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 특별기고: 옥성득 교수] 달력을 바꾸어 걸면서
한 해가 저물고 새해가 다가오면, 우리는 달력을 바꾼다. 달력을 바꾸는 행위는 과거나 지금이나 가장 중요하고 거룩한 의례의 하나이다. 헌 달력을 떼어내고 새 달력으로 교체하는 송구영신의 핵심은 낡고 묵고 더러운 시간을 청산 회개하고, 깨끗하게 비어 있는 새 시간을 겸허히 맞이하기 위해 근신하며 기다리는 자세일 것이다.
1. 역서(曆書)의 시대: 반복되는 의례와 길흉이 교차하는 점복의 시간
조선 시대 후기까지 한중일 삼국에서는 역서를 사용했다. 전기에는 대통력서(大統曆書)를, 후기에는 시헌력서(時憲曆書)를 사용했다. 이 역서들은 정부에서 인쇄해서 동지 무렵에 각 관청과 지방 관아에 보내고 개인적으로 역서를 발행하는 일을 엄격히 금해 나라의 시간과 달력을 통일했다.
역서의 첫 페이지에는 음력월의 대소, 월의 간지명인 월건(月建), 태양의 흐름에 따른 24절기(12절기와 12중기)를 표시했는데, 이를 월력이라고 했다. (이것의 번역어가 달력이다.) 조선시대까지 사용된 월력은 태음태양력으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음력은 '음력+양력(24절기)'이었음을 알 수 있다.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태양의 변화를 따라가는 24절기가 중요했기 때문이다.
19세기까지 사용한 한국인의 역서는 역년, 역월, 역일을 간지(干支)로 나타낸 세차(歲次), 월건(月建), 일진(日辰)에 금기와 점복 사항을 기록한 역주(曆註)가 있는 구주력(具註曆)이었다. 우리가 흔히 일이 잘 안 되는 날이면 일진이 좋지 않다고 말하거나, 어떤 날에는 이사를 가면 흉(凶)하다느니 어떤 날에 혼인하면 길(吉)하다느니 하는 식의 택일 점복이 바로 이런 역서를 가지고 오래 살아온 전통의 유산이다.
그런데 달의 움직임이 중요한 어부뿐만 아니라, 농사를 지었던 대부분의 조선 시대나 일제 시대 한국인, 그리고 오늘날까지 왜 음력을 버리지 않을까? (사실 개띠해도 음력설과 함께 시작한다.) 바로 역서에 나오는 그 다음 14장이 다루는 의례(특히 제사)와 관련된 일진과 금기와 길일을 다룬 해석인 역주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 왕실이 천주교를 박해한 것이 정부의 의례 통제권에 대한 도전(천주교의 제사 금지 = 유교 이념의 거부이자 정부의 통치권에 대한 도전) 때문이었듯, 양력을 강제로 시행하는 일제 총독부에 한국인들이 끝까지 저항한 이유는 바로 음력에 기초한 '의례 저항' 때문이었다. [이창익, "조선 후기 역서와 의례의 상호성에 대한 연구" <종교와 역사> (2006), 117-124.] 제삿날을 양력으로 바꾼 후에라야 양력 달력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이중 과세(過歲)를 하는 번거로움을 겪어야 했다.
물론 날과 관련된 금기 관념과 습관이 기독교가 안식일을 소개했을 때, 안식일의 금기와 연결되면서 하루 종일 근신하며 자신을 돌아보고 예배하고, 기독교 서적을 읽고 가족과 함께 보내는 날로 삼은 점은 긍정적 요소라고 하겠다.
2. 달력의 시대: 근대의 시작과 식민지와 건국의 굴곡된 시간
1894년 갑오개혁 이후 조선 정부는 1896년부터 공식적으로 태양력을 채택하고 연호도 건양(建陽)으로 바꾸었다. '대조선개국 오백오년력'을 발행했다. 1897년에는 '대조선 건양 이년 세차정유시헌력'이 발간됐다. 그러나 여전히 전통적인 역서의 내용을 갖추고 있었다.
달력의 효시: 개신교 조선성교서회의 달력, 1897년
이에 앞서 개신교는 1896년 12월에 1897년도 달력을 발행했다. 한 페이지에 한 해 열두 달을 표시한 최초의 달력이어다. 정부의 태양력 시행을 환영하고 지지하는 충군애국의 한 형태가 바로 달력의 발행이었다.
개신교회 교인과 학생들과 독립협회 회원들은 1896년 고종 탄신일과 조선개국 기념일을 기념하여 애국가를 작사하여 <독립신문>에 발표하고, 애국가를 부르면서 태극기를 흔들며 거리 시위행진을 했는데, 근대 시민단체로서 첫 공적 애국 시위였다. 1897년 10월에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후 <그리스도신문>은 1897년 말 고종 황제의 어진 사진을 구독자에게 주었는데 이것도 충군애국하는 같은 맥락이었다.
1896년 말 달력을 처음 만든 곳은 개신교 죠션셩교셔회(Korean Religious Tract Society, 1891년 조직, 곧 대한셩교셔회로, 이어서 대한야소교서회로 개칭, 현 기독교서회)였다. 1896년 12월 22일 <독립신문> 광고를 보자.
여기서 '언문 달녁(한글 달력)'이라는 말이 처음 사용되었다. '날마다 한 장씩'은 매일 읽을 성경의 한 장을 표시한 것이다. 미국 독립기념일과 같은 외국인의 명일(명절)을 표기한 것은 외국인과 선교사들이 그날 파티하고 놀았기 때문에 선교사뿐 아니라 한국 관리들이나 한국인들도 알면 유익했기 때문이었다.
가격은 15전으로 당시 백미 1되(약 1.6 kg)에 6-9전하던 시절이니 약 쌀 두 되 값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15,000원 정도). 대정동은 정동 외국인 지역으로 바로 정동제일교회 바로 옆에 있었다. (정동은 대정동과 소정동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빈턴 의원은 Dr. C. C. Vinton으로, 그는 당시 의료에 종사하기보다는 서회의 책 판매와 보관 담당자로서 서기 겸 회계로 일했다. 그는 책과 달력을 보급하는 책임을 맡았기 때문에 그의 집에는 서회의 보급소(창고)가 함께 있었다.
이보다 며칠 전에 영문판 독립신문 The Independent 12월 12일자에 달력 광고가 먼저 나갔다.
1897. BLOCK CALENDAR IN UNMUN
A scripture verse for every day of the year, Published by the Korean Religious Tract Society. The attention of those who intend giving a Christmas gift to Koreans is especially solicited. 15 cent per copy. C. C. Vinton, Custodian.
여기서 block calendar란 날짜별로 칸을 친 달력이다. 지금도 날짜별로 칸을 치고 매일 읽을 성경 장을 기록한 달력을 만든다. 다른 점은 당시에는 한 장에 12달을 다 표시했다면 지금은 한 장에 한 달만 표시한 게 대부분이다. 성탄절에 달력을 선물하는 풍습이 이때부터 비롯되었고, 달력에 매일 성경 읽기 구절 표시도 이때 시작되었다.
무엇보다 한 주간 7일에 '월화수목금토일'의 명칭을 붙인 요일이 도입되었다. 그리고 일요일을 붉게 표시하여 기독교 안식일(주일)을 쉬는 날로 표시했다. 다른 공휴일과 함께 일요일이 붉은 날로 표시되면서 일요일이 쉬는 날로 점차 인식되었다.
달력이 태양력을 소개하는 차원을 넘어, 기존 전통 역서의 점복 택일 사상을 거부하고 기독교 사상과 의례로 대체하는 수단이었음을 알 수 있다. 빈턴의 보급소와 종로의 서점, 그리고 권서(매서인)들이 기독교 전도문서(소책자)와 함께 이 달력을 팔고 보급했다. 유교의 역서 체제를 해체하고, 한국의 근대 시간 체제를 보급하고 확립하는 차원에서 조선성교서회의 달력 보급은 중요했다.
헐버트의 <사민필지>와 같은 지리서와 지도가 한국인의 공간 의식을 근대화시켰다면, 달력은 한국인의 시간 의식과 의례를 바꾸는 수단이었다. 음력 역서로 드리는 조상 제사를 예와 덕의 기초로 삼는 유교에서, 양력 달력으로 드리는 주일과 수요일의 하나님 예배와 기도를 기초로 하는 기독교로의 전환이 시작되었다.
곧 과거에는 음력에 따라 보름이 중요했고, 양력에 따라 한 달이나 열흘(旬)이 중요했다면, 이제 일주일이 중요한 시간의 단위가 되었다. 공사관이나 관청에서 일요일에 쉬고, 천주교회, 개신교회에 이어 동학 성전에서도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게 되면서, 1주일 개념과 일요일에 휴무 제도가 도입되었다.
나아가 부활절과 성탄절과 같은 새 기독교 절기가 도입되고, 미국의 독립기념일과 같은 미국 공휴일도 기념하게 되고, 선교사들의 여름휴가, 가을 연례회의 등이 지켜지면서 한 해의 리듬도 달라졌다.
여기에 성읍 도시의 성벽이 철거되던 1910년 전후에 도시 교회에 종탑이 세워지고 일요일 예배와 수요일 기도회 시간에 맞춰 종을 치게 되면서, 도성의 파루를 대신하는 소리 시간도 교회가 표현했다.
새벽기도회가 매일 기도회로 정착되는 1920년대에는 새벽마다 교회 종이 울리면서, 하루를 시작하는 시간도 예배당 종소리가 하늘을 열면서 시작되었다. 거룩한 시간, 질적으로 압축된 시간인 의례와 기념일의 시간이 근대화, 서양화, 기독교화되었다.
한편 일제 총독부는 서울 남산에서 한낮에 오포(午砲)를 쏘는 것으로 시간 소리를 지배하려고 시도했다. 대포로 상징되는 힘과 폭력의 시간이 일제시대 식민지의 시간이었다. 그것은 한낮에 하늘을 깨는 공포와 억압의 소리로, 시간의 단절을 가져왔다. 정오 12시와 함께 한국인의 시간은 멈추어 섰고, 포성과 함께 시간은 모래알처럼 공중으로 사라졌다.
비명과 같은 남산 오포에 비하면 명동성당이나 새문안교회가 울리는 일요일 미사나 예배를 알리는 종소리는 일주일의 주기를 지닌 순환하는 소리 시간이었다. 이제 안식과 평화의 시간이 돌아왔음을 알리는 질적인 시간 소리였다.
한 해를 한 눈에 보는 달력을 벽에 붙여놓고 지내던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 할아버지 등 뒤 벽을 차지한 그 달력 아래에는 1960년대 국회의원의 이름이 사진과 함께 크게 실려 있었다. 해방 이후에는 그렇게 정치가가 달력을 독점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70년대가 되면서 국회의원 이름 자리를 00약국이나 00상회가 차지하기 시작했다. 정치에 이어 상업이 힘을 가진 것은 그만큼 경제성장이 급속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와 더불어 70년대엔 시골까지 전기가 들어가고 흑백 TV가 나오자 저녁 드라마 시간에 맞추어 하루가 돌아갔다.
1980년대 칼러 TV 시대에는 일제시대 오포(午砲)처럼 저녁 9시에 '땡전 뉴스'가 역사의 시간을 거꾸로 돌리고 있었다. 정치에서 경제로 문화로 가던 시간이 다시 정치로 돌아갔다. 그러나 80년대 중반부터 다시 시간을 제자리로 돌리려는 민주화 운동이 가열차게 진행되었다.
3. 스마트폰 앱 캘린더 시대
1980년대 중반 무선호출기(삐삐)가 등장하면서 통신혁명 시대로 접어들었다. 2000년 휴대용 전화기가 등장하면서 진화에 가속도가 붙었다. 2009년에 안드로이드를 내장한 스마트폰 갤럭시가 나오고, 2010년 갤럭시 S, 2011년 갤럭시 S II, 2012년 세계 최초의 쿼드코어 스마트폰인 갤럭시 S III가 출시되면서, 달력도 앱으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이런 아날로그 달력의 디지털화는 120년 전 조선성교서회의 날짜를 칸 안에 넣은 block calendar의 개념과 시각화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시각을 시계로 시각화하고(아날로그나 디지털 형식), 하루 일주일 한 달 한 해를 달력으로 시각화한다. 일요일의 날짜를 가장 앞에 내세우고 붉게 칠해 놓는다. 그리고 하루하루 숫자로 표시된 날의 칸을 다시 분 단위, 시 단위로 나누어서 약속을 잡고 계획을 세우고 스케줄로 채운다.
120년 전에는 한 칸을 가득 성경구절로 채워 놓았으나, 지금은 할 일과 만날 사람으로 채워 놓는다. 새해가 온다. 말씀과 일과 사람이 함께 가는 날들로 채워 나가자. 120년 전 달력이 봉건 유교 의례 체제를 총체적으로 도전했다면, 오늘 우리의 달력은 타락한 한국 개신교의 의례와 신학 체제를 총체적으로 개혁하는 시간으로 채워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칸 채우기가 필요 없는 이들도 많다. 병실에서 지내는 분들, 나이 드신 분들, 어린 아이들, 취업 포기자들, 하루하루 사는 가난한 자들 .... 이런 달력이 없어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새해에는 거룩한 달력(시간)을 받을 수 있기를 빈다. 말씀과 땀과 웃음으로 나날의 시간을 채울 수 있기를 기도한다.
이제 한 해만큼 '주의 날'이 가까이 왔다. 채우는 시간만큼 비우는 시간도 중요하다. 욕망과 세속의 시간으로 채워진 모래시계를 돌려서 이제는 떨어지는 시간으로 채우는 것이 아니라, 가득 찬 비굴과 불의의 시간을 하나씩 버리는 한 해로 삼자. 한국교회 '골든 아워'의 해인 2018년이다, 올해가 다 가면, 모래시계를 뒤집을 기회가 사라질 것이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2018년 달력을 건다.
옥성득 교수(UCLA 한국기독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