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겐의 가정과 신앙
오리겐(본명 Origenes Admantius, 185년 경-254년 경)은 기독교 초기 기독교인들이 많이 살던 알렉산드리아에서 유복한 그리스도인 부모 밑에서 일곱 남매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는 알렉산드리아의 보편적 기독교 지식인 가정의 경우처럼 아버지에게서 헬레니즘 교육과 성경을 배웠다. 당시 헬레니즘 교육은 오늘날 중등교육에 해당하는 철학 공부의 준비 단계로 백과사전식으로 여러 가지 주제에 대하여 배우는 전반적인 교육 과정이었다.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Eusebius of Caesarea, 265경-339경)에 의하면 이오니아(Ionia)어로 레오니데스(Leonides)로 알려진 그의 아버지는 세베루스의 치하 박해(Severan Persecution, 202년)시 순교하였다. 17세의 젊은 나이에 오리겐이 클레멘트의 뒤를 이어 알렉산드리아에서 신도들을 가르치는 교리문답학교(catechitical school)의 교장이 된 것은 이 같은 아버지의 조기 교육과 더불어 가족의 생계 부양을 위한 이유도 있었다. 오리겐의 어머니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그녀는 맏아들이 아버지를 따라 순교하려고 결심하자 놀란 나머지 아들이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오리겐의 옷을 숨겼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심지어 그는 마태복음 19장 12절을 문자적으로 순복하여 스스로 거세의 결단을 내린 인물로 알려져 있다. 소년 시절 오리겐의 신앙이 어떠했는지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순교에의 권면』(Exhortation to Martyrdom)에서 오리겐은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과 부끄러움을 참으시고 하나님 우편(히 12:2; 8:1)에 앉으셨음을 강조하고 성도는 하나님의 아들을 부인하거나 그와 그의 종들과 그의 말씀을 부끄러워해서는 안 된다며 신앙의 지조를 강조하고 있다.
오리겐의 저작들
오리겐 당시 알렉산드리아에는 세계 최고 수준의 도서관이 있었고 학문의 자유를 바탕으로 알렉산드리아에서 태동한 신플라톤학파뿐 아니라 철학의 거의 모든 학파가 활동하고 있었다. 오리겐이 기독교 신학의 여명기에 기독교와 헬라 철학을 종합한 인물이 된 것은 이와 같은 환경적 배경이 있었다. 수사학자였던 아버지와 클레멘트로부터 가르침을 받았고, 신플라톤학파의 창시자 암모니우스 사카스 문하에서 철학과 문학을 배웠다. 이런 배경 속에서 기독학자가 된 그는 다작의 저술가로 알려져 있는데 성경텍스트, 주석, 설교, 경건생활, 변증에 관한 다양한 책을 썼다. 이 가운데 중요한 저작은 교의적 주제를 주로 다룬 『원리론』(De Principiis, 원리에 관하여)과 철학자 켈수스의 『The true doctrine』을 반박한 변증서인 『켈수스 반박』(Contra Celsum), 성경 해석의 근간을 제공한 『6개 국어 대역 성경』(Hexapla) 이 있고 강해서는 279편이 남아있다.
오리겐이 방대한 저서들을 쓸 수 있었던 배경에는 부유한 그의 제자 암브로시우스의 개종과 관련이 있다. 영지주의 발렌티누스파 이단을 추종하던 암브로시우스는 오리겐의 제자가 되면서 정통 신앙으로 돌아왔다. 그는 자신의 재산을 오리겐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하였다. 비교적 늦은 시기인 215년에서 220년 사이 오리겐은 방대한 저서들을 쓰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그의 많은 저술이 남아있지 않은 것은 그가 사후 300년이 지난 후 교회회의에서 정죄되고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그의 저서를 몰수하고 발행을 금지했기 때문이다(주후 543년). 이후 우리는 유세비우스의 책을 통해 그가 방대한 저작물의 저자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의 저작은 헬라어 원본이 아니라 대부분 라틴어 역본으로 남아있다.
오리겐의 시련
그가 당대 신학 논쟁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은 대체로 팔레스틴에 선교 여행(215년경)을 하면서 시작이 되었다. 오리겐은 가이사랴와 예루살렘 주교들로부터 설교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는데 데메트리우스(Demetrius) 주교는 이에 대해 강한 시기심을 가지게 된다. 표면적 이유는 어린 시절 오리겐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의 나라(마 19:12)를 위해 자신을 거세한 결과, 사제로 정식 위임을 받을 수 없는 신분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230년 경 팔레스틴 방문 시에 오리겐은 드디어 장로가 되어 자유롭게 설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결국 데메트리우스의 분노를 사게 된다. 데키우스의 박해 동안 많은 박해에 시달리던 오리겐은 황제가 죽으면서 석방 되었다. 유세비우스는 그가 박해 가운데서도 결코 배교하지 않고 견디었다고 전하며 갈루스와 그의 아들 볼루시아누스 황제 때까지 살다가 69세 때 두로에 묻혔다고 기록하고 있다.
초대교회 기독신학자들
사실 오리겐 이전 본격적인 기독신학자는 없었다. 변증가요 순교자였던 저스틴 마터나 논쟁적인 이레네우스가 있었고 오리겐의 스승이었던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가 있었다. 동시대 사람으로는 이레네우스의 제자였던 로마의 히폴투스(Hippolitos)가 있을 뿐이다. 오리겐은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서 기독교적으로 양육 받은 최초의 문필가였다. 그러기 때문에 오리겐이 어떻게 신학을 전개하였는가는 기독교가 초대 교회 당시 어떻게 신학을 형성해 갔는가를 살펴볼 수 있는 최초의 인물이 아닐 수 없다. 오리겐은 고대 교회 최초로 기독교 가르침에 대한 포괄적이며 체계적이고 신학적인 구상을 제시하고 있다. 기독교 초기 신학형성기에 나타난 오리겐의 교의학적 시도는 많은 공과(功過)를 남기고 있다.
논란 많은 오리겐의 공과-최초 기독교 교리신학자이자 이단 정죄
오리겐은 본문 주해와 주석을 쓴 최초 기독교 성경학자요 교의학의 최초 작품을 쓴 학자요 『켈수스 반박』을 통해 초기 기독교 변증을 이끌었고 창조 신앙에 있어서도 성경적 교리를 구축하려고 노력한 학자인 것은 분명하다. 또한 그는 초기 기독교 학자로서 기독교를 강력하게 위협하던 영지주의 사상을 부인하는데 앞장서고 교회가 성부수난설(聖父受難說, pastripassianism), 양태론(樣態論), 아리우스주의와 같은 이단적 사상에 빠지지 않도록 신학적 통로를 제공한 공헌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254년 경 순교한 이후 약 300년 후인 제 5차 종교회의(553,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되고 만다. 그리고 그의 작품들은 몰수되어 버렸다. 팔레스틴에 가서 설교하던 젊은 시절부터 거세한 자가 평신도로서 감독들 앞에서 강해하고 설교한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데메트리우스 감독에 의해 일찌감치 정치적 탄핵 대상이 된 이후 그의 저작들은 수난을 겪어오다가 공의회(553년) 이후 오리겐의 모든 저작들은 본격적 수난을 당하게 된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의 작품들이 몰수되었기에 오늘날 그가 썼다고 알려진 책들이 정말 그가 쓴 원본과 다름이 없는 지도 불분명하다. 사람들은 오리겐의 작품이 분명한지 아니면 후세 인물들이 얼마나 가감했는지 검증 없이 그를 정죄한 편견을 가지고 그를 다루고 있다. 그가 만일 순교 당하지 않고 신학적 연구에 매진하였다면 어떤 학문적 발전과 수정을 이루었을까? 우리는 알 수가 없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실천적 믿음과 열렬한 헌신을 지닌 학자였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믿음을 기독교 최초로 정통적 기독교교리로 구축하여 승화하고자 애를 쓴 기독 초기 드문 학자 가운데 한사람이기도 했다. 그러나 또한 그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 신학 체계에 관한한 플라톤주의 안에서 태생적으로 벗어날 수 없었던, 신플라톤주의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한계를 가진 학자이기도 했다. 그것이 아쉽다.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조직신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