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를 상실한 교황, 전쟁과 죽음, 그리고 흑사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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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지상강좌] ⑧

*본지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해 김재성 박사(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조직신학)의 논문 '종교개혁의 은혜 교리(은총론): 구원의 확신과 소명의 회복'을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지상강좌]라는 제목으로 연재합니다.

▲김재성 박사. ⓒ크리스천투데이 DB

▲김재성 박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종교개혁의 은혜 교리(은총론): 구원의 확신과 소명의 회복 

시작하는 말

종교개혁의 신앙유산과 교훈들 중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가르침들을 재발견하고 재구성했다는 점이다. 오직 은혜로만(sola gratia)을 주장하는 교리는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의 역사에서 가장 포괄적이고 종합적인 체계를 구성하고 있다.

영원한 구원과 생명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선물이기에, 인간의 노력으로 획득하거나 쌓아가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는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한다(롬 1:7).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는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주셔서 영생에 이르게 하신다(롬 5:17,21). 은혜를 강조하면 할수록, 선행과 성화를 무시하지 않는다. 참된 믿음을 고백하는 자들은 율법의 정죄아래에 있지 아니하지만, 은혜 아래서 살아가는 자들은 의를 추구한다!

로마 가톨릭과는 전혀 다르게,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적으로 은혜의 교리를 재구성하게 되면서, 구원 교리가 완전히 다시 정립되었다. 값없이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면서, 종교개혁은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신앙을 재발견하게 되었다. 은혜의 교리는 믿음으로 주어지는 칭의론과 구원론을 가능하게 했고, 죄의 용서와 사면을 확신케 해 주었다. 타는 목마름으로 영혼의 위로를 맛보고 싶어하던 중세 말기의 성도들은 시원한 복음의 축복에 젖어들었다. 그리고 일터와 삶의 소망을 발견하게 되어, 열심히 주어진 일터에서 최선을 다해서 살아갔다.

이러한 종교개혁자들의 신앙유산을 잊어버리지 말라고 프란시스 쉐퍼 박사가 경고한 바 있다: "종교개혁에 대한 기억을 상실할 정도로 엄청난 압력이 들어오고 있다. 우리는 종교개혁의 유산으로 가지고 있었던 것들, 상실된 진리를 회복하는 것이 첫 번째 과제다."

유럽과 미국에서 그러하다면, 과연 지금 한국 교회에서는 종교개혁의 신학과 신앙적 유산을 얼마나 소화하고, 계승하고 있는가를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도 필자가 가장 강조하고자 하는 종교개혁자들의 유산은 하나님의 은총을 모두 다 새롭게 체험하고, 핍박과 불행을 겪으면서도 자신들의 생애를 슬기롭게 가꾸어 나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각박한 상황에서도 기독교 신자의 일상생활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는 한편, 삶의 문제들에 대한 해결방안을 찾아서 능동적으로 참여하였다. 종교개혁자들이 제시했던 은혜의 교리와 그와 연계된 성경적 교훈들은 설교와 책자를 통해서 시민들의 소소한 일상생활에 도움을 주는 지침으로 남았다. 루터와 칼빈의 신학적 교리들은 성도들의 일상생활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소명의식을 불러일으키면서 깊은 감동을 주었고, 역동적인 삶에의 동기를 부여했다. 중세 말기 시대에 일반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어둠이 깊이 드리워져서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희망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로마 가톨릭의 권세 아래 농촌과 가정에서 소소한 일상생활을 영위하던 성도들에게 자긍심과 행복이란 전혀 맛볼 수 없었던 시대였다. 전쟁과 전염병과 마귀에 연루된 소문들은 널리 팽배해 있었다. 일상은  불안하고 비참하며 우울했으며, 불행한 소식들만이 난무했었다.

중세말기에는 명쾌한 구원론이 정립되어져 있지 않았다. 칭의와 대속, 교회와 구원에 관련된 모든 가르침들은 교회의 전통에 따라서 흘러가고 있었다. 종교개혁자들의 구원론과 교회론은 성도들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는 신앙을 갖게 하면서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사실 종교개혁의 신학사상들은 16세기를 살아가던 성도들의 불안과 두려움에 대한 성경적 해답이었고, 주어지기 시작한 모국어 성경, "말씀의 빛"을 열광적으로 받아들였고 큰 감동과 평안을 제시했던 것이다.  

1. 죽음과 전쟁으로 퇴락하던 사회

종교개혁은 각 사람의 마음 속에 갈망하고 있던 생존에의 위로와 평안의 메시지를 제공하였다. 로마 가톨릭의 권위 아래서 신음하던 자들이 기다려온 자유함에의 응답이기도 했다. 비록 뮌쩌의 농민혁명이 실패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군주들과 교황에 대해서 절대 충성하려는 마음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도리어 유럽에 몰아닥친 전쟁과 전염병은 중세 말기의 로마 가톨릭에 대한 신앙심을 흔들어 놓았다. 수많은 사람들은 가족들의 죽음 앞에서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던 종교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신뢰를 저버리게 되었던 것이다. 새로운 자유에의 갈망과 근대적인 개인의 소중함을 터득하면서 새로운 방향을 만들어낸 개신교회로 진행하게 한 것이다.

중세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연옥에 가서 형벌을 받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러니 고백하지 못한 죄 때문에 고행을 당해야 한다는 형벌의 두려움에서 벗어나려고 고행과 순례를 마친 후에 면죄부를 받았다. 사람들은 장래에 지은 죄에 대해서도 미리 면죄부를 주문할 수 있게 되면서, 하나님의 은혜는 교회의 사업수단으로 변질 되었다. 루터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 앞에서 두려움을 느꼈다고 토로한 바 있다. 사람들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형벌을 피할 수 있느냐에 집중되어 있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재발견하게 된 종교개혁자들은 평범한 사람의 일상생활로부터 거대한 공적인 국가의 중대사에 이르기까지, 죽음과 전쟁을 포함하여 거의 모든 분야의 문제들을 새롭게 재설정하게 되었다. 중세 시대는 성직자들과 수도원에서만 하나님께 의미 있는 일들이 이뤄진다고 가르쳤다. 종교개혁의 신학적 특징은 아주 사소하고 시시하게 여겨지는 구체적인 일상생활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지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은혜와 그것을 아는 지식으로 파헤쳐 나가도록 광범위한 영향을 끼쳤다는 점이다.

종교개혁을 이끌던 지도자들은 고답적인 학문탐구에 빠지지 않았고, 일상이라는 현실의 토양에서 자신들의 깨우친 하나님의 은혜와 교훈들이 견고히 뿌리내기기를 갈망했다.

종교개혁자들은 당시 자신들이 처해있던 시대적 상황에 깊이 관련을 맺은 사항들에 대해서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했다. 새로운 서구문화의 출현을 갈망하던 시민들의 요구에 부응하여 적합한 새로운 삶의 양식을 제시했다.

종교개혁자들은 수도원에 격리된 경건이 아니라, 시장터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을 중요시하여 복음을 선포했다. 루터와 칼빈을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은 설교와 강의와 저술을 통해서 선행과 공로사상에 대해 냉철한 비판정신을 발휘하면서, 일상을 중시하는 성경적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을 제시했다. 칼빈이 수도사들을 비판했는데, 그들의 게으름, 무지, 악폐를 비판한 것이 아니라, 수도사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소명에 대해 적합하게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 교황권의 혼돈, 권위의 위기와 민족주의

오랫동안 쇠퇴의 길로 빠져들고 있었던 유럽사회에서 무기력하고 무능하던 봉건 군주들과 결탁했던 로마 교황청에서는 자신들의 내부적인 권력쟁탈에 여념이 없었다. 교황의 권위가 실추되는 결정적인 날을 맞이하고 있던 중세말기, 십자군 전쟁이 실패로 끝나자 이를 주도했던 교황의 권위가 급속히 몰락하고 말았다. 1303년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가 전쟁비용의 충당을 위해 교회에 세금을 부과하자 보니파시우 8세 교황이 반발하였다. 1308년 프랑스 국왕은 교황의 별궁인 아나니를 습격하고 교황을 납치하였다. 프랑스 국왕의 간섭 하에 새 교황 클레멘스 5세가 선출되었지만, 로마로 돌아가지 않고 아비뇽에 머물면서 힘을 잃어버렸다. 이것을 "아비뇽 유수"라고 부르고 있는데, 1307년부터 1377년까지이다.

교황 그레고리오 11세가 로마로 귀환하면서 프랑스에서 재위하던 변칙적인 상황은 종식되었다. 그러나 그의 후임 우르바노 6세가 로마에서 선출되자, 프랑스인 추기경들이 이를 거부하고 1379년 아비뇽에 또 다른 교황을 세웠다. 로마와 아비뇽 두 곳에 각각의 교황이 재위하는 극심한 혼란상이 빚어졌다. 두 명의 교황들은 서로를 향해 파문하였고, 어느 쪽이 정당한 권리를 갖고 있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을 모두 취소하고 새로운 교황을 뽑았지만, 모두 다 물러나지 않아서 세 명의 교황이 재위하기도 했었다. 세 명 교황들 중에서 1415년에 마지막 한 사람이 사망하면서 극렬한 혼돈 사태가 종결되었다.

14세기 백 여 년 동안 로마 가톨릭 교회는 권력쟁탈전에 몰두해 있었기에, 성도들에게 구원의 확실성을 제공하지 못하는 혼돈 속에 빠져 있었다.

최고로 여겨지던 교황의 절대적인 권위가 상실되고 교황청에서 관할하는 행정력도 원활하지 못하게 되면서, 생활의 거의 모둔 분야에서 로마 가톨릭의 무능함이 드러났다. 일반 시민들은 교회로부터 아무런 혜택을 받지 못하면서, 정치와 사회와 경제까지도 장악하여 지배하던 로마 가톨릭의 영향력 하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1494년 프랑스 왕 샤를 7세가 이탈리아 북부를 침공해 들어왔다. 로마 가톨릭 교황청이 이탈리아 주변의 유럽 거의 모든 국가들의 군사문제 까지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시대에, 이 사건은 유럽을 뒤흔든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밀라노의 감독 사보나롤라는 부패한 교황청과 시정부 부유층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질타하였다.

유럽 각 지역에서는 로마 가톨릭과 결탁해 있었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군림에 저항하는 민족주의가 등장하고 있었다. 프랑스, 독일, 스위스, 저지대 국가, 영국 등 국왕들과 군주들은 절대권력을 행사하던 황제에 맞서서 각자의 재정적 이익을 추구하였다. 로마 가톨릭에 대한 반발이 크게 퍼져있던 정치적 상황 속에서 종교개혁자들은 사회적 요구가 무엇이었던가를 민감하게 파악하였다. 영국, 독일, 스위스, 프랑스, 네델란드 등 각 지역에서 확산된 종교개혁은 개인의 자유를 향한 갈망이 서서히 퍼져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주요 종교개혁자들은 새로운 정치적 질서를 제시하여 재세례파의 급진적이고 과격한 분리주의를 방지하는데 앞장섰다.

2) 전쟁과 죽음

유럽에서 가장 끔찍한 전쟁은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벌어진 백년전쟁 (1337-1453)이었다. 프랑스 국왕 필립 6세 (1328-50까지 재위)가 영국이 지배하고 있던 아키텐 지역을 장악하려 하면서 프랑스 전지역에서 피나는 전투가 전개되었다. 프랑스는 전쟁비용 마련을 위해서 과도한 세금을 부담시켰고, 농민들과 서민들의 불만이 고조되었다. 16세기에 농민들의 반란이 자주 일어났던 것은 귀족들의 억압과 큰 땅을 소유하고 있던 로마 가톨릭 교회의 귀족들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다. 이탈리아와의 영토 확장 경쟁에도 나섬으로서 로마 가톨릭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

로마 가톨릭의 지지를 받고 있던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스위스 땅에 침략해 들어오자, 칸톤들이 연합하면서 스위스라는 산악지대의 연맹체가 형성되었다. 1511년에 합스부르그 왕가의 후원을 받은 스위스 용병부대가 영토 확장을 목적으로 이탈리아 북부 밀라노를 점령하였다. 이 사건은 1515년에 이탈리아 마리그나노에서 대대적인 전쟁으로 번지고 말았는데, 프랑스에서는 밀라노 지역을 남부의 관문으로 생각하여 장악하려고 했다. 스페인, 잉글랜드, 이탈리아 로마 교황의 군대까지 동원되어 스위스와 합스부르크 왕가의 연합군이 형성되었으나, 프랑스의 새 국왕 프랑수아 1세가 직접 지휘하는 군대가 스위스 부대를 전멸시켰다.

프랑스는 오랫동안 교황과 이탈리아에 대해서 독립적인 지위를 확보하고자 방안을 강구해 왔었다. 스위스 등 연합 군대가 참패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이들에게는 가공할 신무기로 무장된 프랑스 군의 포병부대가 없었던 것이다.

츠빙글리는 전쟁의 비통함은 맛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고 하면서, 스위스 사람들이 참여하던 용병제도에 반대하였다. 이탈리아, 프랑스, 오스트리아, 독일 등 강대국 사이에 끼어서 살아가던 스위스 칸톤 들의 연맹은 살아남기 위해서 결코 주변국가들과 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영구 중립을 선포해야만 했다. 스위스 인문주의자들은 민족주의자로서의 이상을 갖고 국가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14세기에 실존했었다고 알려진 "빌헬름 텔의 신화"를 만들어냈을 정도였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폭정에 거부하여 민족을 구원하려던 한 영웅의 이야기는 전쟁의 공포에 두려워하던 스위스 동맹들에게는 큰 위로였다.

이탈리아 북부와 프랑스 남동부를 지배하던 사보이 공국은 수백 년 동안 인접지역에 있는 스위스 제네바를 다스려왔다. 인구 6천명이 살던 교통의 요충지 제네바는 교황이 지명한 주교가 다스리던 독립 도시였다. 그래서 사보이 공작이 새로운 주교를 임명하고, 점령군을 통해서 지배를 강화하자 목숨을 걸고 싸웠다. 1525년에 주교와 모든 로마 가톨릭 신부들이 두려움으로 피신해 버렸다. 이웃 도시 베른 등에서 온 스위스 동맹군의 도움으로 마침내 제네바는 독립을 하게 되었고, 1535년에 정치와 종교 양면에서 과거체계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종교개혁으로 가입하였으며, "어두움 후에 빛이 온다" (post tenebras lux)는 문구를 도시의 표어로 채택하였다. 1602년 11월에 다시 재침공을 가해왔으나, 완전히 무찌르고 독립하였다.

3) 흑사병과 심판의 공포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강박관념은 중세 말기 유럽 사람들에게 강하게 남아있었다. 흑사병은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간주되었다. 일반인들의 의식주 생활환경이 너무나 불결하고 위생상태가 열악했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들의 신체에 필요한 기본 영양분을 공급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면역력이 극히 저하되어 있었다. 여러 항구를 드나드는 이탈리아 상선들에 실린 짐들 속에는 벼룩과 쥐가 득실거리고 있었다. 1347년 10월 이탈리아 제노아 선박들이 시칠리에 당도하면서 흑사병이 발병했고, 다음 해에는 남부 독일로 확산되어졌으며, 영국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지저분한 오물들이 뒤섞여있는 더러운 거리와 습기에 가득 차 있는 건물의 음습한 곳에는 쥐와 벼룩들이 들끓었다. 일단 사람에게 감염이 되면, 기침과 재채기를 통해서 병균들이 다른 사람들에게로 옮겨졌다. 한번 감염이 되면 흑사병을 이겨낼 방법이 없었다. 무시무시한 치사율을 드러내는 흑사병에 감염되면 림프선이 부어올랐고, 피부에 출혈이 있어서 검은 반점과 검은 색 버짐이 나타났다. 그래서 흑사병이라고   불렀는데, 마지막 단계는 피를 토하고 고열을 이기지 못하다가 사망하였다. 몸 속에서 나오는 물질들은 병균에 감염되어져 부패한 것들이, 땀, 배설물, 침, 숨 등에 섞여서 몸으로부터 밖으로 나오는 순간에 악취가 진동했다. 소변의 색깔도 검은 색이라서, 그야말로 지옥을 연상시켰다. 어떤 도시에는 인구의 절반이 죽기도 했다.

흑사병은 언제 어떻게 옮겨지는지도 모른 채 확산되었다. 건강한 사람이라도 박테리아에 감염이 되면 혈관 속에서 문제가 발생하여 패열증으로 쓰러졌다. 1347년부터 1353년 사이에 퍼진 전염병으로 유럽 인구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약 2천 5백 만명이 희생되었다. 공포스러운 죽음은 각 지역의 미풍양속을 바꿔놓았다. 부모가 감염된 자녀를 내다 버렸고, 역시 자녀들도 병으로 죽은 부모를 버렸다. 심지어 교황의 경우에도 페스트에 감염될 경우에는 종부성사를 받지 못할 정도였다.  

1505년 가족의 비극적 사망을 경험하게 되는 루터도 페스트로 인해서 동생 하인츠와 바이트를 잃게 되었다. 루터는 둘째 아들이었고, 네 명의 누이들이 있었다. 자주 흑사병이 창궐해서, 유럽 전 지역에는 예기치 못한 희생자들이 나왔는데, 1505년 6월 13일, 에르푸르트 대학에서도 교수 세 명이 한꺼번에 사망했고, 수많은 희생자들에 대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사람들은 차라리 수도사로서 죽게 된다면, 위대한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죽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루터가 수도사의 길을 생각하게 된 계기가 바로 그런 상황에서, 집에서 에르푸르트 법과대학으로 돌아가던 길에, 7월 2일 벌어진 무시무시한 천둥번개 사건이 있었다.

루터가 수도사가 된 것은 우연히 벌어진 낙뢰사건의 결과라기보다는 그 이전에 있었던 형제들의 죽음에서부터 찾아야 할 것이다.

1519년 여름, 유럽 전 지역에 전염병이 확산되어서 인구의 삼분의 일, 혹은 사분의 일이 몰사하고 말았다. 유럽의 가정들은 엄청난 비극에 휩싸이고 말았다. 츠빙글리는 성도들을 방문하여 격려하고 돌보다가 자신도 감염되었다. 그는 죽음의 공포 속에서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하는 시를 남겼다. 다행히 은혜를 입고 회복되었다. 츠빙글리는 자신의 생애 속에 개입하여서 호의를 베풀어주신 바에 따라서 살아난 것이 은혜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종교개혁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크게 줄어들었지만, 비텐베르크에서는 또 다시 1527년에 흑사병이 발병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피신을 떠났다. 루터의 집은 원래 수도원 건물이었기에 숙소로 사용되면서, 많은 환자들이 머물러서 치료를 받았다. 루터가 "치명적인 흑사병으로부터 도망해야 하는가?"라는 논문을 발표하였을 정도였다. 여기에 다가 매독병도 널리 확산되어 있어서, 군인들, 성직자들, 농민들, 심지어 교황까지도 감염되었다.

이처럼 죽음은 멀리 있지 않다고 생각되었기에, 면죄부 판매가 상상치도 못할만큼 성공적으로 판매되었던 것은 바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팽배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한 옛 신앙이 무너져 내리던 시기에, 유럽인들에게 새로운 소망을 품게 하는 새 소식이 될 수 있었다. 도시로 몰려드는 사람들의 유입으로 신속하게 기능적인 소상공인들과 상업이 발달하였다.

종교개혁을 받아들인 제네바는 새로운 정치적 희망을 꿈꾸고 있었다. 칼빈은 이처럼 전쟁의 공포와 불신, 주교에 대한 불신과 외부인에 대한 거부감이 팽배한 도시에 설교자로 사역하면서, 불안하고 두려움에 빠진 원주민들과 각지에서 몰려온 6천여 명의 종교 피난민들이 가담함으로써 도합 인구가 1만 2천명에 이르게 된 도시의 문제들을 다뤄야만 했다. 칼빈은 모든 노력들 중에서 가장 빛나는 것은 도시에 만연된 불신앙과 신성모독을 고치고, 평범한 사람들의 생활을 경건하게 증진시키는 노력에 치중하였다는 점이다.      

복음을 통하여 제시된 구원의 은총에 확신을 가지도록 선포하면서, 종교개혁자들은 은혜의 교리를 가장 중요한 핵심적인 가치로 선포하였다. 오직 은혜로만! 중세말기와는 달리 은혜에 대해서 번잡한 신학적 이론만을 개발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총에 기초하여 가장 순수한 복음적 사유방식과 행동양식을 제시하였다. 죄인을 향하여 값없이 주시는 은혜라는 것은 하나님의 호의가 역동적으로 나타나서 생명이 회복되어지도록 개입하는 것을 의미했다. 중세 말기의 쇠락해가는 로마 가톨릭 교회에 던져진 은혜의 교리는 신선한 생명력을 불어넣었지만, 결국 루터와 칼빈 등은 이단자들로 추방을 당하고 말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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