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선영 칼럼] 마음의 외상을 수술하는 시간

김은애 기자  eakim@chtoday.co.kr   |  

▲강선영 박사(한국상담심리치료센터 대표, 한국목회상담협회 감독)

▲강선영 박사(한국상담심리치료센터 대표, 한국목회상담협회 감독)

몇 년 전, 아주대학교 외과의사 이국종 교수와 중증외상센터를 다룬 방송 몇 편을 본 적이 있다. 험악한 날씨에도 헬기를 타고 생사를 오가는 환자들을 위해 달려가는 진정성에 나는 깊은 감동을 받았다. 

"외과 이국종입니다. 제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가 의식이 없는 환자를 대신해 보호자에게 하는 첫 마디다. 자신의 말처럼, 그는 도무지 희망이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도 매 순간 믿기지 않을 만큼 최선을 다하는 의사였다. 또한 자신을 '지잡대 출신의 시골 병원 의사' 혹은 '병원에 적자만 안기는 쓰레기'로 표현하는 등 지독할 만큼 겸손하고 고뇌가 깊은 의사였다.

방송에서 그가 한 인상적인 말들이 있다. 어느 응급 환자의 수술을 앞두고 이 교수는 손을 씻으며 "내 손에서 끝장을 내야 한다. 내가 조금이라도 밀리면 환자분이 돌아가시고, 내가 조금 잘하면 환자가 살 수 있다"며 비장하고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 또 "어떤 때는 세상에 나와 환자 단 둘이 있는 것 같다. 다 죽어가는 사람을 수술방에 끌고들어가 살릴 때는 마치 지옥에서 사람을 끌어올리는 기분이 든다"며 한 생명에 대한 엄청난 책임감과 그로 인한 고독감을 표현하기도 했다.

최근 북한에서 넘어온 귀순 병사를 치료하며 또 한 번 이국종 교수와 그가 처한 외상센터의 열악한 처우가 언론에 부각됐다. 몇 년 전 봤던 방송에서의 모습보다 그는 더 야위었고 지쳐보였다. 그에 대한 의료계 안에서의 시기심과 여러 정치적 알력이 여전히 그를 힘들게 하는 것 같았다. 환자의 생명만을 살리길 원하는 의사가 겪고 있는 모질고 가혹한 현실을 보며 나는 결코 그가 느끼던 만큼은 아니겠지만, 한국 사회에 대해 또 한 번 깊은 절망감을 느꼈다.

그는 한 언론지 인터뷰에서 김훈의 '칼의 노래'를 좋아한다면서 한 글자도 놓치고 싶지 않다고 책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그가 외우고 있다는 저자의 말은 이렇다.

"나는 세상의 모멸과 치욕을 살아있는 몸으로 감당해 내면서, 이 알 수 없는 무의미와 끝까지 싸우는 한 사내의 운명에 관하여 말하고 싶었다. 희망을 말하지 않고, 희망을 세우지 않고, 가짜 희망에 기대지 않고, 희망 없는 세상을 희망 없이 돌파하는 그 사내의 슬픔과 고난 속에서 경험되지 않은 새로운 희망의 싹이 돋아나기를 나는 바랐다"

이 교수의 서늘하면서도 명료한 눈빛은 '희망 없는 세상을 희망 없이 돌파하는' 그 사내의 슬픔을 닮았다. 그러나 비관적일 수 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도 환자를 살리려는 애타는 진정성이, 오히려 그가 얼마나 희망적인 사람인지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고난 속에서 새로운 희망의 싹이 돋아나길 바랐다는 저자의 말처럼 말이다. 살 희망이 희박해 보였던 북한 귀순 병사가 소생하는 일주일 동안, 나는 귀순 병사와 이국종 교수를 응원하는 많은 국민들과 함께 그 희망 없는 희망과 함께 했던 것 같다.

오늘도 내 상담실을 찾는 사람들은 신체적으로는 멀쩡하지만 응급 수술이 필요할 만큼 처참하게 망가진 마음을 갖고 온다. 자살하기 전에 마지막 희망을 걸고 찾아왔다는 사람도 있고, 입으로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지만 곧 극단적인 선택을 할 것만 같은 사람도 있다. 그들은 몸이 아닌 마음으로 피를 흘리고 있는 환자들이다. 만약 내가 숙련된 외과 의사라면 ct를 찍고 배를 가르고 심장을 마사지하며 출혈을 멎게 할 수 있겠지만 이곳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사람을 살려야 한다.

심리적 수술실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방에서 나는 말을 통해 그 사람의 심리 상태를 진단하고 숨겨진 이면을 파악해 정확한 심리적 환부를 찾아내야 한다. 상담실에는 마취 주사가 없기 때문에 내담자들은 종종 자신의 가장 아픈 부위를 상담자에게 숨기거나 외면해 치료가 지연되기도 한다. 또 그런 자신과 세상에는 희망이 없다며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비관적인 말과 눈물을 쏟아내기도 한다.

세상 한 편에서는 자신의 몸을 학대해가며 사람을 살리는 의사가 있는가 하면, 또 다른 곳에서는 안에서부터 자신을 파괴하며 죽음을 원하는 사람들이 있다. 마음에 가해진 깊은 외상은 몇 번의 치료로 쉽게 낫지 않는다. 사는데 지장이 없다는 이유로 애초에 치료를 포기하거나, 치료에 대한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마음의 외상은 말 그대로 보이지 않는 마음에 피가 철철 흐르기 때문에 아무도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방치하면 죽음에 이를 수 있다. 이국종 교수는 자기 몸 안에 있는 피 1.5리터 정도가 빠져나가면 죽게 된다고 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작은 양의 피였다. 그리고 인간이 정말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 그 피가 다 빠져나갈 때까지 몸이 견딜 수 있는 시간이 약 1시간이라면, 마음이 견딜 수 있는 시간은 어느 정도일까!?

사람마다 크고 작은 마음의 상처를 갖고 있겠지만, 응급 상황에 처한 어떤 마음의 시간은 그리 많지 않을 수 있다. 오늘도, 내일도 간신히 생의 끈을 붙든 채 갈곳 잃은 마음들이 나의 이 '작은 치유의 방'으로 오고 있다. 그들에게는 피가 아닌, 희망과 위로가 수혈되어야 한다. 반사적으로 거부하는 그들을 달래며 설득하며 나도 함께 고통하고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알려주며, 치유되기까지 감정적인 혼란과 무수한 통증을 동반함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시름해야 한다.  

수술실에 선 의사와는 달리, 심리상담치료는 상담자의 힘만으로 치유가 이루지지 않는다. 상담자와 내담자는 서로를 도와주고 신뢰하며 치유의 길을 함께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거기에 신의 은총이 한 아름 더해져서, 그렇게 치유는 기적처럼 일어나는 것이다.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나 역시 너무나 지쳐서 스스로 수혈이 필요하며 새로운 희망과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아울러 이 땅의 모든 상담자들에게도 박수를 보내고 싶다. 당신이 힘을 다해 머물러주고 기다려준 누군가가 살아나고 치유되었다. 잠시 휴식하며 소진된 자신을 위해 충전해주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붉은 피가 철철 흐르는 외과 수술실과 보이지 않는 피를 철철 흘리며 고통에 울부짖는 소리 가득한 상담실, 너무나 다르지만 또한 너무나 같다. 마취가 된 환자와 마취약이 없어 고통을 그대로 느껴야 하는 마음의 외상 환자, 그들의 고통이 나의 폐부에 흘러들고 때로는 찔리고 때로는 같이 피를 흘리게 된다. 너무 힘들어 이제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이 올라오는 찰나, 살아나는 한 사람을 보며 기뻐하는 것 역시 닮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다시 힘을 내어 나아가게 된다.

그래서 상한 마음으로 나를 찾아와 치료를 결심하는 모든 내담자들은 그 자체만으로 고귀하고 용감한 사람들이다. 연말이 다가오는 지금, 나는 희망 없는 세상속에서도 한 줄기 희망을 꿈꾸며 치유를 결심하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지기를 희망한다. 내가 기나 긴 시간의 골목을 돌고돌아 치유를 이루었듯이, 지금 아픈 사람들이 결코 포기하지 않고 흐르는 피를 닦아내며 고통을 뚫고나가 자유로워지고 행복해지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기도하고 또 기도한다. 

치유와 따뜻한 동행 www.kclatc.com

~치유가 있는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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