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다 이신칭의 때문?… ‘사고 없애려 자동차 없애자’는 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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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 개혁신학] 이신칭의인가, 이신행칭의인가

▲이경섭 목사.

▲이경섭 목사.

유보적 칭의론자들이 이신칭의 교리에 문제제기를 한 계기는 기독교의 부패와 윤리성 회복의 요청이었습니다. 그들이 들이대는 '유보적 칭의론'의 성경적 근거 역시, 윤리적 명제에 충실한 성경 편린들입니다. 성경은 워낙 방대하여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이 가능하기에 일견 그들의 논거가 성경적인 것 같아 보이나, 성경 전체의 사상을 아우르기엔 역부족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려스러운 것은 기독교의 심장인 이신칭의(以信稱義)를 윤리의 근간으로 삼아, '칭의'의 본의인 '하나님의 법정적 선언'을 '인간 행위의 의(義)'로 격하시키고, 초자연적 하나님의 의를 낡아지는 옷 같은 인간의 의와 동일시한 데 있습니다. 이러한 동일시는 행위가 배제된 이신칭의를 부패의 주범으로 몰았고, 기독교가 윤리성을 회복하려면 믿음만을 부르짖는 이신칭의를 폐기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게 했습니다.

이는 마치 자동차 사고의 원인을 모두 자동차에게만 돌려, 자동차 사고를 없애려면 자동차를 폐기해야 한다는 논리처럼 억지스럽습니다. 그들은 운전자의 잘못으로 사고가 날 수 있으며, 또한 사고 없이 안전하게 운전하는 사람들도 많다는 사실을 부러 외면하는 듯 했습니다. 아합 시대에 바알에게 무릎꿇지 아니한 7천명이 남아있었듯(롬 11:2-5), 이신칭의의 은혜에 감읍하여 결초보은하려는 자들의 간증이 교회사에 널려 있습니다. 바울을 바울 되게, 루터를 루터 되게 한 것이 이신칭의의 은혜였습니다.

'의롭게 하는 믿음은 세상을 이기게 한다'는 것을 주제로 쓴, <내게는 영원한 의가 있다(The Everlasting Righteousness)>의 저자 호라티우스 보나르(Horatius Bonar, 1808-1887)의 이신칭의에 대한 찬사를 들어봅시다.

"그의 칭의는 결코 그를 안심시켜 잠자게 하지 않는다. 그의 믿음은 그를 미래에 대해 아무런 주의도 기울이지 않는 자로 만들지 않는다. ... 믿음은 교회로 하여금 밤을 새며 기도하게 하고, 그 기도는 교회의 믿음에 힘을 더해준다. ... 현재의 악으로부터 정결함을 지키고 앞으로의 악에 물들지 않기 위해, 교회는 현재의 악과 다가올 악에 대한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적으로부터의 위협과 그에 대한 승리의 예견은 교회를 늘 깨어있게 한다."

이는 유보적 칭의론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보장된 칭의와 승리가 사람을 결코 나태와 방종에 빠뜨리게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물론 이신칭의를 악용하는 가라지들이 있음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언제고 선을 악용하는 이들이 없었던 적이 있습니까?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근다는 속담처럼, 그런 악용자들을 두려워하여 구원받을 택자를 위해 이신칭의를 말하지 않는다면 이는 더 큰 문제입니다.

이즈음 '이신칭의'가 부패자 양산의 주범이라는 유보적 칭의론자들의 주장을 다시 한 번 되짚어보고자 합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것은 이신칭의 교리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이신칭의가 제대로 가르쳐되지 못한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실제로 오늘날 교회들이 가르치는 '이신칭의'를 보면 반(半)펠라기안적인 이신행칭의(以信行稱義) 인 경우가 많고, 개혁자들이 가르친 순수한 이신칭의는 적습니다. 이는 장로교, 알미니안으로 양분되어 있는 한국교회 분포도를 보아서도 알 수 있고, 또 교회 안에서 가르쳐지는 면면들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알미니안 교회가 가르치는 이신칭의는 당연히 '이신행칭의(以信行稱義)'이고, 장로교회의 경우에도 그쪽으로 경도된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신칭의를 한국교회 전체의 교리로 단정하고, 한국교회의 부패 원인이 이신칭의 교리에 있다고 추정하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기독교의 부패는 이신칭의 교리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개혁자들이 전수해 준 순수한 이신칭의 교리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때문으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이신칭의를 제대로 가르치려면 전제할 것이 있습니다. 곧 그 뿌리인 '인간의 전적 무능'과 '그리스도의 대속'이 먼저 충분히 가르쳐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 가르침을 통해 성령의 인침이 있고, 성령의 인침을 받은 학습자는 겸비함과 은혜의 감읍함으로 그리스도를 믿게 되며, 하나님은 그 믿음을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이신칭의가 온전히 구현되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충실히 밟지 않은 채, '믿기만 하면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만 부각된 편린적 이신칭의는 화석화된 공식으로 전락되고, 도덕폐기론이나 기복주의가 끼어들 여지를 만들어 줍니다.

비슷한 경향은 다른 교리 학습들에서도 어렵지 않게 발견됩니다. 예컨대 '하나님의 자비'가 충분히 설명되지 않은 '하나님의 주권'은 독재자의 전횡으로 곡해되고,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자유'가 충분히 설명되지 않은 '선택 교리'는 불평등한 교리로 곡해됩니다. 고구마, 감자 같은 뿌리 식물을 줄기만 보고서 실체를 알 수 없듯, '인간의 무능'과 '그리스도의 대속'이라는 뿌리가 충분히 설명되지 않은 채 이신칭의만 앵무새처럼 되뇌이면, '믿기만 하면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하나의 공식만 남습니다.

제임스 뷰캐넌(James Buchanan. 1804-1870)은 "성령이 역사하는 이신칭의 신앙이 구현되려면 '대속'과 '칭의'가 함께 이해돼야 한다"고 나서 말한 다음의 지적은 옳습니다. "종교개혁 시대에 성령의 역사로 칭의가 하나의 공식이 아닌, 실재의 진리로서 생생한 이해력을 갖게 된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대속'적 성격과 '이신칭의' 교리의 중요성이 동시에 인식된 까닭이다. 성경에서 이 두 가지 교리는 절대적으로 연합되어 있다. '칭의'는 하나님의 어린양의 '죄를 짊어지시는 사역'에 기초하고 있다."

뿌리가 충분히 가르쳐지지 아니한 불완전한 이신칭의의 가르침에는 성령의 증거가 따르지 않고, 성령의 증거가 결여된 화석화된 교리에는 이신칭의가 제대로 구현될 수도, 어떤 능력도 산출될 수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신칭의 논쟁의 핵심은, 고도의 신학적인 어떤 것이라기보다, 이신칭의의 온전한 가르침과 성령의 증거에 관한 것입니다. 진리의 교사는 성령이십니다(요 16:13,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이는 모든 복음의 가르침에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성령이 강림하기 전까지 복음전도를 금하신 이유도(행 1:4), 참 교사인 성령의 가르침 없이는 복음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요일 2:27). 성령의 인침이 있는 이신칭의 신앙에는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고백자들로 하여금 바울을 바울 되게 하고 루터를 루터 되게 합니다.

토머스 크랜머(Thomas Cranmer, 1489-1556), 윌리엄 틴데일(William Tyndale, 1494-1536), 휴 라티머(Hugh Latimer, 1485-1555), 니콜라스 리들리(Nicholas Ridley, 1500-1555)를 비롯해 수많은 순교자들이 이신칭의에 빚지고 있으며, 교회사의 위대한 부흥의 역사가 다 그러합니다.

다음 뷰캐넌의 지적도 같은 맥락입니다. "이신칭의는 종교개혁 시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부흥의 시기와 영적 대각성의 시기에 설교의 대주제가 되어왔다. 모든 참된 부흥의 시기에 성령께서 교회들에게 이신칭의 교리의 실재를, 진리로 살아 있는 경험으로 새롭게 가르쳤다." 오늘날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라는 경구를 들먹이며 이신칭의 교리를 종교개혁 시대의 산물로 퇴물 취급하려는 자들을 향해서도 그는 충고를 잊지 않습니다.

"종교개혁의 옛(old) 신학보다 더욱 새로운 것은 없다. ... 복음은 루터 이전에도 존재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이어지는 세대에 있어 복음은 언제나 처음 영감의 물줄기에서 흘러나올 때처럼 신선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좋은 새로운 것이다. 이신칭의 교리는 종교개혁의 오래된 진리이고 오래된 복음의 교리임에도 불구하고, 살아있는 의미로 받는 자들에게는 전혀 새로운 것이 된다."

이렇게 성령의 인침 속에서 겸비함과 감읍함으로 받는 이신칭의 교리는, 벗겨도 벗겨도 신비한 양파처럼 세상에서 가장 비의한 교리가 됩니다. 그래서 늘 들어도 언제나 새로워, "평생에 듣던 말씀 또 들려주시오(찬송가 236)"라고 고백하게 되고, 평생의 묵상 주제가 됩니다. 그러나 화석화된 공식으로 화한 이신칭의 교리는 음미할 만한 깊이도 신비함도 없는, '1+1=2' 같은 초보 산술이 되어, '유보적 칭의론'같은 고차원적인(?) 교리가 필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신칭의를 폄하하는 이들이여! 스스로에게 자문해 보시라. "내가 이해한 이신칭의에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의 인침이 있는가? 그것을 고백할 때마다 은혜의 감읍함으로 가슴이 뜨거워지는가?"

개혁자들과 모든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이신칭의는 단지 아카데믹한 신학 주제나 화석화된 공식이 아닌, 성령이 인쳐진 감읍함의 교리였습니다. 그들에게 이신칭의는, '은혜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以恩稱義) 는 말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오늘 한국교회에 필요한 것은, 거두절미된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화석화된 이신칭의 개념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으로 인 쳐진 살아있는 온전한 이신칭의 교리를 학습하는 일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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