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우주만물을 ‘어디에서’ 창조하셨을까?(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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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윤 박사의 창조론 다시 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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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케노시스 창조이론과 올바른 창조론

종교개혁 이전에 기독교는 신학이 토라의 전통에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부활 사건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초대 교회 교부들은 대부분 사도들의 신학을 제대로 전수할 겨를이 없었고, 로마가톨릭에서는 하나님의 지상 대리자를 자처하면서 성경의 해석권을 독점한 교황이 자신의 하나님의 토라적 절대 권력을 약화시킬 의사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종교개혁자들은 성육신과 부활 사건의 중요성을 인식하였으나, 창조 사건의 의미와 연결시키는 일에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 종교개혁의 주제는 칭의 교리였기 때문이다. 개혁교회에서는 종교개혁자들의 칭의론에 매몰되어 창조론의 발전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문제는 무소불위의 권능을 행사하시는 창조자 하나님은 토라에서 독재자로 인식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심판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익을 보려는 일부 교회의 지도자들은 창조자를 토기장이에 비유한 성경 구절들(렘 18절, 롬 9절 등)을 인용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토기장이가 자기 마음에 안 드는 그릇들을 깨버리는 것처럼, 또는 노아의 홍수 사건을 종말적 심판처럼 설명하고 순종을 강요했다. 이런 해석은 해당 성경 구절의 의미를 지나치게 확대 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일반 기독교인들은 이런 해석과 설교에 대해 지레 겁을 먹고 아무런 이의도 제기하지 하지 못하고 순종했다.

빌립보서 2:7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부활 사건을 하나님의 비하(卑下)로 설명하고 있다. 바울이 말한 '자기 비움'은 죄악에 빠진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으로 태어났다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인간으로서의 부활과 승천을 몸소 보여주신 것을 의미한다. 루터파 개혁신학자들이 이를 '자기 비움'이라는 중요한 기독론적 개념으로 발전시켰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은 아담의 창조 사건에 공명(共鳴)될 수 있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창조론의 패러다임에 획기적 전환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다. 기독교 창조론이 무신론적 진화론의 공세에 밀리고 있을 때에도, '자기 비움'의 의미를 기독론에만 한정했던 기독교 신학자들은 속수무책이었다. 이 무렵 기독교의 전통적 창조론과 관련하여 문제점을 비판하는 과정신학자들이 등장했다. 과정신학자들은 하나님이 창조자이면서 도덕적 심판자라는 사실에서 발생되는 모순을 지적했다. 사실 완전한 창조자가 도덕적 심판자가 된다면, 자기 잘못을 자기가 심판하는 것이 아닌가? 카발라에서처럼 창조가 불완전한 것이라고 한다면, 회복(티꾼)하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카발라는 물질적 세계의 왕인 인간이 생명나무의 빛의 길을 따라서, 창조자와의 소통과 합일에 의해서, 다시 천상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고 설명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런 구원의 과정이 자기를 통하는 길밖에 없다고 설명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설명을 그대로 믿는 사람들이 진정한 크리스천이다.

기독교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언행에서 근거를 마련해야 한다. 그런데 기독교는 토라와 신약성경을 모두 경전으로 삼고 있다. 토라와 신약성경을 비교해보면, 모세와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는 창조자 하나님에 대해 견해의 차이가 매우 크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예수는 표면적으로는 토라를 그대로 인정했지만, 내용에 대해서는 해석을 바꾼 것이 많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사실상 유대교의 토라를 개혁한 종교라고 보아야 한다. 루리아의 찜쭘 이론은 고대 카발라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제안한 것으로만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사실 찜쭘 이론은 유대교의 토라를 개혁하는 것이었다. 앞에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현대 유대교 랍비들이 『모세오경 미드라쉬의 랍비들의 설교, Searching for Meaning in Midrash: Lessons for Everyday Living』를 출판하고, '토라를 오늘과 연결시켜라. 토라 속에서 깊이 침잠한 뒤 밖으로 나와 우리의 삶과 이 세계 속에서는 무엇을 말하는지 생각해 본다. 그렇지 않다면 무엇 때문에 읽는가?'라는 등의 '토라를 해석하는 13가지 지침'을 발표한 것도 루리아의 개혁정신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 지침에 담긴 뜻은 토라가 오늘과 연결시켜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면, 토라는 오늘날 읽을 가치가 없다는 뜻이다. 비록 그것이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것으로 믿는 토라일지라도.

위르겐 몰트만은 루터파 신학자들의 '자기 비움' 기독론과 루리아의 찜쭘 이론에서 케노시스 창조론을 발전시켰다. 케노시스 창조론은 토라를 바탕으로 하는 기독교의 전통적 창조론과는 달리, 하나님이 창조를 위하여 자신의 한구석을 비워서 피조물이 존재할 공간을 마련했다고 설명한다. 그 공간은 하나님의 바깥이지만 또한 안에 있는 것이기도 하다. 전통적인 기독교 창조론은 하나님이 그의 바깥에서 창조를 하셨다고 한다. 하나님이 자기를 비워 만든 공간에서 창조를 하셨다면, 창조 사건에서 장소의 의미는 엄청나게 달라진다. 토라에서 하나님은 유일하신 창조의 신이시며, 피조물에 대해 초월자라는 독점적 속성을 가지고 계신 분이다. 그런데 케노시스 창조론은 '찜쭘 이론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피조물인 타자(他者)에게 거주할 공간을 마련해주심으로써 그의 신적 초월성을 제한하셨다고 본다. 몰트만은 케노시스 창조론을 '생태학적 창조론'이라고도 부른다. 그의 생태계에는 자기를 제한하신 창조의 신이 피조물과 공존하고 있다. 따라서 케노시스 창조론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스스로 그의 신적 속성을 어디까지 제한하셨는가?'와 같은 질문들이 제기되지 않을 수 없다. 케노시스 창조론이 기독교에서 찬반양론(贊反兩論)을 야기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조상들로부터 히브리어로 된 토라와 탈무드(미드라쉬), 그리고 카발라를 유산으로 물려받은 유대인들조차 하나님의 창조 사건을 해석하는 방법과 내용이 서로 다르다.  학문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종교에서도 개혁가들이 과거의 해석적 오류를 개혁함으로써 발전했다는 사실은 동일하다. 기독교는 유대인들이 물려받은 고대 문헌들을 읽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해석해야 한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토라의 창조론과 카발라 창조론은 이제 역사적 참고 자료로서의 가치밖에 남아 있지 않은 것 같다. 더욱이 그것들은 우리의 현실 인식과 너무나 동떨어진 수준이다. 역사적 자료는 원본(또는 원문)을 보존하되 시대에 맞게 해석을 바꿀 필요가 있다. 그것이 바로 개혁이다.  작은 오류를 바로잡는 작은 개혁은 때와 장소를 가릴 이유가 없다. 일부 기독교인들이 작은 개혁조차 거부하는 것은 자기를 비우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우리나라에서 카발라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성향은 윤회를 믿는 불교인들 쪽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기독교인들 중에서도 몸이 죽은 뒤에 부활과 승천의 길-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최후의 목적으로 삼는 사람들이 카발라에 관심을 갖는 경향이 있다. 올바른 창조론은 그런 관념적인 문헌들을 근거로 추상적인 관념을 연구하는 것이어서는 아니 된다. 그런 창조론을 아무리 만들어도 사실과는 다르다는 점이 곧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은 결국 고전적 문헌 해석만으로는 올바른 창조론을 서술하기 어렵다는 점을 일깨워주고 있다. 두 눈으로 확인하는 사실적 자료에 기초하는 창조론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지만, 더 근본적인 문제는 인간이 그런 방법으로 창조의 사건을 확인할 수 없다는 점이다.

최근에 토마스주의적 전통 신학을 비판하는 서구의 현대 신학자들은 다각도로 통합적 연구의 길을 마련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그 결과 복음주의 신학 계열과 자유주의 신학 계열이 공동으로 연구한 자료들을 출판하고 있다. 이것들을 종합해보면, 결국 신학적 지향점은 같은 것으로 드러난다. 그들은 또한 토라와 카발라에 대한 연구는 물론 철학과 신학까지 다각도로 연구하여 『케노시스 창조이론』이라는 책으로 엮어 내놓았다. 과학신학자들까지 대거 합류함으로써 케노시스 창조 이론은 현대창조론의 중심에 빅 텐트를 마련하고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학에서 케노시스 창조 이론과 관련하여 제기되는 몇 가지 쟁점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1) 전능하신 신이 굳이 그의 신성을 훼손하면서까지 창조를 해야 했는가?
토라의 창조자인 고전적 신의 속성은 전능자(全能者)이다. 그러나 타자를 허용하는 창조는 그의 전능성 일부를 포기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현대신학은 창조자와 인간의 관계에서 불완전한 상대성을 발견했다. 그렇다면 어느 수준의 상대적 관계를 설정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2) 우주의 질서는 물리적으로 완벽하게 작동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진화론은?
물질적 결합체인 우주와 그것의 인과관계를 설명하는 물리법칙은 거의 완벽화게 작동하고 있다. 그러나 무신론적 진화론은 그것이 주장하는 것과는 다르게, 물리법칙과 생명법칙이 연결되는 지점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그런 사실은 명백히 창조자의 존재를 함의하고 있다. 그럼에도 과학은 이를 '무지의 오류' 또는 '틈새의 신' 논리에 의한 것이라고 부정한다.    

(3) 전능한 신이 완고한 도덕적 심판자라면, 어떻게 악의 공존이 허용되는가?
악의 존재가 도덕적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증거로 이용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제기된 신정론(神正論)의 문제는 생명체의 역사와 현실에서 수없이 나타난 고통과 멸절, 그리고 인간들의 악행에 신의 개입이 없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전능한 신이 완고한 도덕적 심판자라면, 현실적으로 악의 존재가 어떻게 가능할까?

(4) 창조된 세계에 종말이 있어야 하는 것인가?
전능한 신이 세계의 창조자라면 그는 세계에 종말이 오도록 창조할 이유가 없었다는 점에서 이런 의문이 제기되었다. 세계의 종말은 신이 세계를 더 이상 유지할 능력이 없어서인가? 아니면 신에게 세계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아서인가? 현재의 세계가 유지되고 있는 것은 세계의 종말을 막기 위해서 신이 창조를 계속하기 때문인가?

▲허정윤 박사가 자신이 쓴 책 「과학과 신의 전쟁」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크리스천투데이 DB

▲허정윤 박사가 자신이 쓴 책 「과학과 신의 전쟁」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크리스천투데이 DB

케노시스 창조이론 연구자들은 성육신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창조의 본질과 과정을 탐구하고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이라면 케노시스 창조 이론을 배척할 수 없는 것이고, 배척해서도 안 될 것이다. 다만 케노시스 창조이론이 아직 불완전하다는 견해를 가질 수는 있다. 그렇다면 더욱 연구하고 체계를 잡아서 제대로 된 창조론을 쓸 필요가 있다. 케노시스 창조 이론에서와 같이 어떤 창조론에서도 창조자의 속성에 관련한 문제들이 반드시 제기된다. 기독교에서 이를 해결하는 방향을 알려주는 나침판이 하나 있다. 그것은 요한복음 14장이다. 요한복음 14:10-1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말씀에서 보면 하나님 안에 그의 아들이 거하고 그의 아들 안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삼위일체론의 상호침투적 내재성이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14:20절에서는 "그 날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그의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그를 믿는 자들 안에 있는 것을 "알리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그 날'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를 믿는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재림하는 때를 가리킨다.

몰트만은 그의 케노시스 창조론에 요한복음 14장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관점을 가져온다. 일부 비판자들이 이를 무시하고, 케노시스 창조이론이 토라가 말하는 전통적 신성을 훼손하는 범신론적 관점이며, 비성경적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한 가지만 반문한다. 그렇다면 전통적 창조론에서 핵심적으로 강조되는 '무(無)에서의 창조'라는 개념은 성경 어느 구절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구약성경에도 들지 못한 외경 마카비서 Ⅱ권 7장에 나올 뿐이다. 그 내용은 로마제국의 탄압에 저항하여 유대인들의 반란을 주도한 마카비 가문의 아들들에게 어머니가 '하나님이 너희를 무에서 창조하셨으니, 그에게 죽음으로 보답하는 것이 의로운 일'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내용을 알고 있다면 기독교 창조론의 핵심 용어로 '무(無)에서의 창조'라는 말을 쓰는 것에 성경적 근거를 인정할 수 있는가? 기독교는 이제 고대 히브리인들의 관점에 기초한 창세기 해석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관점에 따라 창조 사건을 다시 해석해야 한다. 케노시스 창조 이론은 그런 해석을 모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올바른 창조론은 창조를 위해 자기를 비우신 창조자를 바라보면서 창조자가 창조의 일을 하신 대로 창조론을 다시 쓰는 것이다. (계속)

허정윤(Ph. D. 역사신학, 케리그마신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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