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욱의 ‘연애는 다큐다’ 26] ‘관계’가 자라지 않는 관계
살다 보면 뜻대로 되지 않는 답답한 일들이 많다.
인터넷 사이트에 어쩔 수 없이 귀찮은 회원가입 과정을 거의 다 했는데 백 버튼을 잘못 눌러 처음부터 다시 입력해야 하는 일도 있고, 기껏 이메일을 보냈는데 스팸메일로 처리되거나 상대방이 실수로 지워 다시 보내야 할 때도 있다.
뭐 이 정도는 자주 있는 일이고 별것도 아니다. 그러나 몇 시간 컴퓨터 작업을 했는데 저장을 안 한 상태에서 프로그램 오류로 종료된다든지, 하드 디스크 에러로 몇 년 치의 데이터가 날아간다든지 하는 일이다.
이런 일이 답답한 이유는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다시 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고, 깨끗이 잊어버리기도 어렵다. 그 과정을 다시 하면서 계속 허탈함과 아쉬움이 상기되기 때문이다. 따질 대상도 하소연할 곳도 없다. 스티브 잡스를 욕해봐야 달라지는 게 없지 않나.
어떤 질병에 걸린 경우에도 모든 수단을 동원해 치료를 했는데, 약 처방의 실수나 감기 등으로 모두 수포로 돌아가 다시 치료해야 하는 수도 있다. 공들인 일이 수포로 돌아갈 때는 새로운 난관보다 더 힘들고 맥이 빠지기 마련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란 매우 복잡한 실타래 같아서 다양한 문제들이 얽혀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답답하고 해결책이 없는 것은 관계의 발전이 없는 경우이다.
고드름은 처음부터 뾰족하고 길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눈송이도 처음부터 육각형이 될 수는 없다. 먼저 얼음이 된 뿌리가 있어야 고드름이 되고, 티끌이라도 있어야 눈송이가 아름다운 모양으로 자란다. 처음 상태 그대로만 있으려 한다면 아무것도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다.
사람도 서로 만나면 싸우든지 좋든지 시큰둥하든지 무엇이든 역사가 생기고 사연이 누적된다. 그런데 어떤 사람과는 일정한 관계 이상 더 나아가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런 사람은 원래 모든 관계를 그렇게 유지하는 것밖엔 모르는 사람일 수도 있고, 나와는 그 이상 다가서고 싶지 않다는 의사표현일 수도 있다. 정확히는 이 두 가지 특성이 복합적으로 나타난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관계를 만들어 나갈 줄 모르는 사람은 대개 무신경하고, 상호작용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다. 이런 사람에게도 친밀한 사람은 있기 때문에 모든 관계를 그렇게 유지한다는 것은 사실상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기본 성격에 더해 상대에게 별다른 호감조차 없다면, 두 사람은 그 어떤 관계보다도 가까워지기 힘들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평소에는 그 특성이 잘 드러나지 않고, 서로 의견이 다를 때 알아볼 수 있다. 어떤 말도 벽에다 하는 것처럼 늘 같은 말만 되돌아온다. 공방이 벌어지거나 여러 사건들이 더해지면 그에 따라 주장이나 입장과 태도에 변화가 생겨야 하는데, 초반에 했던 이야기만 계속 되풀이하기도 한다. 프로그램이 다운되어도 작업하던 상태까지는 남아 있어서 거기부터 이어서 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참아 줄 수 있다. 문제는 한 번 했던 과정을 다시 해야 하는 괴로움이다.
사람 간의 관계란 늘 좋을 수 없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이 교차하면서 미운 정과 고운 정이 들고 남들과는 다른 둘만의 이야기가 쌓이는 것이다.
부모는 자식을 오늘의 모습만 보지 않는다. 그래서 환갑이 된 자식에게조차 조심하라고 말하곤 하는데, 아이 때부터의 모습이 쌓이고 겹쳐 보이기 때문이다. 부부도 배가 나오고 다이어트에 실패한 모습을 보면서도 예전 모습을 함께 보기 때문에 큰 이질감이 없다. 오늘 두 사람의 관계도 지나온 세월의 굳은살 때문에 버틸 수 있는 법이다. 이것이 안 되면 두 사람은 위기를 만났을 때 갈라서게 된다.
연애 상대로 생각하는 이가 관계를 덧입혀 갈 줄 모르는 사람이라면 고민이다. 두 사람이 여정을 함께 출발한 줄 알았는데 한 사람이 어느 지점에 도달해 보니 상대방은 아직도 전 역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 다시 이전 역까지 가서 그를 데려와야 한다. 한두 번이면 모르지만 이런 일이 반복되거나 여러 역을 간 상태에서 다시 처음 역으로 가야 한다면 금세 지칠 것이 분명하다.
이런 사람이 정말 그 이상의 소통 방식을 몰라서 그러는 것인지, 알면서도 더 다가가기 싫어 일부러 모른 척하는 것인지 분별할 필요가 있다. 원래 스타일이 그런 거면 몰라도, 나한테만 그런다면 싫다는 의사 표시인데, 눈치 없이 끌고 가면 안 될 테니까 말이다.
사랑의 타이밍은 각기 다르다. 시간과 속도, 그리고 양의 차이가 분명히 존재한다. 안 맞으면 차라리 기다려 달라든지, 나한테 맞추라든지, 싸우든지, 포기를 하면 그건 정상이다. 하지만 나는 한 발짝도 안 뗄 거니까 오든지 가든지 내 소관이 아니라는 식이라면, 그와는 더 먼 여정을 떠날 수 없다.
이런 사람은 아무리 긴 인내심으로 되돌아가 손을 잡아끌며 함께 가고자 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관계가 자라나지 않는 관계는 언제 어긋나도 어긋나기 마련이니까.
김재욱 작가
사랑은 다큐다(헤르몬)
연애는 다큐다(국제제자훈련원)
내가 왜 믿어야 하죠?, 나는 아빠입니다(생명의말씀사)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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