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화요일(8일) 저는 충현교회에서 열렸던 총회 목사장로기도회 첫날 저녁 설교자로 섰습니다. 설교를 앞두고 이번처럼 신경이 곤두섰던 적이 없었습니다. 이유는 지난 번 국가조찬기도회 설교 때 느꼈던 긴장의 여운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도 최선을 다한다고 했지만 상황적 특수성뿐만 아니라 시간제한도 있어서 설교 하고 나서 참 아쉬웠습니다. 그런데 또 얼마 후에 목사장로기도회 설교자로 서게 된 것입니다. 특별히 이번 목사장로기도회는 우리 교단이 총신을 중심으로 하여 내부 소요 사태가 심각할 정도로 일어나서 목사님과 장로님들의 생각과 마음이 심란해 있었습니다. 일단 저는 편가르기 설교나 권위적이고 훈계적인 메시지를 전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어떻게든지 서로 흐트러진 마음을 봉합하고 전체를 아우르는 설교를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궁리해도 인간이 할 수 있는 스피치의 능력이나 수사학적인 기교로는 불가능 할 것 같았습니다. 오직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전체적인 설교 내용과 구상은 잡았지만 제목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놓고 기도하던 중 '퍼펙트 스톰'이라는 키워드를 잡아낸 것입니다.
퍼펙트 스톰은 위력이 크지 않은 둘 이상의 작은 태풍이 서로 충돌하면서 그 영향력이 가히 폭발적으로 커지는 현상을 말합니다. 보통의 태풍은 흔적이라도 남기는데 퍼펙트 스톰은 흔적조차도 남기지 않는 완벽한 폭풍입니다.
이런 퍼펙트 스톰이라는 키워드를 어떻게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사건에 맞게 적용할 것인가를 놓고 묵상에 묵상을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잠이 들려다 탁 떠올라서 불을 켜고 신들린 손처럼 설교문을 써내려 갔습니다. 그리고 계속 원고를 손 보고 또 손 보고 완성도를 높여갔습니다. 그런데 설교는 원고만 갖고 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성령께서 역사하셔야 할 뿐 아니라 여러 가지 현장 상황, 청중의 분위기, 보이지 않는 공기의 흐름도 설교에 작용을 합니다. 그런데 아닌 게 아니라 정말 첫날밤은 3천 명이 넘게 모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충현교회 강단에 처음 서본데다가 건물구조가 우리교회와는 완전히 다른 전통적 분위기였습니다. 아무래도 좀 어색할 수 밖에요. 거기다 조명등이 워낙 강하게 비춰서 땀이 비 오듯 줄줄 흐르고 그 땀이 눈으로 들어가 원고가 안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청중은 전혀 모르지만 한 두 군데 저만 아는 실수를 했습니다. 물론 그런 가운데도 청중들의 폭발적인 반응이 있었습니다. 설교가 끝나고 강단에 앉자마자 한꺼번에 문자가 수십 통이 폭주하는 것입니다. 거의 한 사람도 빠짐없이 전부 퍼펙트라는 용어를 쓴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퍼펙트 스톰, 또 어떤 사람은 퍼펙트 서먼, 퍼펙트 그레이스, 퍼펙트 프리칭 등 거의 다 퍼펙트라는 용어를 쓰며 은혜와 감동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대부분 목사님, 장로님들이 보낸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분은 "목장기도회 참석 중 이렇게 뜨거운 설교의 감동과 기도 분위기를 느껴본 적이 없다. 기도 시간이 너무 짧아 아쉬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문자는 그 다음 날까지도 계속 왔습니다. 문자뿐입니까? 만나는 사람마다 퍼펙트라는 말을 쓰면서 "어떻게 그런 제목으로 설교를 하고, 제목과 본문을 그렇게 잘 연결해 설교할 수 있느냐", 심지어는 기자들까지도 "소목사님을 다시 봤다. 정말 퍼펙트 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 마음에는 계속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렇게 스트레스를 받으며 기도하고 준비했는데도 표현의 한계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이건 저 자신만이 느끼는 아쉬움입니다. 설교 서두에도 이야기한 것처럼 이렇게 목장기도회에 많이 서면 능수능란해야 할 것이 아닙니까? 목장기도회 55회 가운데 최근 들어서 제가 첫날 저녁 메인 강사만 5번, 메인 강의까지 합치면 6번을 했습니다. 그것도 거의 해마다 연속해서요. 어느 기자의 표현처럼 목장기도회의 단골 강사고 우리 교단뿐만 아니라 한국교회 어지간한 중요한 집회는 거의 단골 강사를 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면 할수록 부족하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또한 설교가 끝난 후 좀 더 기도를 인도할 걸 하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아무튼 저는 역삼동의 하늘을 가르고 회개와 통회, 하늘의 거룩한 퍼펙트 스톰이 일어나는 그림을 그리며 강단에 올라갔는데 그 하늘의 퍼펙트 스톰이 소용돌이치려다가 만 집회는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설교를 하고 나서도 죄인처럼 느껴졌고, 그 아쉬움과 아픔은 지금도 가슴 속에서 가시지 않고 있습니다. 내가 좀 더 잘했더라면 진짜 성령의 퍼펙트 스톰을 일으킬 수 있었을 텐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