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욱의 ‘연애는 다큐다’ 17] 그녀를 믿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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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유리같은 것...'. 이런 제목의 유행가가 있었다. 아름답게 빛나지만 깨어지기 쉬운 것이 사랑이라는 내용인데, 깨어진 사랑을 해본 사람이라면 그 말을 바로 이해할 것이다.
수십 년 함께 산 부부도 돌아서면 남보다 더 증오스러운 적이 되고, 어제까지 다정하던 연인도 원수나 스토커가 될 수 있다. 그런 극단적인 예가 아니라도, 사랑은 아무리 견고해 보이는 것이라도 유리보다 애처롭고 가냘프다.
사랑은 마치 지구의 대기를 보호하는 푸른 기체 오존층과도 같다. 오늘날 3mm 정도에 불과한 이 기체는 우주의 해로운 물질을 막아 생물의 노화를 늦추고 지구를 보호한다. 이것이 뚫리면 많은 문제가 생긴다. 남반구에 오존층이 뚫리자 호주 등지에서 피부암과 녹내장 환자가 크게 증가했다.
다행히 온 지구촌의 기후협약과 탄소방지 프로그램 등의 노력으로 오존층은 현재 거의 회복되었다. 사랑도 이처럼 두 사람이 마음을 모으고 주변에서 도와줘야 잘 유지된다.
그런 사랑은 얇고 투명한 유리처럼 연약해 보이지만, 온 세상을 보호하는 기체처럼 보이지 않게 두 사람을 지켜준다. 반대로 사랑에 상처가 나고 구멍이 뚫리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다. 뚫어지기는 쉽지만 다시 메우기는 무척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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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아무리 두 사람이 다짐을 해도, 상처가 나기 시작하면 손가락 사이의 모래처럼 빠져나가 연인들을 애타게 한다. 이 과정에서 남자도 변심을 하지만, 서로 한계에 부딪쳐 무언의 합의 하에 결국 이별을 맞이해야 한다면 여자들이 결단하는 경우가 많다. 연약한 여자에게 차마 아픔을 안겨 줄 수 없어 남자가 망설일 때, 단호히 길을 나서는 여자가 많은 것이다.
흔히 남자보다 힘이 약한 여자는 정말 연약할까? 대개 남자가 힘이 세다지만, 정말 강한 것은 여성이다. 수명도 여자가 길고 생존력도 더 강하다. 어려운 상황에서 정신줄을 놓지 않는 것은 오히려 여자일 수 있다. 어머니로서의 강인함에도 아버지가 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 있다.
여자는 사랑에 있어서도 무언가에 자신의 애정을 분산시키기보다는 모든 것을 쏟아 붓는 성향이 강하다. 처음에는 남편, 그 다음에는 아이, 그러다가 애정의 대상이 모두 품에서 빠져나갈 시기가 되면 그 공허함에 큰 충격을 받아 '빈 둥지 증후군'을 앓는 것이다. 모든 것을 쏟은 사람만이 겪는 현상이다.
연애를 하는 동안의 몰입도는 여자가 월등한 것 같다. 남자가 주변을 돌아보며 산책을 하고 있다면, 여자는 옆에서 걷는 남자를 보며 걷는 모습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 산책이 끝났을 때의 모습은 조금 다르다. 남자는 산책길의 여운과 다시 갈 수 없는 그 길에서 아직 헤어나오지 못하는 반면, 여자는 그 길을 아주 잊은 듯 보인다.
그래서 세상에는 여자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남자들의 노래가 그토록 많은 것이다. 남자의 마인드로는 그런 여자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어떻게 사랑했다면서 한 순간에 다른 얼굴을 할 수 있고, 다른 환경에 그리 빨리 적응할 수 있느냐며, 알다가도 모를 것이 여자의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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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한편으로는 여자가 강해서 그러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여자는 그럴 수밖에 없을 만큼 여러가지에 집중할 수 없는 존재이며, 비슷한 감정 두어 가지를 함께 품을 수 없고,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의 폭풍을 끌어안고는 버틸 수 없는 사람이다. 여자는 사랑할 때 남자보다 더 깊이 빠지고, 더 많이 견디고, 더 소중히 아끼며 더욱 많은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돌아설 때는 그런 시간들이 무색할 정도로 다 잊고 얼굴을 바꾼다. 그 얼굴이 남자로서는 너무나 낯설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안톤 체호프의 단편 <귀여운 여인>은 그처럼 '상황'에 모든 것을 집중하는, 아니 그때그때 처한 삶과 사람에 고스란히 머무르는 여자의 모습을 보여 주는데, 그래야만 살 수 있는 여성의 연약함이 느껴진다.
아직 마음을 접지 못한 상태에서 여자가 그렇게 돌아서면 남자들은 착각한다. 그녀가 아직도 자기를 어느 정도 마음에 두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 기회가 되면 다시 사랑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 아직도 추억은 서로에게 여전히 아름답다는 생각, 그간 주고받은 말들이 웬만큼 유효할 거라는 생각 등이다.
이것은 상당 부분 착각이다. 상처받지 않으려면 미련을 버리고 헤어져야 할 이유 100가지 리스트를 작성해 곱씹으며 상황에 적응하거나, 순정남이 되어 한동안 시름시름 앓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두 사람의 공간에 홀로 남았다 해서 원통해하지는 말라. 그녀는 변심했다기보다, 그 상황을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약한 여자이다. 그녀는 당신 몰래 많이 울었을 것이다. 여자는 남자가 자신을 떠나는 것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 먼저 돌아서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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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여자를 믿지 말라. 아프기 싫다면 여자를 믿지 말아야 한다. 여자를 의심하고 마음을 다 주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그녀를 사랑하되 조건을 달지 말고, 마음을 나누되 늘 손해를 각오하며, 두 사람이 완전한 조건을 이룰 때까지 보호하고 지켜주라는 것이다.
사람은 본디 믿음의 대상이 아니며, 존중과 사랑의 대상이다. 사람 자체가 사랑만큼이나 깨어지기 쉬운 유리알 같은 것 아닌가. 그러므로 여자를 믿지 말라는 의미는 변심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대처하라는 일차원적 이야기가 아니라, 그만큼 연약하기 때문에 돌아설 때는 모든 얼굴을 바꿀 수밖에 없는 존재가 여자이니 있을 때 잘 지키라는 의미이다.
진정으로 서로 사랑한 여자가 낯선 사람처럼 돌아선다 해도 독하다고 욕할 필요도 없고, 예전의 사랑까지 소급해 모두 거짓이라며 절망할 필요가 없다. 어쩌면 냉정하게 돌아선 만큼 그 사랑은, 그대로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삶의 커다란 부분이었을지 모른다. 곁에 있는 여자는 믿기보다는 아껴주고, 떠난 뒤에는 함께한 시간의 사랑을 믿어주라.
김재욱 작가
사랑은 다큐다(헤르몬)
연애는 다큐다(국제제자훈련원)
내가 왜 믿어야 하죠?, 나는 아빠입니다(생명의말씀사)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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