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연대 논쟁 왜 문제인가(4)
우주에 대한 인류의 생각
우주는 빛과 어둠 가운데서 늘 우리 인간에게 형언키 어려운 신비로운 감정을 불러일으켜왔다. 그 우주가 뿜어내는 광명과 암흑 가운데는 무언가 질서가 있다는 것도 인간은 알아냈다. 그리고 그 질서와 현상들에 대해 일관되게 이해할 수 있는 방법과 틀은 없을까 인간은 끊임없이 고민해 왔다. 세계의 신화는 의인화된 신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동양처럼 음과 양의 두 가지 상극의 힘으로 우주의 영원한 상호 작용을 설명하려 들기도 했다. 이렇게 대부분의 인류가 우주에 대해 신화적 세계관이나 순환 논리적 우주관에 머물러 있던 반면 성경은 온 우주는 창조주 하나님의 작품이라고 일관되게 선포하고 있다.
성경적 세계관과 현대 과학의 출발
그 성경의 복음과 세계관이 유럽에 먼저 정착하였다. 따라서 중세 유럽인들은 우주가 창조주 하나님의 법칙에 따라 운행된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 유럽에서 진정한 의미의 현대 과학의 발전도 시작되었다. 우주의 기원과 구조에 대한 과학적 성과도 이들 과학의 발전과 그 궤도를 함께하여 왔다. 일정 기간 성경적 세계관·우주관과 과학적 천체 해석이 함께 병행하여 온 셈이다. 로마 카톨릭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1224/5-1274)가 아리스토텔레스(주전 384-322)의 자연 신학을 수용하면서 로마 카톨릭 중심의 유럽 세계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에 토마스 아퀴나스의 기독교 세계관이 결합하여 발전되고 수정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그 발전과 수정의 역사에 지동설을 주장한 폴란드 출신의 천문학자요 사제(실질적 신부)였던 니콜라스 코페르니쿠스(1473-1543), 망원경을 발명하여 우주를 관찰하고 목성의 위성을 발견한 수도사가 되고 싶었던 갈릴레이(1564-1642), 한때 목사가 되고 싶었던 행성의 운동을 관찰한 천문학자 요하네스 케플러(1571-1630), 과학 연구보다 성경 연구를 더 즐겼음에도 불구하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하여 천체 운동을 과학적으로 설명한 천재 과학자 아이작 뉴턴(1642-1727) 등은 천체 연구에 지대한 공헌을 남긴 과학자들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신앙과 자신들의 과학 연구 활동 사이에 어떤 충돌이나 고민이나 장애를 별로 느끼지 않았다. 이렇게 우주와 천체 연구도 다른 자연 과학 분야처럼 끝없는 발전과 수정을 거듭해 온 역사라 할 수 있다.
현대 우주 기원론과 젊은 창조 연대
우주와 천체 연구도 다른 자연 과학 분야처럼 끝없는 발전과 수정을 거듭해 온 역사라 볼 때, 우주 기원론 연구가 창조의 젊은 연대 주장에 우호적 결과들을 도출해 내었는가? 그렇지는 않다. 우주 기원론은 젊은 창조 연대에 결코 우호적이지 않다. 이 부분을 좀 더 살펴보자.
우주의 광활함이 젊은 연대에 우호적인가?
우주는 수많은 은하(Galaxy)들로 이루어져 있다. 아마 최소한 1천 억-4천 억 개의 은하가 있을 거라고 알려져 있다. 어쩌면 그보다 더 많을 지도 모른다. 그 수천 억 개의 은하 가운데 우리 태양계는 은하수(Milky Way)라는 이름을 가진 은하(Galaxy)에 속한다. 여름밤 시골 툇마루에 누워 하늘을 보면 하늘의 정중앙에 온통 우유를 쏟아놓은 듯한(무언가 뿌려놓은 듯한) 모습을 볼 수 있다. 흰 우유가 아니라 이들 모두가 태양과 같은 별들이다. 이 별들의 숫자만 약 1천 억 개에 달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 은하 안에 우리 태양계가 속한 것이다. 이런 1천억 개의 별을 가진 은하가 우주에는 1천 억-4천 억 개 있다는 이야기다. 우리 은하인 Milky Way 은하를 벗어나 위성 은하(왜소 은하)가 아닌 제대로 된 은하를 만나려면 240만 광년을 가야 4천 억 개의 은하 가운데 겨우 하나를 만나게 된다. 바로 지구에서 볼 때 북쪽(북극성) 방향에 있는 안드로메다(Andromeda) 은하(Galaxy)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준비 중이신 하나님께서 이렇게 어마어마하게 방대한 우주를 일부러 구성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의 그 위대한 섭리를 다 알 수 가 없다.
태양계 밖에서 지구와 비교적 가까운 별인 켄타우루스 알파도 빛의 속도로 4.3년 걸리는 거리에 있다. 북반구에서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별 가운데 가장 큰 별인 시리우스는 그 직경이 태양의 2배에 달한다. 전갈자리의 안타레스는 230-700배, 한겨울 새벽 기도하러 나서면 남쪽 하늘에서 밝고 붉게 빛나며 반기는 오리온자리의 베텔규스는 556배에 달한다. 지금까지 실제로 발견된 가장 큰 블랙홀은 처녀자리 M87 은하 중심부의 것으로 질량이 태양의 약 63억 배에 달한다고 한다. 그런데 지난 2011년 12월, 버클리 캘리포니아대학 연구진은 지구에서 3억 광년 이상 떨어진 사자자리 은하단 안의 가장 밝은 은하 NGC 3842 중심부에서 질량이 우리 태양의 97억 배인 블랙홀을, 3억 3천 500만 광년 떨어진 머리털자리 안의 가장 밝은 은하 NGC 4889 중심부에서 이와 비슷하거나 더 큰 블랙홀을 발견했다고 <네이처>에 발표했다. 그렇다면 지구의 수십조 배나 되는 별이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태양의 위치에 전갈자리의 붉은 별 안타레스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안타레스의 직경은 화성 궤도까지 집어 삼킬만한 크기이다. 그렇다면 블랙홀은 도대체 얼마나 큰 천체란 말인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크기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과연 창조주께서 어리석고 미천하기 짝이 없는 왜소한 우리 인류에게 무엇을 보여 주시려고 이렇게 방대한 우주를 만드시고 인간은 작은 행성 지구의 에덴동산에서 추방하셨단 말인가!
겨우 6천 년 전, 오직 단순하게 비천한 인간에게 무한하신 창조주를 계시하기 위해 이렇게 상상을 초월하는 천체를, 그것도 인간이 여행이나 탐색할 가능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은하수 밖에도 그 많은 천체들을 왜 만들어 배치한 것인가? 도대체 무의미하게 무엇 하러 그렇게 크게 만드셨을까? 한두 개도 아니고 지구의 총 모래와 먼지를 합친 숫자보다도 더 많은 항성을 왜 배치하신 걸까? 지금과 같은 우주에 대한 정보가 제대로 알려진 것은 수십 년도 되지 않는다. 태양계와 같은 행성 시스템이 다른 곳에도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은 겨우 1990년대 중반이었다. 즉 지난 6천 년 간 우리 인류는 우주의 그런 광활한 구조에 대해 전혀 몰랐다는 이야기다. 수천 년 간 우리 인류 아무도 모르고 지내온 그런 우주를 왜 만드셨단 말인가. 정말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기꺼이 모두 버리고 재 창조하실까? 아니면 성경이 말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은 재 창조가 아니라 재 갱신이라는 의미일까? 인간은 알 수 없다.
천문학은 무의미한 학문?
성경의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요 모든 바른 학문은 하나님의 진리를 반영한다. 그런데 늘 발전하고 수정을 거듭해 온 천문학과 우주론을 전면적으로 배격하고 젊은 창조 연대를 주장하는 <창조과학> 식으로 해석하면 이들 우주의 구조에 대한 설명이 불가능해진다. 젊은 연대는 상상을 초월하는 우주의 광활함이나 상상할 수 없는 항성의 크기를 설명하는 데 불리하다. 미시 세계(생명체)의 질서와 최적화와 조화와 대비할 때 방만할 정도로 큰 천체의 상대적 광활함이 젊은 연대로는 잘 설명이 되지 않는다. 왜 금새 타락하여 우주적 붕괴가 일어날 그 광활한 천체를 그렇게 크게 만드셨단 말인가. 그래서 우주물리학이나 천문학이야말로 가장 무의미한 학문이라는 말이 일부 <창조과학> 운동가들 입에서 나오는 것은 아주 자연스런 현상이다. 심지어 개인적인 자리일 경우 창조과학자들 입에서 겉보기는 수 십 억년 돼 보일 지라도 실은 수많은 별들이 대단히 가까운 거리에 있을 거라는 반과학적 발언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은 우주의 광활함을 설명하는 데 6천 년 창조 연대 교리가 지니는 핸디캡 때문임을 스스로 반증하고 있다.
우주 기원론도 변한다
모든 과학적 이론들이 발전과 수정을 거듭해 온 것처럼 우주 기원론도 발전과 수정을 거듭해 왔다. 하지만 그것이 젊은 창조론을 증거 하는 데 유리하는 쪽으로 변화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절대온도(K)를 발견하고 강력한 반 진화론자였던 본명이 윌리엄 톰슨인 캘빈 경(1824-1907)은 지구의 나이를 1억 년 정도로 추산(1855)하였는데 1862년 2400만 년으로 낮추었다가 다시 4천만 년으로 수정(1897)하였다. 이 같은 연대 추정은 진화가 가능하기에는 전혀 충분치 못한 연대였다. 캘빈은 반 진화론자였다는 것을 기억하라. 과학은 이렇게 유동적인 것이다. 방사능이 발견되기 3년 전인 1893년 윌리엄 맥기(William McGee)는 선캄브리아기의 침전물을 연구하여 지구 나이가 1천 만년에서 5조년 사이라 보고 대략 60억 년을 제안하였다. 이는 오늘날 지질학자들이 지구 추정 연대라고 주장하는 45 억년 내외와 크게 다르지 않다. 지구의 나이를 10억 년 단위로 연장한 것은 레이레이(Rayleigh)였다. 이후 지구 나이 45억 년을 최초로 제시한 지질학자 아더 홈즈(A. Holmes)는 처음에는 지구 나이를 20억 년이 결코 넘지 않을 거라고 보았다(1913년, 1927년 16억, 1937년은 17억 5천만년). 이후 그는 지구 나이를 33억 5천만 년(1947)에서 45억 년(1956)으로 연장하였다. 과학의 이론이 변하듯 이렇게 우주의 연대 논쟁도 늘 유동적이다. 그렇다고 과학의 유동성을 젊은 창조 연대의 증거로 삼는 것은 과학적이지도 않고 성경적이지도 않음을 명심해야 한다.
우주나 지구의 연대 문제뿐 아니라 우주 기원론도 변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종합적 철학적인 우주관을 거쳐 아인시타인이나 1950년대 중반 당대 최고의 천문학자였던 영국 캠브리지 대학의 프레드 호일(Fred Hoyle) 등은 우주는 큰 변화 없이 일정하다는 정상상태 우주론을 폈다. 프레드 호일은 팽창 우주설(일명 빅뱅 우주론)에 대해 "와장창설"이라고 비웃기까지 했다. "팽창 우주설"을 일명 "빅뱅 우주론"이라 비하해 부르는 것도 프레드 호일이 영어로 "big bang idea"라는 말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지 가모브가 우주배경전파(배경복사, background radiation)를 예측(1948)한 이래 벨 전화연구소의 펜지어스와 윌슨이 관측을 통해 이를 확인하고 1978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게 된다. 가모브가 공동 수상자가 되지 못한 것은 오로지 그가 1968년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이들 노벨상 수상자들이 예측한 에너지는 절대 온도 약 3K였다. 미 항공우주국(NASA)은 1989년 코비(COBE) 인공위성을 띄워 놀랍게도 이전 관측값과 거의 일치하는 절대 온도 2.725도를 밝혀냈다. 코비 관련 연구는 2006년 나사의 존 매더와 캘리포니아 주립대 버클리 캠퍼스의 조지 스무트에게 노벨상을 받게 하였다. 이후에도 우주 팽창과 관련된 연구는 노벨상 수상자들을 쏟아내고 있다.
우주의 생성과 운명에 대해 앞으로 어떤 결말이 날지 우리 범인들은 명확하게 추정할 수는 없다. 우리만 그런 게 아니다. 전문학자들도 아마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인시타인도 그랬다. 그런데 아인시타인은 생전 자신의 정상상태 우주론이 틀렸음을 솔직히 인정하였으니 그는 정말 탁월한 학자임에 틀림없다. 과학은 발전 과정에서 이렇게 늘 수정되고 변하는 것이다. 그 변화한다는 원칙이 바로 과학의 본질이다. 따라서 하등학문인 과학을 도구로 초월 계시인 성경의 창조 연대를 함부로 규정하지 말아야 한다.
성경의 창조를 믿는 것과 젊은 창조 연대를 믿는 것
성경의 창조와 창조주 하나님을 창조계시로 믿는 것과 젊은 연대를 창조계시로 믿는 것은 전혀 차원이 다르다. 유동적인 내재의 과학을 초월적 성경 계시의 판단 도구로 삼으면 안 되는 것이다. 늘 유동적인 기원론의 연대는 반증(反證)에 능한 과학자들의 바른 판단에 맡겨 놓으면 된다. 그것이 맘에 들지 않으면 스스로 전문 천문학자가 되어 전문가들을 상대하고 논문으로 관련 학자들을 설득하면 된다. 그러나 그것을 성경 계시라고 우기면 안 된다.
구원의 복음은 단순 명료하나 창조 계시 속에서 살아야 하는 구원의 삶은 단순하지가 않다. 미시 세계이든 거시 세계이든, 초월의 세계이든 내재의 세계이든, 때로는 정밀하고 때로는 광활하고 때로는 깊다. 6천년이라는 개념은 신앙을 단순화 시키고 신앙의 맹신화로 이끌 수 있다. 내재의 세상 연구는 내재의 학문인 과학 연구에 맡기고 초월의 신비는 초월의 계시 속에서 해석한다. 이것이 과학이 아닌 신앙의 선배들이 수천 년을 이어온 신앙의 신학이다. 신묘막측하고 광활한 우주를 인간의 두뇌로 감히 판단할 수 없는 것처럼 젊은 창조 연대든 오랜 창조 연대든 서로 공격하거나 정죄하지 않고 대화의 가능성을 열어놓는 것이 성경적이다. 충돌이 생기고 이해가 쉽지 않은 것은 바른 해석자가 등장할 때까지 겸손히 기다리는 자세가 바른 자세이다. 이것이 창조과학이 아닌 성경적 창조 신앙을 가져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조직신학, 평택대 신학과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