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말 한국인의 몸 인식 변화와 개신교 의료 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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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로제타 홀 일기(전 6권)>를 읽고 (1)

▲완간된 전 6권의 모습. ⓒ홍성사 제공

▲완간된 전 6권의 모습. ⓒ홍성사 제공

◈전통: 신체관과 효도관이 연결되어 있었다

"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 立身行道 揚名於後世 以顯父母 孝之終也 ...<孝經>. 신체발부는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니 훼상치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다. 몸을 세워 도를 행하여 후세에 이름을 날려 부모를 드높임이 효의 마침이다."

여기서 '신체발부(身體髮膚)'란 몸과 사지와 머리털과 피부인데, 피부 앞에 머리털이 나올 정도로 머리카락이 중요했다. 그래서 1895년 12월 단발령이 내렸을 때 "내 목은 잘라도 내 상투는 못 자른다"며 의병이 일어났다. 영어로 표현하면 "To be, or knot to be. That's a question"이었다.

중국에서 범죄자에게는 오형(五刑)이라 하여 신체를 훼손하는 벌을 준 것도 이런 효도관과 연관된다. 오형이란 묵(墨), 의(劓), 월(刖), 궁(宮), 대벽(大辟)으로, '묵'은 죄명을 문신으로 얼굴이나 팔뚝에 새기는 것, '의'는 코를 베는 것, '월'은 발뒤꿈치를 자르는 것, '궁'은 불알을 제거하여 고자로 만드는 것, '대벽'은 목을 치는 참수형이었다.

조선시대 형벌도 중국을 따라 신체형을 가했다. 대역죄인에게는 목을 치는 참수형과 거열형(능지처참형)과 궁형, 이보다 더 인간적인 사형방법인 사약형, 신체 자유를 구속한 유배형이나 가택연금형(조선시대에는 오늘날과 같이 감방에만 가두어 두는 감옥형이 없었다. 그런 돈이 드는 감옥 자체가 없었다. 다만 미결수를 가두어 두는 전옥소가 종로에 있었다. 기결수가 되면 태형으로 처리하거나 자신의 돈으로 숙식을 해결하는 유배형을 내렸다), 신체를 괴롭게 하는 노동형인 징역형, 신체를 때리는 장형(flogging)과 태형을 가했다. 물론 부자는 장형과 태형을 돈(벌금형)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아무튼 신체를 망치면 불효자가 되므로 부모와 조상 앞에 다친 몸을 보이는 것을 큰 수치로 알았다. 당시 '불효자'라는 말은 1950년대 이후의 '빨갱이'나 '친일파'와 비슷한 말로, 조선 사회에서 사회적 따돌림을 당하고 매장되는 가장 혐오하는 욕이었다.

신체발부에서 머리털은 자라기 때문에 자를 수밖에 없었고, 부(피부)에 해당하는 손톱이나 발톱도 잘라야 했으므로, 그런 것을 금한 것은 아니다. 신체발부에서 발부라 하여 털이 피부보다 먼저 언급된 것은 더 중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남자의 경우 단군과 기자 이후 성인(成人)의 상징인 상투를 자르거나, 여자의 경우 혼인의 상징인 올림머리를 자르는 것은 큰 수치였다. 머리 패션은 쉽게 눈에 보이지만, 문신이나 피부 손상은 옷으로 가릴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당시 옷감 인두질이나 농사일, 성냥일, 사냥 등을 하면서 피부 화상을 입거나 상하는 경우는 흔했기 때문에, 머리를 보호하고 얼굴과 연관된 머리털을 더 중시한 듯하다.

따라서 중국인이나 한국인은 예수의 십자가 형틀에서의 죽음을 이해할 수 없었고, 혐오했다. 결혼도 하지 않고 후손 없이 신체에 창 자국, 못 자국을 가진 채 불효자로 처형된 자는 선인도 아니며, 더욱이 신이 될 수 없었다. 인류의 죄를 위해 살이 찢기고 피를 흘리고 몸을 준다는 것을 결코 수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마테오 리치는 <천주실의>에서 걸림돌이 되는 예수의 십자가형을 언급하지 않고 창조론과 신론에 치중했다.

◈근대적 신체관의 도입: 제중원의 첫 해 절단 수술

1884년 12월 갑신정변으로 중상을 입은 민영익을 외과수술로 살린 알렌의 수술 칼과 바늘로 한국 개신교의 문이 열렸다. 그 공으로 1885년 4월 첫 근대 정부병원(왕립병원)인 제중원이 세워졌고, 알렌은 원장이 되었다. 한국 정부가 서양 의학의 우수성을 인정하고 그 도입을 원하고 있었으나 재정 부족으로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렌은 외과의사로서는 경험과 교육이 일천했다. 당시 미국 의사 교육과정은 '일반대학+1년' 정도의 의료 교육이 전부였다. 물론 세 번 정도 시체를 놓고 해부 실습을 하고, 장 수술을 보면서 실습을 하기는 했다.

▲제중원의 진료실, 1885.

▲제중원의 진료실, 1885.

다행히 6월에 외과수술 전문의인 헤론 의사가 오면서 본격적인 수술이 시작되었다. 헤론은 미국에서 교수 요원으로 남을 수 있을 정도로 대학원 과정(졸업 후 과정)까지 마친 의사였다. 작은 수술은 알렌이 집도하고, 손가락이나 발가락을 절단하거나 눈 백내장 수술을 할 경우에는 헤론이 집도하면서, 첫 해에 성공적으로 수백 건의 수술을 시행했다.

일부 논문에서 1886년 4월 작성된 <제중원의 첫 해 보고서>를 보고 경험이 없고 자습한 알렌이 과감하게 시술한 것처럼 주장하지만, 그 보고서는 두 의사가 함께 썼다. 그래서 많은 문장의 주어가 '우리'이다.

헤론은 당시 최신 기술을 연마하고 파견된 최고 수준의 젊은 외과 의사였다. 그래서 그가 온 후 이루어진 수술에 대해서는 별 말이 없고 대부분 다 만족했다.

다만 한국어를 잘 할 수 없었기 때문에 환자와 충분히 소통하거나 상의하지 않고, 의료적 판단만으로 절단 수술을 했는데, 20대 외국인 의사로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도 병원에서 환자를 놓고 수술을 결정할 때, 의사의 전문적 판단에 맡겨야 할 경우가 많다.  

대부분의 한국인 환자들은 손발 절단 수술에 목숨을 걸고 반대했다. 손발 없이 죽으면 조상을 무슨 낯짝으로 대하느냐며, 차라리 손발을 가지고 죽는 게 낫다고 주장했다. 그러다 손이 아니라 팔이 다 썩었고, 목숨을 잃는 경우가 많았다.

알렌과 헤론은 한국인과 중국인의 이런 신체관과 효도관을 잘 알았기 때문에, 몇 번 설득하다 실패하면 손발 절단 수술은 포기했다. 그런 사람은 죽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손가락이나 발가락 수술 같이 작은 수술을 해서 손이나 팔을 구할 수 있을 때는, 환자에게 간단히 설명하고 바로 수술에 들어갔다. 환자들은 나중에 이를 수용하고 만족했다.

특히 첫 해 입원환자 중 매독 환자가 많았는데, 상당수가 20세 전후의 미혼 청년들로 항문 매독 환자는 대개 남창들이었다. 이는 1876년 개항 이후 인천과 서울에 늘어난 일본인 상인들이 한국인 청소년들을 사서 계간(鷄奸)한 경우로 보인다. 그 중 일부는 음경을 절단하여 치료할 수밖에 없었다.

이상과 같은 여러 경우나 헤론의 실력을 무시한 채, 경험도 없고 새파란 젊은 서양 의사가 서양 의학의 우월성만 믿고 한국인 환자의 의사(意思)를 무시하고 '오리엔탈리스트'로서 서양 신체관을 한국인에게 덮어씌웠다고 해석하는 것은, 푸코나 사이드의 이론에 젖어 그 프레임과 편견으로 보고서를 읽은 것밖에 되지 않는다.

◈셔우드 의사의 피부 이식 수술, 1890년 12월

<로제타 홀 일기> 2권을 보면 1890년 10월 14일 서울에 도착한 미국 북감리회 여성해외선교부 소속 셔우드 의사는 이튿날 15일부터 첫 여성병원인 보구여관(保救女館)에서 환자를 진료하기 시작한다.

(첫 여의사인 메타 하워드가 1888년 11월 보구여관을 개원했으나, 1889년 9월 질병으로 사임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일벌레였던 로스와일러 양은 셔우드가 오자마자 바로 병원을 개원하고 진료하도록 했다. 이 일로 두 사람은 얼마 동안 긴장 관계에 빠진다.) 이후 여러 차례 피부이식 수술을 하고 사마귀를 고치는 것 등으로 보아, 셔우드 의사가 피부과 치료에 소질이 있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로제타 셔우드 의사, 1890년. 한국에 파송될 때 뉴욕에서 촬영.

▲로제타 셔우드 의사, 1890년. 한국에 파송될 때 뉴욕에서 촬영.

셔우드 의사가 서울에 온 지 두 달이 채 안 된 1890년 12월 11일자 일기나 두 달이 막 지난 12월 22일자 일기를 보면, 한 소녀가 손에 심한 화상을 입었으나 처치를 제대로 하지 않아 손가락 몇 개가 손바닥에 붙어 있었던 내용이 나온다. 셔우드 의사는 손가락을 떼어 원래 위치로 보내고, 떼낸 자리에는 환자 팔에서 피부를 한 조각 떼어내 피부 이식 수술을 한다.

그러나 소녀는 더 이상 팔에서 피부를 떼어내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강하게 거부한다. 소녀의 신체관 때문이었으나, 셔우드 의사는 이를 소녀의 피부이식에 대한 인식 부족으로 판단했다.

한국어로 설명하거나 설득할 수 없었던 셔우드 의사는 소녀의 손바닥 피부를 재생하기 위해 자신의 팔에서 피부 몇 점을 떼어내 이식해 준다. 옆에서 돕던 보조간호원 봉선이 어머니가 기겁을 하고 말린다.

"손가락을 손바닥에서 떼어내 일일이 분리하면서 드러난 부위에 끌어당겨 덮었던 피부들이 처음에는 잘 아무는 것 같더니 거의 다 떨어져 나갔다. 이로 인해 속살이 훤히 드러났고 보기에 아주 흉했다. 그래서 나는 피부이식 수술을 시작했다.

먼저 환자의 팔에서 피부를 한 조각 떼어내 이식했다. 그러나 이식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던 환자는 더 이상의 이식을 거부했다. 그래서 내 팔에서 세 조각을 떼어냈고 좀 더 떼어내려 했다. 그러나 그때 환자 외에는 나밖에 없었고 병원 여직원(보조 간호원으로 일한 사라로 봉선이 어머니)도 극구 말렸다.

내가 피부를 떼어내려 할 때마다 어찌나 말리는지. 혹시 그녀 자신의 팔 피부를 좀 나누어 주려나 생각했지만 그건 아니었다. 그래서 일단 상처를 싸매고 로스와일러 양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들에게 피부 이식의 필요성을 통역해 달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한국 소녀에게 나의 피부까지 떼어주었다는 소문이 사방에 퍼졌다. (<로제타 홀 일기> 2, 1890년 12월 22일자)"

병원을 지키는 기수가 한 환자에게 셔우드 의사는 필요한 사람에게는 살까지 떼어 나누어 준다는 말을 하면서 소문이 퍼졌다.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다. 한국에서 소문만큼 빨리 퍼지는 것도 없다.

◈살까지 떼어주는 여자 선교사와 한국인 여학생: 근대 신체관의 변화 시작

1888년 여름 영아소동 때는 선교사들이 어린아이를 잡아먹는다는 소문이 났으나, 1890년 12월에는 보구여관에 온 새 여자 의사 선교사가 살을 떼어주었다는 소문이 장안의 여성들 사이에 급속히 퍼졌다.

"이후에도 나는 이 이야기를 여러 형태로 더 들었다. 우리 병원의 여직원 사라는 피부를 기증하기 전에 성경을 더 많이 읽어야겠다고 스크랜턴 부인에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한 일에 대해 사라가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이 기뻤다.

병원에서 나를 보조하는 소녀들은 자기 자매나 나를 위해서라면 몰라도, 낯선 사람을 위해서는 그럴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런데 여학생 봉업이는 피부를 주겠다고 자원을 했고, 미동도 않고 용감하게 견뎌냈다. 그리고 로스와일러 양과 벵겔 양이 자원했고, 환자 스스로도 자신의 피부에서 몇 조각을 더 이식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한 번은 오빠가 와서 보고는 자신의 피부를 조금 나누어 주었다.

이런 식으로 붕대를 갈 때마다 서너 조각의 피부를 이식하여 총 25-30조각 가량의 식피 수술을 시행했다. 이중에서 6-8조각이 살아나서 작은 살점을 만들었고, 각기 뻗어나가 다른 살점과 서로 연결되면서 피부를 여백을 채워 지금은 거의 모든 부분이 아물었다. 소녀는 감사의 표시로 며칠 전에 암탉 세 마리와 수탉 한 마리를 가져왔다.

그녀는 누가복음을 두 번이나 읽었다. 하루는 그녀가 자리를 비운 우리 병원 여직원을 대신해서 방문하는 환자들에게 성경을 읽어주고 있는 것을 보았다. (1890년 12월 22일자 일기)"

▲로제타 홀 선교사가 일기 속 직접 붙인 자료들. ⓒ양화진문화원 제공

▲로제타 홀 선교사가 일기 속 직접 붙인 자료들. ⓒ양화진문화원 제공

셔우드 의사, 봉업이, 이화학당의 로스와일러 양과 벵겔 양이 피부를 주었고, 이어서 환자의 오빠가 피부를 주었다. 여기서 우리는 이화의 여학생 봉업이가 먼저 자원해서 살을 떼어준 데 주목하게 된다.

과거 한국의 효행록에는 노모를 위해 살을 베어 주는 효자 이야기는 있었다. 그러나 1890년 말 서울 보구여관과 이화학당에서는 전혀 모르는 한 소녀에게 자신의 피부와 살을 떼어주는 일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환자의 오빠도 동참했다.

1895년 12월 30일 단발령으로 의병이 일어나기 5년 전의 일이었다. 1890년 12월, '신체발부'에서 먼저 '부'에 대한 인식이 변화되기 시작했다. 그 변화를 이끈 것은 한국의 첫 여성병원 의사 서우드(Rosetta Sherwood) 양과 이화학당의 여학생 봉업이었다.

◈언청이 수술로 일어난 변화

셔우드 의사는 1891년 3월과 4월에 네 차례 언청이 수술을 했다. 언청이인 줄 모르고 중매로 결혼한 남편에게 소박을 맞은 여인들이었다. 간단한 입술 수술로 여인의 운명을 바꿀 수 있었다.

성공적 수술 후에 두 명은 남편의 사랑을 회복했고, 한 명은 자신을 버린 남자를 다시 찾아가지 않고 궁궐에서 허드렛일을 했다. 고달픈 시집살이와 사랑 없는 남편을 떠나 홀로 살기를 시도했다.

참고로 1907년 국채보상운동 때 여자들이 머리를 잘라 팔아 의연금으로 헌금하기 시작했다. 1905년 일본에서 여자들이 전쟁 빚을 갚기 위해 머리털을 팔아 유럽으로 수출하고 나라 빚을 갚던 일과 유사한 행동이었다.

당시 유럽에는 여성들 사이에 풍성한 머리 패션이 유행했는데, 아시아 여성들의 긴 흑발로 만든 가발을 사용했다. 1890년의 피부 이식이 한 소녀를 사랑하는 여성 선교사들과 선교학교 여학생의 자원하는 작은 희생이었다면, 1907년의 여성들의 삭발 연보는 망해 가는 대한제국을 향한 애국의 행동이었다.

이로써 1890년 膚(피부)에서 시작된 신체관의 변화가 1907년 髮(머리털)로 확산되었고, 1920년대에는 신여성의 상징인 파마머리까지 할 수 있게 되었다. 한국 여성의 인권과 지위 향상의 상징인 피부와 머리 패션의 변화는 이후 100년 가까이 긴 장정에 들어서게 된다. <계속>

▲옥성득 교수.

▲옥성득 교수.

옥성득

현재 UCLA 인문대 아시아언어문화학과의 임동순·임미자 한국기독교학 석좌교수다. 서울대 영문학과와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장신대 신대원을 거쳐 프린스턴 신학교와 보스턴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기독교역사로 학위를 받았다.

저술로는 『마포삼열 자료집』 1-4권(책임편역), 『다시 쓰는 초대 한국교회사』(이상 새물결플러스), 『대한성서공회사』 1, 2권(1993, 1995), 『대한성서공회사 자료집』 전3권(2004, 2006, 2011), 『언더우드 자료집』 전5권(2005-2010), Sources of Korean Christianity(2004), 『한반도 대부흥』(2009), The Making of Korean Christianity(2013), 『첫 사건으로 본 초대 한국교회사』(2016), 『한국 근대 간호역사 자료집』 1, 2권(2013, 2017)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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