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위가 극렬하다. 지구 온난화로 이상 기온이 가증된 한반도는 본격적인 여름나기에 들어섰다. 연일 쏟아진 폭우로 산 계곡마다 물 가득 흐르고, 숲은 진초록 성근 몸을 키우며 깊은 호흡을 한다.
휴가철이다. 매번 반복되는 휴가철마다 산과 바다를 찾아 역동적인 피서를 즐겨오던 터, 올해도 남도의 섬에서 휴가를 보낼 계획이었다. 그러나 건강검진 결과를 받아보면서 계획한 피서의 방향을 전폭적으로 바꾸었다.
우편으로 배달된 건강검진 결과는, 성인병의 위험 수치를 오르락내리락하며 건강의 적신호를 알려왔다. 혈압, 당뇨, 콜레스테롤, 체지방, 중성지방 수치가 모두 성인병 위험 수치에 근접하고 있으니, 식습관의 개선과 꾸준한 운동을 병행하라는 주치의의 소견이 덧붙어 있다.
그래, 금식 기도를 하자.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영혼의 동력을 얻고, 건강도 보장받는 금식 기도의 시간이다. 방만하게 살아온 날들의 영적 어두움을 제거하고, 하나님께서 부여한 소명을 찾아야 할 시간이다.
기도원은 예전 같지 않다. 제법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기도원이지만 한산하다. 담임목사가 매주 한날 집회를 인도하는 기도원이다. 한국 교계의 영적 어두움을 대변하는 듯 싶다.
기도원 등나무 벤치에서 세 명의 젊은이들이 열띤 대화를 나누고 있다. 슬쩍 끼어들어 자리 한쪽을 차지했다. 술과 담배를 끊기 위해 기도원을 찾은 청년들이다. 술과 담배를 끊기 위해 기도원을 찾았다지만 여전히 술과 담배에 대한 갑론을박이 치열하다.
칼 바르트는 파이프 담배를 물고 살았고, 마르틴 루터는 아예 맥주 공장을 차렸는데 그들이 영생을 얻지 못했겠느냐고 항변한다.
성경은 음주와 흡연에 대하여 어떤 시각을 가지고 있는가.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음주를 즐기셨다.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눅 7:34)."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왜 음주에 대하여 불경스러운 눈치를 주고, 음주를 하는 성도들을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며, 믿음의 척도를 판단하고 비판하는가.
"예수께서 이르시되 ... 이러므로 모든 음식물을 깨끗하다 하시니라(막 7:18-19)."
술뿐 아니라, 어떤 음식물이든 그 자체로는 옳고 그름을 판단해야 할 대상은 없다. 단지 사용하는 자와, 사용법의 문제일 뿐이다.
선조들로부터 '약술'이라 칭하며 반주를 즐겼던 우리의 고유문화라거나, 적절한 음주가 혈액순환에 도움이 된다는 연구결과는 절주를 권하고 있지 않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포도주를 쓰라고 권면하는 것을 보면, 술을 선악과처럼 다룰 만한 성경적 근거는 없다. 결국 그 위에 덧씌워진 인간의 사고로 인한 해석 영역이지, 선악을 다툴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서양의 음주 문화와 달리, 우리의 음주 문화는 갈 데까지 가는,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짓이라", 성경 말씀을 거스르는 폭음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절주가 요구되는 환경이다.
성경을 절대 신뢰하는 성도들에게 '아디아포라(성경에서 명하지도, 금하지도 않은 행동들)'의 영역은 넓게 존재한다. 성경 어디에도 흡연에 대한 해답도 없고, 음주에 대한 적당선이 어디까지인지 선명한 기준도 없다.
다만 하나님의 섭리는, 구원사적 역사를 이루시는 시간임을 인지하는 데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우상의 제단에 올려졌던 음식을 먹어도 되는가 하는 질문에 바울은 대답한다.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고전 8:9; 13)".
반대로 약간의 음주를 함께함으로써 생명의 복음을 전할 수 있는 호재가 되는 자리라면 바울은 어떻게 행동했을까.
고작 먹고 마시는 문제로 누군가와 대립되기는 싫다. 친교를 위하여, 복음 전파를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생명 구원을 위하여 마땅한 자리라면, 굳이 술 조금 마신 것이 성도로써 가당치 않은 일을 한 것이고, 질타의 대상이 되어서는 아니 될 말이다.
음주와 흡연은 지극히 개인적인 성찰의 문제이다. 공동의 다수가 이행함으로 무조건 따르라는 기준율을 적용한다면 정죄의 수단이 된다.
술과 담배. 피우고 싶을 때까지 피우고, 마시고 싶을 때까지 마시다 만약 개인적 질병이나 중독으로 인한 불편, 혹은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데 악재라고 느껴지는 때가 온다면, 과감히 끊어야 할 음식임은 분명하다.
하민국 목사(인천 백석 새로운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