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500주년 지상 강좌] 종교개혁의 비전과 신학사상의 재발견(6·끝)
끝맺는 말
종교개혁이 남긴 중요한 성취와 업적은 먼저 교회 안에서 성경의 최고 권위를 선포하는 일과 그 실천을 위해서 가장 최우선으로 예배를 회복한 일이었다.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을 모국어로 번역하여 읽을 수 있게 하였고, 교회에서 공적으로 선포된 말씀을 듣는 것에 우선을 두었다. 권세 높은 교황들이나 열광적인 예언자들이나 개인들을 통해서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진다는 것을 거부했다. 칼빈은 종교개혁을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낳은 결과로 해석했다.
"성경은 과연 그것이 진리라는 명확한 증거를 충분하게 드러낸다. 마치 빛을 어둠과 구별하고, 흰색과 검은 색을 구별하며, 단맛과 쓴맛을 확실하게 구별하듯이 드러낸다" 종교개혁자들은 성령의 살아있는 음성이 성경을 통해서 전파되는 것임을 확신했다. 종교개혁자들로 인해서 교회 안에서 말씀이 회복되고, 기도와 찬송이 되살아 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중세말기의 타락한 교회를 정화했을 뿐만 아니라, 세계 인류의 방향을 바꿔놓았다. 잠언 29장 18절에,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다. 종교개혁자들은 이 말씀을 교훈 삼아서 전국가적으로 진리를 따라가는 길을 제시한 것이다. 종교개혁은 교회를 회복시키고, 국가의 질서를 회복하는데 앞장섰다. 루터의 개혁은 독일을 살려냈고, 쯔빙글리와 칼빈은 스위스를 구했으며, 낙스는 영국을 혼란에서 구해냈다. 위그노들은 희생과 인내로 부패한 프랑스 왕권의 횡포에 맞섰다. 종교개혁자들은 중세말기 로마 가톨릭의 무지한 성례주의와 재세례파의 급진주의를 피하고, 교회 중심의 온건한 변혁을 일으켰다.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의 교훈에만 의존하여 성도들을 양육하고자 예배의 중심을 강해설교로 바꾸고, 성도들의 경건한 삶을 교화시켰다.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에서 인류의 첫 조상과 함께 말씀을 통해서 교통하셨다. 타락한 인간들에게 진리의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말씀을 주시고, 선지자들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이끌어 주셨다. 그래서 사람은 단순히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이 있어야만 한다(신 8:4). 종교개혁자들은 성육신하여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사탄의 속임수가 항상 대립적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아담은 에덴 동산에서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갔지만,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세 번이나 말씀으로 사탄을 무찔렀다(마 4:1-11).
성경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이다. 그 성경에 입각해서 선포된 말씀도 역시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루터와 같이, 모든 종교개혁자들은 철저하게 이를 확신했다. 쯔빙글리의 후계자, 불링거가 작성한 「제2 스위스 신앙고백서」에 따르면, "선포된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 설교하는 사역자가 아니라, 선포된 말씀 자체에 대해서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가 비록 악한 죄인일지라도, 그럼에도 하나님의 말씀은 여전히 참되고 선한 것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말씀은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이다. 칼빈은 기독교 신자들의 마음속에 권위 있는 천상의 샘물로 계속해서 들려져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성경은 신자들 가운데서 그들이 하늘로부터 오는 샘물과 같은 것이라고 여길 때에 최고의 권위를 갖는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광을 비춰주는 광선을 발산한다. 기독교 신자들은 성경 안에서 하나님의 최종 계시를 발견하고, 그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하여야 한다(고후 3:18).
성경은 성도들의 손에 들려있는 성령의 검이다(엡 6:17). 성령은 성경을 사용하여 대적자들이 우리 성도들의 삶 속에서 취하고 있는 것들을 제거한다. 성령은 성경을 통해서 성도들의 인격 속에 새로운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씨앗을 심어놓는다. 신약성경의 서신들은 모두 다 교회들을 위해서 보내어진 것들이다. 하나님께로부터 직접적으로 나온 것들이기에 오류가 없고, 잘못된 것이나 거짓이 전혀 없는 메시지이다. 택함을 받은 사도들을 통해서 교회들에게 선포된 것이다.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는 초대 일곱 교회가 지목되었는데, 성령께서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귀 있는 자들은 경청하라고 촉구하였다.
한국교회 목회자들은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의 수준 이상으로 탁월한 실력을 갖춰야만 한다. 목회적 열정과 사역적인 열망을 채워주고자 종교개혁자들은 당대 최고의 성경학자들로서 엄청난 저술을 남겼다. 성도들의 양육을 위해서 성경의 가르침을 압축해서 훌륭한 교리적 저술을 펴내서 영향을 끼쳤다. 루터는 「소요리문답」을 1529년에 라틴어로 출판하여 십계명 강해, 주기도문 해설, 사도신경 해석, 성례, 주요 직분론 등을 성경적으로 받아들일 것을 강조했다. 루터의 저술 총량은 무려 110권에 이른다. 멜랑히톤은 1521년 「신학총론」에서 로마서의 핵심주제들을 제시했다. 쯔빙글리는 「참된 종교와 거짓 종교에 대한 주석」을 1525년에 발표하여 프랑스 국왕 프랑소아 1세에게 헌정했다. 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섭리와 성례를 집중논의 하였다. 스트라스부르에서 마틴 부써는 1523년 택함 받은 자들의 교회론과 주기도문 강해와 하나님의 나라를 다루고 있는 「해설서」를 출판했다. 이들 종교개혁자들의 모든 저술들을 종합하여 칼빈이 1536년에 「기독교 강요」 초판에 담았고, 다섯 번을 추가해서 1559년에 최종 증보판이 나왔다. 「기독교강요」의 저자 칼빈은 성경에만 철저히 복종하고 의존하면서 경건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순수하게 제시했다. 지금도 루터의 칭의론과 기본적인 가르침, 칼빈의 정교한 성경적 강해설교와 성경에 입각한 체계적 교리 해설이 절실히 요청되는 것이다.
성경을 철저하게 연구하고 경청하는 가운데 종교개혁자들은 인간본성에 대해서 뉘우치고 반성하게 되었다. 성경에 입각하여, 인간의 부패한 본성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수반되었다. 루터는 자유의지가 죄의 노예라고 선포한 어거스틴의 가르침을 주저 없이 선포했다. 칼빈은 인간의 영적 무능력을 통렬하게 지적하면서, 우상숭배에 빠져있는 상태를 통렬하게 고발했다. 깨어진 꽃병처럼 조각난 형상을 소유한 인간들은 선한 공로를 스스로 세울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세워서 열매를 맺도록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생명수를 공급하는 일에 앞장섰다.
종교개혁자들이 추구하고 밝히고자 노력했던 바와 같이, 사람은 진정한 본성이 부패하고 타락하여서 전혀 신뢰하거나 믿을 대상이 못된다. 사람의 부패성은 고발해야만 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온전히 교정되어야만 한다. 기독교 교회 안에서 사람의 헛된 야망과 야욕이 담겨진 불순물을 제거하는데 앞장섰던 종교개혁자들처럼, 우리 한국교회 안에서도 세속주의에 물든 허망한 생각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척결해야만 한다(렘 1:10).
수많은 종교개혁자들의 용기 있는 도전과 칼빈의 신학적 성찰이 남긴 5백년의 교훈을 되살려야할 중요한 책임은 현재 기독교 성도들을 지도하는 목회자들과 교회의 리더들에게 달려있다. 지금 한국에서는 정부의 무능력이나 정치권의 패권적 오만함, 경제계의 약육강식, 법조계의 부패 등으로 사회가 혼탁해졌다. 일반 시민들과 비판자들은 권력자들을 향해서 돌을 던지는 것이 일반화 되어있다. 그러나 이런 정치인들에 대한 비난과 비판자의 자세로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먼저 우리 기독교인들이 교회로부터 흘러나오는 영향력을 세상에 내보내서, 혼란에 빠진 사람들의 심령을 정화하고 경건의 능력을 발휘하여야 한다. 물질적인 욕심에 빠져있고, 권세를 향해서 달려가는 사람들에게 제정신을 차릴 수 있도록 참된 행복과 사랑을 깨닫게 해 주고, 제대로 알려 주어야만 한다. 흙탕물은 맑은 물을 흘려보내주어야만 정화될 수 있다. 마음에 빛이 들어와야만 온갖 어두움을 쫒아낼 수 있고, 위로부터 오는 절대 진리가 있어야만, 순간의 결정을 도덕적으로 내릴 수 있는 판단력이 주어지는 것이다.
지금 한국교회에서는 과연 어떤 말씀이 선포되고 있는가? 복음이 무엇인지를 분간하지 못하는 혼탁함이 한국교회를 휩싸고 있다.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부르짖었던 종교개혁자들처럼, 지혜와 거룩함과 의로움과 구원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보배로 삼아야 한다 (고전 1:20).
그러나 과연 이 시대에 순수하게 하나님의 음성만을 선포하는 교회가 얼마나 되는가? 하나님께서는 참된 복음만을 선포하는 교회를 사용하시기를 원하신다. 복음은 사람들의 행복과 번영을 포함하지만, 그것들 보다 근본적으로 성령은 죄에 대해서 꾸짖고 타락함을 회개하라고 외치신다 (요 16:8-9절). 성령을 거스르는 세대에 맞서서 목회자는 하나님의 음성을 선포해야만 한다. 설교는 성도의 회개를 불러일으키는 유일한 생명수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항하여 불순종하는 이들에게, 이토록 방탕해버린 세대를 향하여서 회개를 촉구하고, 부흥을 호소하는 일을 누가 할 수 있을 것인가?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나라와 백성들은 갖가지 우상들을 숭배하게 되고, 외부의 대적자들에게 먹히게 된다 (사 5:5).
사탄은 하나님의 말씀을 싫어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진리의 계시이기 때문이다. 사탄의 전략은 교회 안에서 거짓을 확산시키는 것이다.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가 되어서 세상을 향해서 하나님의 계시를 증거하고 선포하는 기관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거역하는 자들에게는 말씀이 없어서 갈증을 느끼는 심판과 진노가 내려진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하리니" (아모스 8:11-12).
끝으로 종교개혁자들은 설교자의 소명을 다하고자 노력하되, 자신들의 역할과 지위에 대해서 철저하게 겸손한 자세로 임하였다. 종교개혁자들은 설교자의 역할에 대해서 "왕의 대사"에 불과할 뿐이라고 자신의 지위를 확실히 이해하고 있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문제점은 특정교회를 이끌어나가고 있는 설교자가 다른 설교자보다 더 위대하다고 높이려는 풍조가 만연돼 있다는 점이다. 설교자들 사이에서 서로 남보다 자신만을 더 돋보이게 하고자 하는 왜곡된 비교의식이 남보다 더 탁월성을 갖춘 자라고 스스로를 홍보하게 만든다. 설교자가 명예욕에 빠지게 되면 자기를 자랑하는 왜곡된 일들이 벌어진다. 담임목사 지위와 특수한 설교자라는 의식이 남다른 리더십을 갖춘 사람으로 더 돋보이도록 만드는 일에 연루되게 하는 것이다. 소위 유명한 설교자들은 여러 가지 초교파적인 교계 행사에서 중요한 자리에 앉게 된다. 더 나아가서 그 지역에서나 소속된 교단에서나 범기독교적인 단체에서나 명예로운 지위와 직책을 얻으려하고, 국가적인 유명인사로서 대외활동에서 이름을 떨치려 하는 목회자들을 많이 목격하게 된다.
미국 시카고에 있는 트리니티 신학대학원 마네치 교수는 제네바의 목사단이 순회설교를 원칙적으로 지켰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제네바 시의회와 목사단은 주일마다 설교자들이 각 교구 교회를 순회하여 설교하도록 규정했다. 칼빈도 예외가 아니었다. 통상 15명의 제네바 소속 목회자들은 어느 누구도 특정한 교회를 자신의 목회지로 한정하지 않았다.
"설교자는 강단의 소유권자가 아니요, 회중의 우두머리도 아니었다. 말씀을 통해 교회를 지배하는 분은 그리스도였다. 적어도 원칙으로는 기독교 복음의 사역자들은 교체될 수 있었다. 또한 그런 순환 시스템이 다른 교구에 속한 교회들에서 사역하는 동료 사역자들과 함께 일할 때에 협력관계를 고무하고, 서로 설교를 청취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을 것이다."
우리 한국교회에서는 언제부턴가 개척한 목사가 교회를 자기 소유의 기업으로 생각하는 사업가적 발상이 자리를 잡았다. 또한 교세를 크게 성장시켰고, 설교를 아주 잘한다는 "유명 목사" "인기 목사"가 자랑거리로 등장하였다. 성도의 숫자에 따라서 목사의 능력을 평가하는 척도가 되고 있다. 심지어 성경만을 강해하는 설교를 한다고 자랑하는 교회에서조차도 "아무개 목사의 교회"라는 말을 즐겨 사용한다. 이것이야말로 칼빈과 종교개혁자들이 거부했던 일이다. 개인 목사의 우상화라고까지 할 만큼, 인기스타처럼 사람들의 갈채를 받고 등장하는 목회자들이 자신의 이름과 명성을 마케팅하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사람이 화려하게 찬사를 받으려하는 부패한 인간성의 야욕이 무너져야만,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이런 것은 일반 성도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어떤 교회에 소속되었느냐 하는 것은 그 성도의 내적 신앙성숙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어떤 성도가 큰 교회를 섬긴다고 해서 더 작은 교회에 봉사하는 성도보다도 훌륭한 기독교인이다고 말할 수는 없는 법이다. 기독교 신자들은 결코 허망한 엘리트주의에 사로잡혀서는 안된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2:15-17)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