만찬에 참여한다.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서 13세기에 정립된 7성례는 가장 비성경적인 은혜 주입설을 정착시켰다. 로마 가톨릭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성례주의를 반복적으로 집행해 왔으나, 루터의 반론에 의해서 재정립되는 계기가 만들어졌다. 임직식, 결혼식, 장례식, 견신예식 등은 은혜의 수단들이 아니라고 루터는 확신했다. 로마 교회에서는 죄를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과 사람의 눈에 보이는 상징들과를 결합시켜서 오직 성직자들만이 집례 하는 성례주의를 포장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세례와 성만찬, 회개기도 3가지 성례만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정한 것이라고 인정했다. 물과 빵과 포도주라는 요소가 개입한다. 나중에 루터는 세례와 성찬만이 진정한 성례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신부가 성도들을 대신해서 미사를 통해 대속의 제사를 하나님께 올린다 하였다. 이것은 율법의 의무만을 강조하는 것이지, 복음의 약속들에 대해서는 하나도 증거하지 않는 왜곡된 기독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율법의 완성이요, 더 이상 희생제사는 필요하지 않다. 따라서 성도들의 교육을 위해서 가르치면 되는 것이요, 복음의 약속을 증거해야만 한다.
특히 성례 중에서도 성만찬 예식이 가장 왜곡되었다고 지적했다. 본질이 변한다는 화채설의 교리적 모순과 평신도들에게 포도주를 나눠주지 않은 것에 대해서 비판했다. 실재와 상징 사이에 구분을 하는 안목을 제시한 것이다. 훗날 개신교회들은 루터의 신학에 근거하여 한걸음 더 성경적인 성례론을 세울 수 있었다.
필자가 가장 주목하는 루터의 중요한 공헌 중에 하나는 성만찬에서 포도주와 빵을 함께 모든 성도들에 공유할 수 있도록 재정립한 일이다. 로마 가톨릭에서는 예수님의 피로 변한다는 포도주를 평신도들에게 나눠주지 않는다. 성찬시에 포도주를 나누다가 바닥에 흘리게 된다면 신성을 모독한 죄가 된다. 남자들의 수염에 한 두 방울이라도 묻히게 되면, 주님의 피를 소홀히 취급하는 죄를 범하는 일이라고 겁을 주었다.
「기독교인의 자유에 관하여」는 교황 레오 10세에게 공개적으로 보내는 서한이다. 1520년에 나온 세 개의 논문 중에서 가장 뛰어난 글이다. 신선하고, 독창적이며, 문학적으로도 탁월하고, 선택된 단어들과 논지의 전계가 매우 돋보인다. 이처럼 쉽고 아름다운 명문에서, 루터는 평신도들에게 깊은 영향을 남기게 되었다. 이 후로, 자유라는 단어가 루터의 신학사상에서 자주 등장하게 된다. 이 글에서 자유라는 것은 로마 교황청으로부터의 자유, 압박으로부터의 자유, 경제적인 쪼들림에서 자유 등 여러 가지로 사용되었다. 자유는 어디에서 나오며, 무엇을 가져다 주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다 이루셨으므로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
루터는 매우 탁월한 대조법을 구사했다. 실제와 표면의 대조법인데, 철학적이 아니라 철저히 기독교인으로서 논지를 밝혔다. 겉으로는 웅장하고 거창하게 보이지만, 사실은 어떠한가? 인간은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이다. 교회는 또 어떠한가? 지난 3백년 동안 로마 교황청이 얼마나 부패했는지를 밝혔다. 특히 성 버나드의 「성찰론」 (De Consideratione」에서 교황의 죄악들을 인용하면서, 레오 10세가 바르게 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루터는 영혼의 자유함과 속박에 대해서 양면적으로 다루었다.
이 글에서 루터는 두 가지 명제를 제시한다. 얼핏보면, 모순처럼 느껴진다. 기독교 신자는 누구에게 구속당하지 않는 자유인이면서도, 동시에 모든 사람을 섬기는 의무를 지니고 있다고 강조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은 그 누구에게도 속박을 당하지 않는 완벽한 자유함이 주어져 있다. 동시에 기독교인은 모든 사람들을 섬기는 봉사의 의무를 누구나 다 갖고 있다." 이 두 가지 논지는 서로 대립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서로 긴밀히 연계되어 있다는 것이 루터의 주장이다. 기독교인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믿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안목에서 볼 때에는 의롭다하심을 받은 자들이며, 모든 죄에서 자유하고, 참된 사람의 본성을 회복했다. 그러므로 구원을 얻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거나, 봉사하고 섬기면서 공로를 세우는 것이 아니다. 구원은 이미 얻은 것이기에, 기독신자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은 자발적인 의욕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 세 번 째 논문은 앞에 나온 두 글보다는 훨씬 더 솔직하면서도, 과격하다. 로마 가톨릭의 신학적 오류에 대해서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다. 사도 바울의 칭의론과 믿음, 윤리생활을 요약하여 제시하면서 중세 말기 로마 가톨릭의 관행에 대해서 논박한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