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욱의 ‘연애는 다큐다’ 52]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1
사람들이 자주 속는 것은 무언가 드러나고 까발려지면서 논의가 활발해지면 뭐라도 해결되는 것으로 착각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진짜로 주목해야 할 것은 개선이 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지금 피해를 고백한 여성들의 용기는 대단한 것이다. 하지만 가해자들로부터 법정소송을 당해보면 자신들의 용기를 후회할지 모른다. 법정 다툼은 돈 없는 자가 백 퍼센트 지는 싸움이다.
그래서 용기를 낸 것이 무효로 끝나지 않으려면 가시적 변화와 성과가 있어야 하는데, 단기간에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현재 상태에서 가장 효율적인 대처가 필요하다.
진정한 여성 인권은 구호가 아니다. 여성들이 듣기 좋은 말을 해서 '개념인'이라는 칭송을 듣는 것이 페미니즘 옹호는 아니라는 거다.
이번에 여성가족부 등이 논란에 적극 나서서 큰 역할을 해줄 줄 알았지만, 오히려 침묵하고, 평소 이슈를 선점해 주목받으려던 여성 의원들이나 여성인권단체들도 의외로 조용하다는 지적이 많았다.
왜 그런가? 어떤 이는 그랬다. 그런 단체나 인사들은 평소 여성인권을 이슈로 삼아 예산을 받아내고, 앞서가는 체하며 존재감을 드러내 왔는데, 남들이 시작한 이슈에 뛰어들어 뒤치다꺼리나 하자니 별로 생기는 게 없기 때문이라고.
자, 여성들은 진짜 내 편이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 여자라서 내 편이 아니다. 남자라고 다 적은 아니다. 그렇게 획일적인 생각이 이슈를 왜곡한다. 과연 누가 여성의 편인가. 인권을 내세운 신조어를 만들고, 선거철에만 여성 관련 예산 증액을 공약하는 자들일까?
사람을 알려면 그의 입이 아니라 발을 보라는 말처럼, 과연 누가 정말 귀가가 늦어지는 여동생을 걱정하며 시계만 쳐다보는 친오빠의 마음이냐는 것이다.
여성들은, 아니 우리 사회는 슬로건을 넘어 실질적인 대책과 변화를 도모해야 한다. 법이 아무리 많아도 매달 10명 남짓한 여성은 남편이나 남친, 전 남편과 전 남친에게 살해당하고, 더 많은 여성들은 폭행을 당하며, 죽음의 공포를 느낄 정도의 위협을 당한다. 성적인 학대나 범죄는 집계조차 어려울 것이다. #MeToo 해시태그를 달고, With you 캠페인에 동참하는 것도 좋지만, 실제로는 여성들의 피해를 줄여야 한다.
우선 우리 사회는 솔직해져야 한다. 여성의 인권이 대등하다는 듣기 좋은 말로 때울 것이 아니라, 여성의 인권은 영원한 한계가 있음을 알리고, 그 안에서 대책을 찾아줘야 한다.
아들은 늦게 들어와도 덜 걱정되고, 딸은 더 걱정이 되어 자꾸 잔소리를 하거나 야단치는 부모들이 많다. 이럴 때 왜 남녀의 귀가 시간이 달라야 하느냐고, 불공평하다고 따지기 전에, 현실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인권을 챙겨주기 싫은 게 아니라 실질적인 보호를 제공하기 위해서다. 물론 자기 아들이 문제를 일으켰을 때 피해자가 될 남의 집 딸을 생각 못하는 수준이라면 곤란하지만.
아무튼 똑같은 것을 제공하는 것은 '평등'이고, 합리적으로 조절해 주는 것은 '공평'이다. 평등하려면 여자도 군대에 가야 하지만, 그것은 공평하지 않은 것이다. 진짜 평등하려면 개인이나 집단의 취약점을 고려한 물리적 조치가 있어야 한다. 이것을 '불공평'으로 오해해선 안 된다.
한 예로 지하철에 왜 여성 전용칸이 있어야 하느냐고, 그런 특별대우는 받고 싶지 않다고 거부하는 진취적인 여성들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여권에 대한 상징성이나 어젠다 자체가 아니고, 우리의 딸과 아내와 어머니에게 불순한 남성들이 접촉하거나 촬영하거나 훔쳐보는 등 범죄의 타깃으로 삼는 것을 막는 일이다.
여기에 초점이 맞춰져야지, 여성을 왜 처음부터 약자로 취급하느냐는 식의 소모적인 논쟁은 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2
한 성폭력 상담사는 20여년 상담활동을 하고 은퇴했는데, 진행 중인 고소와 사건 해결을 위한 상담이 아니라 이미 벌어진 일의 후유증과 과거의 심리적 트라우마에 대한 상담이 업무였다고 한다.
그 분이 접하는 사연들은 듣는 사람이 힘들 정도로 안타까운 것도 많아 그야말로 '극한직업'의 하나라고 할 만하단다. 그런데 어차피 끝난 사건이라 다 들어주고 수긍해주며 마음을 다독이긴 하지만, 사실 여성 당사자에게 귀책 사유가 있는 사건도 적지 않다고 한다. 말하자면 지금 그 사건으로 소송을 하면 상대방 남성에게 재판을 이길 수 없는 일도 꽤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상처를 치유하는 게 목적이기 때문에, 다 지난 일의 잘잘못을 거론하는 것은 너무 가혹해 그저 다독이고 가해자들에 대한 정신적 복수에 맞장구치는 식의 상담을 하는 수밖에 없다고 한다.
성폭력 사건들을 보면 정말 억울하게 당한 일도 많지만, 어떤 때는 '왜 저길 따라갔지? 왜 처음 만난 남자와 술을 잔뜩 마시고 밤새 같이 있었지? 저런 정도면 허락한 거 아니야? 왜 같이 해놓고 이제 와서 문제가 된 거지?' 이런 생각에 미치는 일들이 적지 않다. 남성들의 위험에 비해 여성들의 경각심이 느슨한 일이 너무나 많다.
이렇게 말하면 또 발끈하는 여성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고를 막으려면 동등함을 지나치게 강조한 여성인권에 대한 시각을 좀 바꿔야 한다. 왜 우리가 피해야 하고, 왜 우리만 조심해야 하느냐고 반문하는 것은 마치 가난한 대학생이 '나는 동등한 국민이니 장학금 혜택 따윈 받지 않겠다'고 한다든지, 기초생활수급자가 '부당한 혜택은 나를 모욕하는 것'이라며 자존심은 챙겼지만 그 자신은 엄동설한에 연탄 한 장 없이 오들오들 떨다 죽는 것과 비슷한 일이다.
인권도 찾고 여성의 지위도 올려야 한다지만, 무엇을 위한 인권이고, 누구를 위한 지위냐는 말이다.
그래서 생각 있는 남자들은 말한다. 여성을 무시하지 않을테니, 제발 위험한 곳에는 가지 말라고.... 제발 아무나 믿지 말고, 남자를 경계하라는 충고를 고깝게 듣지 말라고 말이다. 아무리 말로 함께하겠다고 외쳐주고 여성 인권을 말해도, 당신이 필요할 때 없으면 무슨 소용인가.
그런 외침들이 장기적으로 여성인권 신장의 빛을 가져올 거대한 물결에 일조했다 한들, 그 과정에서 당신 같은 여성들의 희생이 누적된다면 그 또한 보람 이전에 비극이며, 그 한 사람에게는 모든 시대의 빛이 꺼지는 일 아닌가.
3
성과 없는 페미니즘은 결국 일부의 고군분투에도 불구하고 선거에 이용당하고, 황색 언론에 단기적 흥미를 제공하며, 성추행이 힘들어진 세상에서 틈새를 찾는 악한 남성들의 전략 수립을 위한 작전 노출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높아진 인식에 반비례하는 낮은 피해율이라는 성적표를 받아들지 못한다면, 그 사회는 진정한 페미니즘 구현에 실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성을 비하하고 상품화하며 저급하게 소비하려는 남자들의 문제는 심각하다. 이런 일도 바로잡아야겠지만 여성들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비난에 몸을 숙이라는 게 아니라, 스스로를 위해서 말이다.
지금 미투 운동 등의 움직임은 처절하고 불쌍하다. 폭로자들은 대개 경미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다. 적어도 진짜 폭행을 당한 사람들에 비해서는 그렇다. 진짜 당한 여성들은 나설 수 없는 상황.... 이것이 우리 여권의 현주소를 말해주는 것이다.
메시지가 좋아서 사람이 많이 모여도 구원받는 자들이 더해지지 않으면 좋은 교회가 아니듯, 좋은 구호와 개선을 외치는 이슈가 넘쳐나도 피해 여성이 줄어들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과연 이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처벌받을 사람은 받되 여성들도 페미니즘이 자신들을 구원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진짜 인권, 모두가 일괄적으로 동등한 것이 아니라 주어진 조건 안에서 누리는 자유가 진정한 자유이며 공존하는 길임을 아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남자에게 더 많은 자유가 있지만, 더 큰 책임이 있다. 어떤 면에서 여성보다 안전하지만, 남자로서 져야 할 짐도 많다. 여성은 취약하지만 그 나름의 장점이나 이득도 있다. 이런 것들을 고려한 맞춤형 자유와 권리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언제까지나 인권 문제는 다툼의 주제 이상을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남자는 남자대로 큰 책임을 느끼면서 더 큰 아량을 지녀, 이 모든 사태가 성숙한 문화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도록 애써야 할 것이다. 그런 분위기가 마련되려면 서로 간의 신뢰가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평등을 바라보는 시선의 문제, 여성의 적을 규정하는 문제, 긴 안목과 당면 과제를 취급하는 방식 등이 좀 더 성숙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마귀는 항상 불필요한 논쟁으로 병 주고 약 주면서 문제를 오히려 키운다. 그래서 여성의 인권은 키워야 할 대상이 아니라 바르게 성숙시켜야 할 대상인 것이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이런 문제들은 더욱 복잡해지고 흐트러질 확률이 높지만, 조금이라도 피해를 줄이면서 바른 목소리를 내는 크리스천들이 많아지면 좋겠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페미니즘이 아니라 진짜 여성을 살리는 인식의 변화가 이루어지길 바란다.
김재욱 작가
사랑은 다큐다(헤르몬)
연애는 다큐다(국제제자훈련원)
내가 왜 믿어야 하죠?, 나는 아빠입니다(생명의말씀사) 외 30여 종
www.woogy68.blog.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