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가톨릭 칭의론, 김세윤과 무엇이 같고 다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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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덕성 칼럼] 김세윤의 로마가톨릭 칭의론 Ⅱ

▲지난 달 칭의론 학술회에서 최덕성 박사가 김세윤 박사의 <칭의와 성화>를 들어 보이고 있다. ⓒBREAD TV 캡처

▲지난 달 칭의론 학술회에서 최덕성 박사가 김세윤 박사의 <칭의와 성화>를 들어 보이고 있다. ⓒBREAD TV 캡처

원제: 트렌트공의회 칭의론과 칼빈의 해독문(解毒文): 김세윤의 칭의론과 관련하여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한국교회는 새 관점 학파 칭의론이 불러일으킨 논쟁으로 말미암아 혼란을 겪고 있다. 새 관점 학파의 칭의론 요점들은 반(反)종교개혁 사상을 담은 트렌트공의회의 칭의교령(Decretum de justificatione, 1547) 핵심 내용과 거의 비슷하다. 칭의의 상실 가능성, 구원의 탈락 가능성, 칭의의 종말론적 유보, 행함 있는 믿음으로의 구원, 칭의와 성화의 동일시, 칭의와 구원의 윤리적 완성이라는 신학 공식에서 대부분 일치한다.

트렌트공의회는 프로테스탄트 신도들이 신앙하는 이신칭의(以信稱義) 교리를 거부하면서, 인간이 의롭게 되는 것은 부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부분적으로 인간 자신의 행위에 달렸다고 한다. "다만 그리스도의 의로움만 힘입어서 인간이 칭의된다고 주장하거나 ... 우리를 의롭다고 하는 은혜는 오직 하나님의 호의일 뿐이라고 주장하다면 그는 파문을 받아야 한다"고 규정한다. '세례성사'를 통해 칭의를 얻고, '고해성사'를 통해 상실한 칭의를 회복할 수 있다고 하여 신도들을 교황 중심의 교계(敎階)와 사제주의에 묶어둔다.

트렌트공의회의가 예봉을 겨냥한 1차 대상은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와 루터파 신자들이 공식화 한 이신칭의 교리이다. 루터는 사람이 성령 역사를 통해 복음을 수직적으로 받아들여 '완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轉嫁)받는다는 이신칭의 교리를 공식화 했다. "바깥으로부터 온 의"를 선물로 받는 자는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첫 번째 의(義)로 구원을 받은 자는 두 번째 의 곧 성화 또는 자신의 선행으로 첫 번째 의에 반응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에 진입한 사람은 성화의 열매를 맺는다. "자신의 의"란 육체를 죽이고 욕망들을 십자가에 못 박는 등의 윤리적 실천을 뜻한다. 트렌트공의회는 칭의와 성화를 동일시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시작된 의가 수평적 차원에서 계속적으로 의화, 곧 칭의를 일으킨다고 보았다. 전자는 오직 믿음만을 칭의의 근거로 삼았고, 후자는 믿음에 소망과 사랑 곧 자선, 선행, 윤리실천 등 착한 행위가 결합되어 칭의로 바뀐다고 이해한다.

종교개혁운동 당시 칭의론은 그 위에서 교회가 서기도 하고 무너지기도 하는 조항이라고 이해되었다. 프로테스탄트 그룹과 로마가톨릭교회를 첨예하게 가르는 대척점이며, 양자를 구분하는 가장 중요하고 선명한 조항이었다. 종교개혁 신학자 존 칼빈은 칭의교리를 기독교의 '핵심 요체(the main hinge)'라고 했다. 칼빈은 '트렌트공의회 칭의교령에 대한 해독문(解毒文, 1547)'을 저술하여 당대 교회의 요구에 적절히 반응했다. 이신칭의 중심의 프로테스탄트 칭의론이 성경적이고 합리적임을 설파했다. 당대 라틴어 신학 문서들에 대한 칼빈의 이해와 반박은 500년의 시간 거리를 두고 있는 우리에게 칭의론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제공한다.

고대교회는 인간의 공로가 구원과 칭의에 어떤 역할을 한다는 주장을 거부했다. 세월이 지나면서 점차 칭의의 일부는 하나님께, 다른 일부는 사람에게 그 공로가 있다고 하는 중도적 교리가 고안됐다. 펠라기우스주의와 어거스틴주의의 결합은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협력이 구원 또는 칭의를 완성시킨다는 신학 공식으로 등장했다. 트렌트공의회 칭의론은 로마가톨릭교회의 <가톨릭교리서(1997)>에 고스란히 수용돼 현재도 변함없는 중심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오로지 하나님의 자비와 거저 주시는(gratuitam) 사랑이 칭의의 유효한 원인(efficientem causam)인가, 아니면 인간의 선행이 칭의의 원인인가? 이 주제는 '믿음' 또는 '선행'이라는 단순한 구도를 넘는 신학 주제이다. 우리는 유럽을 요동치게 한 신학논쟁에 뛰어들어 양편의 주장들을 경청하려 한다. 트렌트공의회 칭의교령의 핵심을 간추리고 칼빈의 반박 요점을 파악하여 논점을 명확하게 파악하려는 우리의 관심은, 종교개혁운동 시대의 칭의론 논쟁점들이 현대 칭의론 논쟁 이해에 중요한 힌트를 제공한다. 근년 칭의론 신학자들의 주장이 아래에서 다루는 트렌트공의회 칭의론의 요점과 일치한다는 데 주목한다.

1. 칭의는 하나님과 인간의 협력 결과인가?

1.1. 트렌트공의회 칭의교령은 제1장에서 인간이 의롭게 되는 것이 부분적으로 인간 자신의 행위에 달렸다는 것을 말하려고, 자연인에게 선을 행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비록 손상되고 왜곡되었지만 소멸되지 않았다고 한다. "아담의 범죄를 통하여 무죄함을 잃어버린 다음에 부정해졌지만, 자유의지가 없어진 것은 결코 아니고 다만 그 힘이 기울어지고 약해졌을 뿐이다." 죽지 않았다는 것은 생명이 붙어 있다는 뜻이다. 인간의 자유의지가 소멸되지 않았다는 것은 그 의지가 선을 선택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원죄의 결과 의지에 결점(vitium)이 생겼고 나약해졌지만,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1.2. 칭의교령 제5장은 인간의 자유의지가 비록 약화되었지만, 구원을 받고 의롭다고 칭함을 받는 일에 대해 하나님의 은혜와 협력할 수 있다고 한다. 하나님의 은혜가 본질적이고 우선적이지만, 구원의 진행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는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다고 한다. "죄를 지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던 인간들이 그들을 격려하고 돕는 하나님의 은혜에 힘입어 마음을 열고, 그 은혜에 자유의지로 동의하고 협조하면서 자신의 고유한 칭의를 위해 삶을 전환하는 태세를 갖추는 것이다."

1.3. 칭의교령은 인간이 칭의 은혜를 얻으려면 의지를 움직이고 준비시키라고 하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함으로써 하나님께 협조해야 한다고 선언한다. "인간의 의지는 마치 생명 없는 사물처럼 아무 것도 행할 수 없고 완전히 수동적인 역할을 할 뿐이라고 주장한다면, 그는 파문을 받아야 한다." "만일 누가 죄인이 칭의 은혜를 얻기 위해서는 본인의 협조만 필요할 뿐 그가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뭔가를 준비하거나 자신을 준비시킬 필요가 전혀 없다는 의미에서 죄인은 오로지 믿음만으로 의롭다고 칭함을 얻는다고 주장한다면, 그는 파문을 받아야 한다"고 저주(anathema)한다.

1.4. 칼빈은 인간의 타락과 의지의 손상을 인정하고 새로워질 때까지는 망가진 상태라고 말한다. 바울은 선조의 타락으로 인간의 자유의지가 나약하게 됐다고 말하지 않는다. 모든 인간이 죄의 폭정에 노예가 되어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쓸모없게 되었다(롬 3:9-12)고 한다. 그 결과 인간은 선한 생각을 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후 3:5).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남아 있지만, 그것은 악을 행하는 쪽으로 열려 있는 의지뿐이다. 아담의 타락은 인간의 의지를 제거한 것이 아니라 자유로웠던 상태의 의지를 죄의 노예로 만들었다. 그래서 의지는 죄를 지으며, 죄에 예속되어 있다.

2. '세례성사'는 칭의의 수단인가?

2.1. 트렌트공의회는 제4장과 7장에서 물세례를 칭의의 도구인(道具因)이라고 선언한다. 물세례를 받지 않고서는 인간의 신분이 은혜의 상태로 전환되지 않는다고 한다. "세례성사, 이것이 없이는 어느 누구도 의롭다 칭함을 받을 수 없다." 로마가톨릭교회가 베푸는 '세례성사'를 거치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2.2. 칼빈은 물세례를 칭의의 수단으로 보는 관점과 관련하여, 차라리 은혜가 그리스도의 말씀과 성례에 의해 우리에게 전달되거나 적용된다고 말함이 더 낫지 않은가 반문한다. 먼저 이 주장이 유아의 구원과 상충된다고 지적한다. 세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다면, 세례를 받지 못하고 죽은 유아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칭의교령은 유아를 구원에서 배제하는 모순에 직면한다. 거룩하게 태어난 기독인의 자녀들(고전 7:14)이 약속의 후사가 아니라면, 교회가 무슨 이유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푸는가? 유아들이 구원을 받지 못하는데도 세례를 베푼다면, 교회가 성례를 더럽히는 것이 틀림없다. 하나님이 유아들을 그리스도의 왕국의 자녀로 삼는다면, 트렌트공의회는 엄청난 불의를 행하는 셈이다.

2.3. 칼빈은 트렌트공의회가 물세례가 칭의의 수단이라고 하면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 3:5)"고 하지만, 물과 성령이라는 표현의 '물'이 세례라는 것을 증명할 길이 없다고 한다. 물은 성령의 본질과 능력을 설명하려고 사용된 부가형용사(epithetum)이다. 성령과 불(마 3:11)라는 말의 '불'이 성례를 의미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2.4. 칼빈은 물세례로 의롭다 함을 받게 된다면 복음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하고 반문한다. 세례가 믿음의 성례임을 부정할 수 없지만, 그것은 복음에 대한 신앙의 부가물이다. 복음보다 '세례성사'를 우선시하는 것은 흙손의 손잡이를 건물의 도구인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복음과 세례의 우선순위를 바꾸는 자들은 세례가 무엇인지, 그 효력이 무엇인지, 그 임무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증거라고 한다.

3. 칭의를 위한 인간의 준비가 필요한가?

3.1. 하나님의 은혜에 동의하는 일은 경건한 의지의 복종이다. 하나님 자신의 고유한 역할이다. 그러나 트렌트공의회는 그 공(功)을 인간에게로 돌린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역할을 분담하는 오류를 범한다. 칭의교령은 성인의 경우, 인간의 자유의지로 칭의를 위한 준비를 해야 한다고 한다. 인간이 자유의지를 따라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고, 하나님이 계시하고 약속된 바를 진리로 믿어야 한다고 한다. 악을 저지른 자는 자유의지로 자신을 죄인으로 인정함으로써 건전한 동요를 일으키고 돌아서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이 자유의지로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조명을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거부하기도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인간을 하나님의 협력자로 만들어 하나님의 은혜에 결합시킨다.

3.2. 칼빈은 어거스틴을 언급하면서, 인간이 자기의 의지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지 않은 것 곧 우리에게 있는 선한 어떤 것을 발견하려는 노력은 허사라고 한다. 설령 사람에게 그 자신의 자유의지가 남아 있어, 자신이 원할(vellet) 경우 하나님의 도움에 머물 수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로 하여금 선을 행하는 의지를 갖게 하지 않는다. 그의 의지는 수많은 유혹 가운데에서 나약함에 굴복한다. 인간 의지의 나약함을 극복하는데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다. 이 도움은 "하나님의 은혜에 저항할 수 없고, 분리될 수 없게 활동하도록 하기 위함이며, 이 은혜가 아무리 약해 보여도 부족하지 않기 위함이다."

3.3.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중보자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악한 자들을 중생시킨다. 첫 사람 아담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버리고자 하면 버릴 수 있고, 머물고자 하면 머물 수 있었다. 그 의지는 타락으로 말미암아 선을 행할 수 있는 기능을 상실했다. 그러나 두 번째 아담의 은혜는 우리에게 의지를 만들어 줄 정도로 강력하다. 새 의지는 성령을 따라 육체의 의지를 대항하고 극복하는 강렬한 의지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이 의지를 통하여 선을 수용하고 계속 보존할 수 있다. 중생한 기독인 안에는 자신이 뜻하는 것을 할 수 있는 능력뿐 아니라,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뜻하는 능력이 있다.

3.4. 트렌트공의회는 우리가 하나님의 부름에 동의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의지의 자유로운 움직임에 의한 것이고, 은혜의 수용은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칼빈은 의지가 선하게 지음을 받은 것과 의지가 그것이 원할 때 복종하도록 하나님에 의해 움직여지는 것은 별개의 사안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마음을 잘 먹도록 행하시겠다고 약속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마음을 잘 먹게 만들겠다고 약속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잘 걷도록 마음먹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잘 걸어 다니게 하신다(빌 2:13 참고). 하나님은 우리의 선한 의지의 조성자이다.

3.5. 칼빈은 트렌트공의회 교부들이 성령의 새롭게 하는 효력 있는 활동(렘 32:40)이 인간의 마음을 부패에서 정직으로 새롭게 만드는 일임을 간과한다고 지적하다. 그들의 오류는 우리의 비참함을 도우려고 오는 중생의 은혜와 아담에게 주어진 최초의 은혜를 구분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에 동의하는 것은 경건한 의지의 복종이며, 이는 하나님 자신의 고유한 역할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우리들 사이의 역할을 분담하여, 그것을 우리 자신들의 임무로 돌리는 것이라고 한다.

3.6. 트렌트공의회는 아담에게 주어진 최초의 은혜와 하나님이 주시는 중생의 은혜를 구분하지 않는다.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의 계시에 동의하지 않는 한 그 계시(inspiratio)는 효과가 없고 완전하지 않다고 한다. 하나님의 계시를 듣는 일은 인간의 선택, 결정 사항이라고 한다. 칼빈은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나온다(요 6:45)"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칭의교령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명백히 상충된다고 한다. 누구도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서 하나님께 듣고 배울 수 없다. 성령의 활동은 너무 강력하며 효력 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 안에 있는 자에게 언제나 믿음을 낳는다고 한다.

3.7. 칭의교령은 인간이 성령의 역사를 거부할 수 있다고 선언한다. 성령의 비추고 변화시키고 중생시키는 역사를 인간이 거부할 수 있는가? 칼빈에 따르면, 인간 본래의 의지는 수많은 유혹과 나약함에 굴복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에 저항할 수 없다. 하나님은 생명 없는 돌 같은 인간의 마음을 새롭게 만들어 새로운 의지를 갖게 한다. 성경은 "오 주님 나를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리다(렘 31:18)"라고 한다. 칭의교령은 이 구도를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그러면 내가 너희에게 돌아가리라"는 식으로 바꾼다. 우리의 의지가 원할 때 복종하도록 하나님에 의해 움직여지는 것과, 의지가 선하게 지음 받은 상태라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3.8. 선지자들은 우리에게 회심을 요구하면서 자유의지에 호소한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유로운 능력을 우리에게 선물했다. 인간이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역량을 넘어선다. 인간 안에 있는 의지와 선악에 대한 자유로운 선택은 별개 사안이다. 선택의 자유가 첫 사람의 타락 후 사라졌으며, 인간에게는 의지만이 남았다. 이 의지는 죄의 폭정에 완전히 사로잡혀 다만 악에 기울어질 뿐이다.

3.9. 칼빈은 어거스틴을 인용하면서,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자기 자신의 동의로 따르고 복종할 만큼 자발적으로 지배된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인간의 의지는 악에서 선으로 돌아선다. 우리가 의지를 갖지만,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의지를 갖도록 역사한다. 우리가 행하지만, 하나님이 우리로 행하게 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의지를 갖도록 역사하지 않는 한, 우리 자신의 의지로 원하는 선을 행할 수 없다. 우리가 뜻을 품을 때 의지를 갖지만, 그가 우리로 뜻을 품게 한다. 우리가 행동하려 할 때, 하나님이 의지에 가장 유효한 능력을 제공하여 우리로 하여금 행하게 한다. 중생한 기독인의 의지는 노예의지가 아니다.

▲지난 달 이신칭의 관련 포럼에서 김세윤 교수가 강연하고 있다. ⓒ크리스천투데이 DB

▲지난 달 이신칭의 관련 포럼에서 김세윤 교수가 강연하고 있다. ⓒ크리스천투데이 DB

4. 칭의는 성화를 포함하는가?

4.1. 트렌트공의회 칭의교령은 제7장에서 이신칭의를 거부하고, 칭의에 성화를 포함시킨다. 칭의와 성화를 동일시한다. "칭의는 단순한 죄의 사함뿐 아니라, 은혜와 그에 동반하는 선물을 기꺼이 받아들임으로써 인간 내면이 성화되고 쇄신되는 것을 의미한다." 칭의를 하나님의 단번의 선언적 사죄로 보지 않고, 성화와 쇄신을 포함하는 지속적인 일련의 과정으로 본다.

4.2. 하나님 보시기에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참 기독인은 의로운 존재이다.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에 의해 속죄함을 받았고, 중보자의 의가 기독인에게 전가되었기 때문이다. 기독인은 더 이상 죄책에 묶여 있지 않다. 의롭다 칭함을 받음은 하나님의 주권적 사면의 결과이다. 칭의는 값없이 주어지는 믿음의 선물이다. 칭의는 우리가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에 믿음으로 주어진다.

4.3. 칼빈에 따르면 칭의는 하나님의 죄 사함, 절대적인 사면(absolutio),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의가 기독인에게 전가된 결과이다. 칭의와 구원은 다만 믿음으로 주어진다. 하나님이 택한 자들을 고발할 자가 없다. 의롭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순종함으로써 의롭게 되거나 의롭다고 칭함을 받는가? 그렇지 않다. 믿음과 함께 중보자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순종하고 성화의 영역에 진입한다.

4.4. 칼빈은 칭의와 성화가 구별되지만 결합돼 있다고 한다. 칭의와 성화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그러나 칭의에 성화라는 행위가 개입되면, 율법에 완전히 복종함으로 우리가 의롭게 된다는 주장을 부정할 수 없게 된다. 구원이 완전 무죄 상태를 의미한다거나, 믿음이 행위로 지탱된다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자는 없다. 칭의교령은 "삶의 처지에 따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한 이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법을 충만하게 만족시키고, 때가 오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자격을 갖추는데 그들에게 더 이상 부족함이 없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고 하지만, 전체적으로든 부분적으로든, 성화, 쇄신이 의로 인정된다고 말하는 성경구절이 없다.

4.5. 칭의교령은 제7장에서 다섯 가지 칭의의 원인들(causa)을 열거하면서도, 칭의의 진짜 원인을 제시하는 일을 잊어버린 채 인간의 행위를 칭의 일부분으로 간주하는 말로 결론짓는다. 우리가 부분적으로 죄 사함에 의해 부분적으로 영적 중생에 의해 의롭게 되는 듯 서술한다. 우리의 의가 부분적으로는 전가(imputatio)로, 부분적으로는 자격(qualitas)으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말한다.

4.6. 우리는 하나님의 목전에서 어떻게 의롭게 여겨지는가? 우리에게 의를 얻게 해 주는 믿음의 근원을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칭의교령은 "우리가 의인이라고 여겨질 뿐만 아니라 의롭게 살도록 불리는데, 과연 우리는 의로운 자"라고 선언한다. 우리가 의인인가? 그렇다. 그러나 우리는 죄인이기도 하다. 우리가 어떻게 의인이 되었는가? 하나님이 우리에 관대함을 베푸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죽음 때문이며, 그의 목적에서 우리를 의롭다고 여기는 까닭은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우리의 죄가 사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화목 제물을 갖고 있다(롬 3:25; 5:11)". 우리의 칭의는 하나이고 단순하며 하나님의 값 없는 영접의 결과이다. 칼빈은 복음을 강조하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칭의가 바깥에서 우리 안으로 찾아온 전가된 선물이라고 말한다.

4.7. 우리는 오직 값 없는 하나님의 영접에 의해서만 의롭게 된다.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이들이 의인이 되었다(롬 5:19). 우리 안에 없는 의가 외부에서 찾아온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아들 안에서 입양된 자녀들이다(엡 1-4장). 입양된 자녀는 입양 순간부터 완전한 자녀의 신분을 가진다. 칼빈은 하나님의 의의 일부분이라도 그것이 우리 안에 있는 자질이나 습관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한다. 율법의 의는 행위로 이루어진다. 믿음의 의는 은혜로 주어진다. 그러므로 바울은 율법과 믿음을 일치하지 않는다(갈 3장). 칭의를 행위 곧 성화와 관련시키면, 우리의 구원이 위태롭게 된다. 사람은 다만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5. 행함 있는 믿음으로 의롭다고 칭함을 받는가?

5.1. 칭의에 성화를 포함시키거나 동일시하는 트렌트공의회의 칭의론은 행함 있는 믿음으로 칭함을 받는다는 공식으로 발전한다. 칭의교령은 이를 "오직 '사랑으로 표현되는' 믿음(quae per charitatem operatur)"이라고 일컫는다. 사람이 소망과 사랑이 수반된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사랑(charity), 곧 자선, 선행, 윤리실천 등은 칭의에 포함된다. 칭의교령은 믿음이 선행과 협력함에 따라 인간은 성숙할 뿐 아니라 더욱 의롭게 된다. 소망과 사랑이 믿음에 덧붙여지지 않는 한, 사람은 믿음만으로 그리스도와 하나 되지 않는다. 일정한 성화 곧 칭의의 완성 과정을 거쳐 최종 단계의 칭의에 이른다.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지 않으면서, 성화와 선행이 칭의와 구원에 한 몫을 담당한다고 본다.

5.2. 믿음과 행함을 결합시켜 칭의에 적용하는 트렌트공의회 칭의론의 핵심은 우리 안에 주입된 의, 내재적 의 사상이다. 의를 하나님의 단번의 선언적 선물이며 그리스도로부터 전가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우리 안에 주입되어 내재돼 있는 능력으로 이해한다. 죄인이 성령의 자유로운 관대함과 자신의 기질과 협력으로 의롭다고 인정될 뿐 아니라, 실제로 의로운 존재라고 한다. 동시에 선행으로 의롭게 되어간다고 한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의가 우리의 의로 불리는 것은, 그것이 우리 안에 주입되고 내재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로워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수난의 공로를 통해 인간에게 '하사'된다. 인간을 의롭게 만드는 은혜가 주입된다. 다시 말하면 칭의는 '의롭다'고 선언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의롭게 만드는' 주입되고 내재하는 능력의 결과이다.

5.3. 트렌트공의회는 신자들에게 선행을 권하며, 약속된 상급으로 선행을 자극하고 촉구한다.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지 않으면서, 칭의 과정에 수반되는 선행과 사랑(operis verstri et dilectionis)을 강조한다. 선행과 공로에는 상급이 따른다. 상급 가운데 가장 큰 선물은 영원한 생명이다. 다시 말해 영원한 생명은 믿음만의 결과가 아니다. 칭의된 자들에게 지속적으로 주입되는 하나님의 능력이 선행으로 이끌고, 각자의 행실대로 영생의 상급으로 갚아주신다고 한다. 칭의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자는 대죄를 범하지 않으며, 칭의를 유지하는 상태에서 죽는 자가 영생을 얻는 자격을 가지게 된다고 한다.

5.4. 트렌트공의회는 기독인이 칭의받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희망과 사랑이 결여된 믿음, 곧 행함 없는 신앙으로는 인간이 그리스도와 완전한 일치를 이루지 못한다고 본다. 행함 있는 믿음이 아니고서는 의롭다고 칭함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를 의롭게 만드는 주입되고 내재하는 요인으로 말미암아 실로 우리 마음과 생각이 새로워지고, 우리가 의인이라고 여겨질 뿐 아니라 의롭게 살게 되며, 그러므로 우리는 실제로 의로운 자라고 한다.

5.5. 칼빈은 기독인이 의롭다고 간주되는 존재이지, 실제 행위에서 의로운 자가 아니라고 한다. 우리는 오직 값 없는 하나님의 영접에 의해 의롭다 칭함을 받는다. 우리를 중생시키는 의는 바깥에서 우리에게 주어졌다. 이 의는 하나님이 제공한 것이다. 구원과 칭의가 우리에게 준 하나님의 선물이지, 희망과 사랑 등 인간적인 요소의 결과물이 아니다. "설령 우리에게 눈이 주어질 때 귀와 발과 손이 동시에 주어진다 해서, 우리가 우리의 발로 듣거나 우리의 손으로 걷거나, 우리의 눈으로 조작한다고 말할 수 없다."

5.6. 전가(imputatio)와 주입(infusio)은 양립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칭의, 곧 '의(義)'가 인간의 선행 또는 공로와 섞이면 '칭(稱)'은 실체의 변형이나 자질의 고양을 거쳐 극단적 신화(神化)로 그릇되게 변질할 수 있다.

5.7. 칼빈은 의롭다 칭함 받는 즉시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고, 그 때 우리에게 쇄신과 성화가 뒤따른다고 한다. 칼빈은 성화를 강조한다. 그리스도는 의인을 거룩하게 한다. 칭의교리는 선행을 배제하지 않는다. 칭의교리는 선행에 대한 열심을 억누르지 않는다. 칭의된 기독인은 거룩한 존재이며, 거룩을 향해 나아간다. 칭의와 성화는 결합돼 있다. 칭의와 성화는 구별된다. 이것들이 하나이며 동일하다는 트렌트공의회의 추론은 잘못이다. 태양 빛과 태양 열이 구별되며, 빛을 열이라고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5.8. 칼빈은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믿음으로 전환된다고 한다. 믿음이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축복을 받을 수 있게 한다. "그리스도는 믿음으로 우리의 마음에 계신다(엡 3:17)". 바울의 이 교훈이 참이라면, 그리스도의 영으로부터 그리스도를 분리할 수 없듯 사랑으로부터 믿음을 분리할 수 없다. 우리의 마음은 믿음으로 깨끗해진다(행 15:9). 만약 믿는 자가 누구든지 영생을 얻는다면(요 3:16, 5:24, 6:40, 20:31), 그리고 영생의 기업이 믿음으로 얻어진다면(롬 4:14), 우리는 다만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살아 있는 지체가 된다.

사람은 마음으로 믿어 의롭게 된다(롬 10:5-11). 믿을 때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값없이 전가된다. 누가 하나님의 선택한 자들, 의롭다고 칭함을 받는 자들을 고발할 것인가? 의롭게 한 이는 하나님이다(롬 8:33). 정상적 사고를 하는 사람이라면 이 엄중한 법정적 선언과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와 하나님의 값없는 영접 외에, 믿음으로 얻어지는 칭의를 어찌 부정할 수 있는가?

5.9. 트렌트공의회는 '사랑으로 표현되는 믿음(갈 5:6)'을 강조한다. 그것만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옳다"고 선언한다. 과연 이 성경 본문이 칭의를 말하는가? 그렇지 않다. 만약 사랑이 믿음의 열매 또는 결과라면 공의회가 말하는 믿음은 허구이다. 이 성경 구절은 인간을 의롭게 하는 데 믿음과 사랑이 얼마나 유효한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성숙이 무엇인가에 관하여 말한다. 의인은 '행함 있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 않는다. 의인은 값없이 주시는 '믿음만으로' 구원을 받는다.

6. 칭의는 윤리 실천으로 완성되는가?

6.1. 트렌트공의회는 칭의를 단번에 완성된 선언적인 것이 아니라면서, 계명을 지키면 심판대에서 구원과 칭의가 결정된다고 본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 칭의가 우리의 윤리실천으로 보존되고 완성됨을 전제로 예비신자들에게 "네가 생명으로 들어가려면, 계명을 지키라(마 19:17)"고 가르친다. "무상으로 주어진 의로움을 잘 보존하라. ... 그리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대에 설 때까지 그 의를 간직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도록 말이다" 라고 한다. 칭의가 인간이 "각자의 기질-태도-처지(dispositionem)와 고유한 협력(cooerationem)"과 더불어 "하나님의 사랑이 확산되고 그들 안에 자리 잡을 때 실현된다"고 한다. "사랑으로 표현된 믿음"은 칭의 그 자체와 그것의 완성을 향한 출구이다.

6.2. 진정으로 칭의가 윤리적 실천으로 완성되는가? 바울은 자연인의 마음이 돌과 같다고 한다. 만물이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 그의 선하시고 기쁘신 뜻대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셨다(엡 1:3-5)". 율법이 연약한 육신을 통해 행할 수 없었던 것을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죽음의 희생을 통해 단번에 해결했다. 그 방법은 속죄(贖罪)이다.

우리는 본래 율법의 지배와 저주 아래에 있다(갈 3:10).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대속사역을 통해 단번에 우리가 의롭다고 칭하고, 구원의 반열에 들게 하고, 영생을 선물했다. 하나님이 선물로 준 믿음은 은혜 역사의 시작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선물이다. 행위에서 난 것 아니다(엡 2:9).

6.3. 바울은 칭의가 믿음으로 시작되고 행위를 거쳐 완성되는 것으로 말하지 않는다. 칼빈은 바울의 말에 대해 시작과 끝이 동일함을 강조한다. 믿음에서 시작하여 윤리적 완성으로 나아가거나, 믿음이 시작한 것을 자비와 자선 등의 사랑의 행위로 완성된다고 하지 않는다. 누가는 하나님의 효력 있는 부름에 대해 언급하면서, 스스로 준비하는 자가 믿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영생 주시기로 예정한 자들이 믿는다고 말한다(행 13:48). 우리의 선행은 하나님에 의해 준비된 것이다(엡 2:10).

6.4. 칼빈은 "인간의 의지가 자유로 말미암아 은혜를 얻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말미암아 자유를 얻으며, 이는 그것(의지)이 유쾌한 영속성과 불굴의 용맹을 지속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이것은 어거스틴이 한 말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칭한 것은, 그가 성결과 모든 미덕의 표본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윤리적 완성으로 의로운 자로 여겨진 것이 아니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칭의를 얻었고, 믿음으로 믿음의 자리에 나아오게 되었다(롬 5:1-2).

6.5. 바울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에게, 삶의 마지막까지 자랑할 수 있는 것이 없음을 상기시킨다. 육체의 자랑은 믿음의 법에 의해 축출된다(롬 3:27; 4:2). 행위와 무관하게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고, 이 의는 영속적인 것이다(롬 4:6). 칼빈은 이 점들을 언급하면서 칭의가 믿음으로 시작되고 의로운 행위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칭의를 받는 자가 그 칭의의 완성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함은 농담이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심판대에 설 때까지 유일한 의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주어진 그 의를 붙잡는다"고 말한다.

/최덕성 박사

<한국교회 친일파 전통(2000)>, <신학충돌(2012)> 등 약 20권의 신학관련 학술서를 저술했다. 고신대학교, 노스캐롤라이나대학교, 리폼드신학교, 예일대학교, 에모리대학교(Ph.D.)에서 수학했다. 노스캐롤라이나 주 훼이트빌장로교회의 담임목사로 봉사했고, 고신대 고려신학대학원 교수(1989-2009)로, 현재는 브니엘신학교 총장으로 섬기고 있다. 교의학과 역사신학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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