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태솔로에게… 사랑은 끝없는 노력으로 얻어지는 ‘이타적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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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욱의 ‘연애는 다큐다’ 72] 사랑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친구여. 나는 당신의 그 백지 같은 늘 마음을 아낍니다. 왜냐하면 아직 때가 덜 묻었고, 언제든 새로운 사랑을 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정말 소중한 사람이 나타나면 더욱 의미를 가질 그 마음은 보통 사람들의 그것보다 얼마나 더 귀합니까. 앞으로 멋진 사랑을 만날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1

그녀가 내게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어릴 때 자란 시골집 이야기를…. 마당에는 펌프와 우물이 있고, 돌담을 따라 뒤꼍으로 가면 할머니가 일하시던 고추밭이 나온다고 합니다.

어느 작가가 쓴 소설의 배경은 아무리 친절하게 그려져 있어도 천 명이 보면 천 개, 만 명이 보면 만 개의 배경이 다시 창조되는 법. 방금 내 머릿속에도 마당과 뒤꼍과 고추밭이 떠올랐지만, 그녀의 머릿속에 있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그 순간만은 그녀와의 의사소통도 허무하게 느껴지고, 인간은 어쩔 수 없이 혼자임을 또 돌아봅니다.

헤르만 헤세는 크눌프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의 혼이란 ‘식물’과 같아서 서로 다른 곳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말입니다. 꽃씨를 날려 또 다른 꽃을 만들어 낼 수는 있어도, 그 두 꽃은 언제까지나 철저히 혼자라는 것이죠.

그러니 사랑을 너무 아름답게만 보아서도 안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하나가 될 수 있다면 사랑은 또 그 빛을 잃어버릴 거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얼마나 좋겠습니까. 딱 한 번만이라도…. 그녀가 내게 들려주는 파란 하늘과 노을에 반짝이는 나뭇잎이 내 마음 속에도 똑같은 파란 하늘과 금빛 보물들처럼 반짝이는 그런 나뭇잎으로 그려진다면 말입니다.

2

낮은 하늘과 늘 맞닿아 있는 우리는, 하늘이 밝으면 즐거워하고 하늘이 잿빛이면 쓸쓸해합니다. 어떤 때는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낮의 하늘은 보고 싶은 얼굴들의 미소 같고 밤의 하늘은 그들의 눈물 같다는 생각 말입니다. 언제나 밤하늘 아래에서 느끼는 그리움은 나를 안절부절 못하게 만듭니다.

저 어두운 하늘에서 나는 옛날의 화창했던 하늘을 봅니다. 오래 전, 내가 알던 그녀와 일주일쯤 떨어져 있어야 할 일이 생겼는데, 그녀는 서울에 남고 나는 수도권의 어느 도시로 가게 됐었지요. 그때 그녀로부터 받은 엽서는 나를 기쁘게 해 주었습니다.

거기에는 “우리가 비록 잠시 떨어져 있지만 같은 하늘을 보고 있으니까 우리는 함께 있는 거야”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같은 하늘을 보고 있으니까 우리는 함께 있는 거야…, 나에게는 이 말이 사랑한다는 말보다 훨씬 좋았습니다. 나는 그녀를 믿고 우리 위에 넓게 펼쳐진 하늘을 믿게 됐습니다.

하지만 얼마 안 가서 그녀와 나는 엽서를 주고받을 필요도 없는 사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슬픔에 빠졌지요. 한 번은 그녀와의 시간들을 털어버리기 위해 혼자서 수도권을 벗어나 꽤 멀리 떠난 적도 있었지만, 그 많은 이야기를 다 알고 있는 하늘은 나보다 먼저 그곳에 가 있었습니다.

같은 하늘을 보고 있으니까 우리는 함께 있는 거라고 말했던 그녀는, 아직도 그 하늘 밑에서 살아가는 나보다 역시 더 영리합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지금, 내가 밤하늘을 볼 때는 낮의 하늘을 보고, 내가 낮의 하늘을 볼 때는 밤하늘을 보게 되는 다른 나라에 살고 있기 때문이죠.

밤이 깊었습니다. 아마 저쪽 편에서는 그녀가 일어날 시간입니다. 내가 자고 일어나면 그녀와 그녀의 남편이 사는 집 창가에 있던 하늘이 나의 창가로 달려오겠지요. 그러나 이미 그 하늘은 오래전 우리를 함께 있도록 만들어주던 바로 그 하늘은 아닙니다.

가끔…. 정말 가끔은 그녀가 보고 싶기도 하지만 우리는 이미 서로 다른 것들을 소유했습니다. 의심을 하라는 얘기는 아니지만, 여자의 말을 다 믿지는 마십시오. 때로 그녀는 참 대단합니다. 저렇게 믿음직스럽게 변함없이 웃음 짓는 넓은 하늘도 멀리 달아나는 그녀와 나를 한꺼번에 비추지는 못하니 말입니다.

3

길을 걸을 때 특별난 버릇 같은 게 없나요? 나는 늘 다른 사람과 길을 걸을 때 오른쪽에 섭니다. 그래야 편하고, 내가 왼쪽으로 가면 왠지 이상합니다.

그런데 한 번은 어떤 사람과 길을 걷는데, 그녀가 내 오른쪽으로 서는 것이었어요. 나는 버릇대로 그녀의 오른쪽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그녀가 다시 내 오른쪽으로 옮기는 것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녀도 나처럼 오른쪽에서 걸어야 한다는 것이었죠.

결국 우리는 벽에 붙어 한참을 ‘일렬종대’로 걸어갔었습니다. 서로 맞는다는 게, 아니 맞춘다는 것이 이렇게 쉬운 듯하면서도 잘 되지가 않죠.

그녀와는 멀어지고 세월은 흘렀습니다. 그때보다 조금은 철이 들었고, 다시는 누구와도 벽에 붙어서 걷지 않으리라 생각하여 그녀의 왼쪽으로 가려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는 내 오른손에 가방이 들려 있는 것을 보고는 먼저 자기의 핸드백을 왼쪽 어깨로 옮기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나는 그녀의 왼쪽으로 갈 필요도, 벽에 붙어서 걸을 필요도 없어졌습니다.

원래부터 나는 오른쪽을 좋아하고 그녀는 왼쪽을 좋아해서 자연스럽게 맞아 떨어졌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건, 두 사람이 서로를 위해 가방 든 손을 바꿀 준비가 항상 돼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평생 동안 같이 걸어야 할 사람이라면 일렬종대는 안 되겠죠. 언제나 나란히 걸어가야 합니다. 가끔 다툴 일이 있을 때만 잠깐씩 자리를 바꿔서 걸어 보십시오.

***

이 글은 사실 이십 대 중반에 쓴 것으로, 모태솔로 중 모태솔로였던 한 친구에게 보내는 형식으로 쓴 에세이다. 그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를 유치하게나마 썼던 것인데, 특정 사실과 관련 없는 창작도 들어 있다.

그때 나이만큼 다시 시간이 흘렀으니 꽤 오래된 글이지만 사람 사는 모습은 다 비슷한 것 같아서, 나름 풋풋한(?) 이 글을 다시 꺼내게 되었다. 정말 숙맥이던 그 친구는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은 늦었지만 파란 눈의 첫사랑과 결혼해, 계절이 정반대인 나라에서 잘 살고 있다.

모태솔로의 꿈을 깨는 이야기들인지 몰라도, 사람은 늘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라는 것, 그리고 아무리 사랑해도 독립적인 존재로 살아간다는 것, 사랑은 저절로 찾아오는 이상향이 아니라 끝없는 노력과 신실함으로 얻어지는 이타적 현실이라는 것이다.

빈 마음에 아름다운 이야기를 가득 채우시길. 사랑이 당신을 속일지라도.

김재욱 작가

사랑은 다큐다(헤르몬)
연애는 다큐다(국제제자훈련원)
내가 왜 믿어야 하죠?, 나는 아빠입니다(생명의말씀사) 외 30여 종
www.woogy68.blog.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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