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지상강좌] ⑨
*본지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해 김재성 박사(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조직신학)의 논문 '종교개혁의 은혜 교리(은총론): 구원의 확신과 소명의 회복'을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지상강좌]라는 제목으로 연재합니다.
2. 은총의 교리 재구성
종교개혁자들은 어떻게 죄인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하였다. 중세 말기에는 벌어진 비극적인 사회 현상들로 인해서 (전쟁, 교황권의 대립, 전염병, 지역주의 등)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 대한 .두려움과 극렬한 공포심이 널리 확산되어 있었다. 죽음의 맛을 느끼며 고통의 세월들을 보내던 사람들에게 중세말기 로마 가톨릭 교회가 가르친 하나님은 진노하시고, 죄를 엄격하게 처벌하시는 분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은혜, 용서와 사죄를 주시는 구원의 복음을 증거 하였다. 종교개혁은 성경에 근거하여 은총의 교리에 대해서 완전히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였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신 분이시고, 죄인을 긍휼히 여기사 기꺼이 만나주시고 들어주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1) 오직 은혜로만이냐 또는 은혜 최우선주의냐?
종교개혁자들은 은혜의 경륜에 주목하였다.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값없이 주시는 구원이라는 관점에서 새로운 해석을 제시했다. 종교개혁자들이 가장 중요하게 선포된 핵심적인 교리는 은혜의 복음이었다. 은혜란 죄인에게 값없이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자애로우신 호의이다.
은혜의 근거는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창조하시고 경영하시는 것이며,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속사역을 이루시는 가운데 은혜가 시행되어지고, 성령의 적용사역으로 성도들의 심령 안에서 빛을 비춰주신다.
"오직 은혜로만!"이라는 교리의 핵심은 죄인들이 차츰 공로를 세워 나가면서 더욱 더 하나님이 인정하실만하게 매력적으로 변해 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죄인은 아무리 노력해도 전혀 하나님에게 용납되거나 사랑을 받기에 합당하지 못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인들이 정죄당하지 않고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복음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 때문에 죄인은 이제 사랑을 받는 대상이 되어 있었고, 하나님께서는 변함없이 사랑하신다는 놀라운 사실을 새롭게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은혜는 하나님의 신성한 임재방식과 행동양식을 통해서 드러난다.
은혜는 죄인을 향하신 하나님의 호의, 자애로우심이다. 은혜란 전혀 사람의 공로에 따라서 좌우되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따지지도 않고 베풀어주시는 긍휼하심이다. 로마서 5장 20절에, "죄가 더한 곳에 은혜는 더욱 넘친다"고 하였고, 죄를 이기고 왕노릇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다. 루이스 벌코프는 은혜를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근본적인 개념은 축복들이 은혜롭게 주어지는 것을 의미하는데, 값없이 주시되 그 어떤 공로나 요청에 따라서 좌우되지 않는다. 은혜라는 단어가 사용된 대부분의 신약성경에서는, '카리스'라는 단어가 사용되는 곳에서는 사람의 가슴 속에 주어진 하나님의 자애로우신 호의를 의미하며, 성령의 효과적 작동에 의해서 시행된다."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진 죄인의 심령 속에는 변화된 능력이 나타난다. 은혜란 생활 속에서 엄청난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은혜는 죄인을 향하신 하나님의 특별하고도 자애로운 사랑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은혜는 하나님의 인격에서 분리된 것이 아니라, 죄인을 위해서 시행하시는 독특한 성령의 임재와 역동적인 특성이다.
사도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였다" 고 고백하였다 (고전 15:10). 갈라디아서 1장 15절에서는 "내 속에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라고 자신의 정체성을 토로하고 있다. 또한 구원의 은혜를 풀이하면서, 모든 근거는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나온다고 확신했다 (엡 2:8). 여기서 은혜는 강력하고도 역동적인 변화를 이끌어낸 하나님의 사랑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서 극렬하게 반항하고, 증거자들을 끝까지 추적해서 일망타진하려고 덤비던 사울에게 일어난 엄청난 사건을 설명하는 데에는 은혜 밖에 없다. 은혜 외에는 다른 단어란 어울리지 않는다. 사도 바울에게서 은혜라는 단어는 그의 삶 속에서 일어난 회심 사건과 같이 실제적으로 이루어진 일을 의미한다.
어거스틴의 생애를 바꿔놓는 엄청난 변화는 밀라노에서 일어났다. 세속적인 출세를 향해서 달려가던 그가 회심을 체험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한량없는 하나님의 은혜가 작동한 것이다. 로마 제국에서 황제의 권세 아래서 출세하려는 야망을 갖고 달려가던 어거스틴은 청년기에 꿈꾸고 살았던 길에서 급격히 돌아서게 된다. 죄와 허물로 가득 찬 자신의 영적 상태를 되돌아보게 되었다. 급기야, 진정으로 죄악된 자아를 회개하고 밀라노에서 세례를 받았는데, 아들이 죽음에 이른다. 그는 고향 아프리카 북부로 돌아가서 일생동안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노력했고, 「고백록」에서 전 생애를 걸쳐서 추구하던 과정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어거스틴의 회심 이야기는 청교도들이 가장 듣기를 즐겨하던 예화가 되었고, 수많은 이들이 감동을 받았다.
훗날 어거스틴을 일컬어서 "은총의 신학자"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어거스틴은 펠라기우스에 맞서서 개인적으로 도덕적인 성취를 이뤄야만 구원의 은총을 성취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죄를 용서받고 원죄의 형벌에서 벗어나는 길은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이라고 하는 "선행적 은총"이 있어야만 한다. 믿음과 회개를 수반하면서 "유지하는 은총"을 주시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향해나가도록 "예방하는 은총"도 내려주신다.
2) 스콜라주의자들과 종교개혁자들의 대립
중세 후반 유럽에서는 낡은 종교에 대한 신앙이 무너져 내렸다. 사회의 갖가지 처절한 현상들 속에서, 해답을 갈망하던 자들에게 은혜라는 해답이 주어졌다. 종교개혁자들은 죄인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소개했다. 고아와 과부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께서는 절망하던 자들에게 낡은 종교의 허울을 벗어버리는 변화를 경험하게 허락하셨다. 종교개혁들 대부분은 중세 말기 가톨릭 신부들이었다. 루터와 그 주변에 있던 동료들, 츠빙글리, 부써, 파렐 등이 은혜의 복음을 선포하자 로마 가톨릭에서는 파문하였다.
종교개혁자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란 교리적 구호가 아니었다. 그저 모호한 말로서 체계화된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모든 기독교 신자들의 삶 속에서 체험되어지는 생명의 증거들이다.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자애로우심이 나타나서 새 힘을 부여하여 삶의 방향을 바꿔놓았다. 죽음과 전쟁과 죄가 넘실대던 폭풍의 바다에, 암흑같이 어두워서 전혀 소망이 보이지 않던 좌절의 시대에, 하늘로부터 은혜의 생명줄이 던져졌다. 칼빈은 극적으로 제네바의 설교자로 살아가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시편 주석 서문에 밝힌 바 있다. 마치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살아나게 되는 것과 같다고 고백했다. 칼빈은 시편에 나오는 다윗의 고백을 가장 좋아하였다.
중세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은혜의 개념에 대해서 상당히 많은 규정들을 설정해 놓았다. 먼저, 확실하게 행동 가운데서 구체화되는 "실제적 은총"(actual grace)과 새로운 피조물의 근본적인 원리가 되는 "습관적 은총"(habitual grace)으로 나누었다. 습관적 은총이 보다 실제적 은총으로 행동화하는 것이 강조되었다. 중세시대에는 "비창조된 은총"(uncreated grace)은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 자신의 선물로 주어지는 것으로 모든 다른 은혜의 기초가 되는 것이고, "창조된 은총"(created grace)은 개인의 성격과 본성에 따라서 비창조된 은총이 효과를 발휘하게 하는 은총이다. 따라서 신비적인 성례를 통해서 은혜의 주입을 강조했다. 미사, 고해성사 등 일곱 가지 성례들에 참석하게 되면, 자신들의 영혼 속에 주입되어진다는 초자연적 실체를 받게 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그러한 맹목적이고 무의미한 반복 속에서 은총을 받게 된다는 허상을 깨트려 버렸다. 성직자들이 성례의 시행을 장악하고 있으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주입시켜주고자 각종 예식을 시행한다는 것이 허구적인 도그마, 강압적 권세를 동반하는 억지주장이었음을 파헤쳐 버렸다.
종교개혁자들은 구원의 전 과정은 "오직 은혜로만"(sola gratia) 주어진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로마 가톨릭에서는 "은혜의 최우선주의"(gratia prima)을 주장한다. 이 두 가지 용어는 매우 비슷하지만, 엄청난 차이가 있다! 은혜가 최우선적이다는 말은 먼저 은혜를 받은 후에 사람의 의지가 작동해서 선한 생활을 유지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로마 가톨릭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가장 앞서는 요인이라고 주장하고 있고, 은혜가 제일 먼저 고려되어야할 선행적인 위치에 있다고 가르치고 있지만, 여전히 신인협력을 주장하는 반펠라기우스주의(Semi-pellagianism)를 강조하고 있다.
은혜에 근거하여 인간의 의지적 성취로 선행을 하게 되면, 공로를 쌓아서 의롭게 되고자 했던 것이 스콜라주의였다. 의로운 일을 행함으로 의인이 된다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에서 가르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덕과 행복의 절정을 이루는 자족적인 순수 관조를 강조하면서, 스스로 중용의 미덕을 발휘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헬라의 도덕철학이 스콜라주의에 혼합되어져 있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을 강조한다. 루터는 오직 은혜로만!을 강조하였고, 은혜야말로 칭의를 주시는 근거가 된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는데, 그 누구도 율법주의와 자기 우월감에 빠지지 말아야할 하나님의 조치라는 점을 성경에서 파악하였던 것이다. 루터는 1516년 가을, 의로움에 대하여 경이적인 깨우침을 성경에서 발견하게 되었다. 사람이 의로운 행동을 통해서 거룩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즉 성례에 참여해야만 의로움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우친 것이다.
그리스도의 의로움 자체가 우리를 의롭게 한다는 것을 루터가 알게 되었다. 중세시대에는 스스로 노력하는 방법만을 강조하였기에, 하나님께서 무조건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를 내려 주시는 것을 깨우치지 못한 것이다.
만일 인간이 스스로 노력과 고통을 통해서 의로움을 획득하는 것이라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실 필요가 없었다. 사람이 자신을 거룩하게 함으로써 의로운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의롭다하심을 받는 것이다. 이것을 루터는 로마서 1장 16-17절에서 깨우친 것이다.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선물로 주셔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전가시켜 주신다(imputation). 죄인으로 하여금 성령의 임재와 보호 가운데서 은혜가 작동하게 하신다. 죄인의 변화와 보호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단독적으로 작동한다. 은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단독 사역이다. 스콜라주의는 은혜의 신학을 변질시켰다. 중세 시대에는 은총의 교리는 세례를 받고 여러 가지 성례들에 참여하면서 주입되어지는 것(infusion)이라고 가르쳤다. 루터는 로렌조 발라의 저술을 통해서 스콜라주의자들의 은혜 주입설이 불가타 역본 속에 왜곡되어져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 "내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하는 구절을 은혜 주입설에 맞게 고쳐서 번역했던 것이다. 지속적으로 로마 가톨릭에서는 은혜가 성도의 내적인 본성 속에 채워지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율법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이 성도들에게 전가되는 것(imputation of active obedience)과 죄의 씻음이 주요 종교개혁자들의 성경해석에 공통적으로 담겨있다. 루터는 "우리를 위해서 그리스도가 율법에 대해서 순종하셨고 이것이 성도들에게 전가된다"고 밝혔다.
칼빈은 「기독교강요」 와 성경주석과 설교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매우 강조하였는데, 지식체계를 세우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와 올바른 경외심으로 구체화 된 "경건의 신학"을 세우고자했다. 칼빈은 성경 안에서 구원을 주시는 지식을 아는 것은 결국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죄인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양자가 되었고, 죄인들은 예배와 성만찬의 예식에서 은총에 대한 맛을 보면서 감격과 감사를 토로하게 된다.
하나님의 은혜를 근간으로 하는 칼빈의 구원론은 로마서 5장 19절에 대한 주석과 「기독교강요」 (최종판, 1559)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적극적 순종이 우리에게 전가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용납하신다는 해석으로 제시되었다.
오시안더가 그리스도인들 속에 그리스도의 인격이 주입된다고 가르치는 "본질적 칭의론"에 반대하여, 칼빈은 그리스도의 순종과 희생적 죽으심이 성도들의 의로움으로 간주된다고 반박했다.
칼빈은 로마서 5장 16절,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다"는 구절에서, 은혜의 개념을 명쾌하게 설명하였다.
"사도가 은혜를 죄와 대조시키고, 은혜로부터 흘러나오는 은사를 죽음과 대조시키는 것은 적절하다. 따라서 "은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비참함에서 건져내시기 위하여 그의 선하심 또는 사랑을 값없이 거저 베풀어 주시고 그 증거로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신 것을 의미하고, "은사"는 이 긍휼하심의 결과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 곧 우리로 하여금 생명과 구원, 의와 새 생명을 비롯해서 온갖 축복을 얻게 해주신 하나님과의 화해를 의미한다."
로마 가톨릭에서는 은혜를 정의할 때에, 사람들의 심령 속에 주어지는 하나의 속성에 불과하다고 가르쳤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근원으로 삼으시고,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충만으로부터 생명수의 은혜를 얻어갈 수 있도록 하셨다. 그리스도의 풍성하심으로부터 우리의 가련함과 결핍이 해결되어질 수 있는 것들이 흘러나온다.
은총의 교리는 훨씬 더 정교하고 광범한 주제에 연결되어졌다. 은혜가 주어지면, 죄인이던 성도에게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칭의는 성화와 뗄레야 뗄 수 없으며,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실행되어서 새로운 피조물로서 신분이라는 주어진다(고후 5:17). 은혜의 교리가 확장된 곳은 일반 세상에서의 일터였다.
칼빈은 "특별은총"과 "일반은총"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는데, 택함 받은 자녀들만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성도가 되고 기독교인으로 살아가게 된다. 그런 반면에, "일반 은총", 혹은 "보편적 은혜"를 통해서 사회에 죄가 억제되고, 여러 선한 일들이 증진되어진다. 일반 은총을 받아서 신앙적인 열망, 관대하게 남을 배려하는 행동, 사회적인 친밀관계를 유지하게 되고, 예술, 학문, 의학 등을 성취해 나간다. 보편은혜는 본질적으로 비구원적인 은혜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공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