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란 사랑보다… 내일이면 과거가 될 오늘을 잘 사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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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욱의 ‘연애는 다큐다’ 76] 사랑의 기억, 지울 수 있는 과거

1

어떤 사람이 기억을 지우는 기계를 발명했다. 오픈하자마자 방문한 첫 손님은 여자였다. 베일로 얼굴을 가린 그녀는 절망한 듯한 몸짓으로 아무 미련 없이 기계에 들어섰다.

잠시 후 성공적으로 기계가 작동하자, 첫 의뢰인은 밝은 얼굴로 기계에서 나와 베일을 벗었다.

그런데 남자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녀는 자신과 얼마 전 깊이 사랑했지만 이루어지지 못해 아프게 헤어진 연인이었는데, 베일 때문에 알아보지 못한 것이었다. 영문을 모른 채 해맑게 웃는 그녀를 배웅하던 남자가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요.”

남자는 자신이 만든 기계로 들어선다.

오래 전 읽은 SF 단편이다. 기억의 역할과 기능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다. 남자는 자신의 기억 속에서 혼자 남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여자는 지난 추억마저 다 지우려 하는 모습이 무책임해 보이지만, 오죽하면 그랬을까 싶기도 하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남자를 한 번만 보고 모든 것을 잊고자 했다. 어쩌면 그녀는 결말을 알고 있었을지 모른다. 남자가 기억을 지운 자신을 보면 함께 기억을 지우려 했을 것도 알았을지 모른다.

그 다음으로는 다시 사랑에 빠지려 했을까. 아니면 그 뒤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운명이 되풀이되듯 다시금 사랑에 빠질지 궁금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그녀는 전에 있었던 일들을 어딘가에 기록해 놓았을 수 있다. 짧게 끝나버린 소설에서 생각이 꼬리를 문다.

2

인간의 기억이란 어쩌면 그 사람의 전부다. 기억을 붙잡고 사는 사람에게서 그것을 빼앗으면 아무 의미도 남지 않는다. 자기 신상정보를 잊은 사람은 시민으로서 역할을 할 수 없고, 아무리 많은 재산이 있어도 그것을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거나 통장과 서류를 잃어버리면 아무 소용이 없다. 대중에게 잊힌 연예인이 스스로를 쓸모없는 존재로 느끼면 더 버티기 힘든 것이다.

그처럼 인간은 모두 누군가를 기억하고 타인의 기억 속에서 산다. 치매에 걸린 노인도 자식이든 누군가 한두 사람은 기억 속에 어렴풋이나마 꼭 붙잡고 있기도 한다.

기억은 메모리(memory), 즉 ‘암기’와 똑같은 것이다. 어떤 것을 외우고 있는 것이 추억이다. 어떤 맛을 암기하고 있어야 그와 비슷한 음식 사진을 볼 때 그 맛을 상상할 수 있고, 학습한 적이 있어야 침샘이 자극되는 것이다. 많이 겪어보았을수록 더 잘 알고 오래 기억된다.

“오 주께서 선하신 것을 맛보고 알지어다. 그분을 신뢰하는 사람은 복이 있도다(시 34:8)”.

이처럼 하나님의 선하심도 경험을 통해 알고, 기억하는 것이다. 우리 신앙도 그런 경험의 기억들로 이루어져 있다.

누군가를 암기한다는 것은 그 대상에게 경의를 표하는 일이다. 사람들은 위대한 업적을 남긴 이들을 기억하려 날을 정하고 동상을 세우며, 연인들은 백일이니 일 년이니 하면서 날짜를 세고 기념일을 만든다. 예수님도 옥합을 깨뜨린 여인을 기념하리라 하시고, 나를 기억하라고 하셨다.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세상 어디든지 이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서는 사람들이 그녀가 행한 이 일도 말하여 그녀를 기념(memorial)하리라, 하시니라(막 14:9)”.

“또 그분께서 빵을 집으사 감사를 드리시고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준 내 몸이라. 나를 기억(remembrance)하여 이것을 행하라, 하시고(눅 22:19)”.

그러나 하나님을 거부하고 아비 마귀의 소유물이 된 자들은 하나님이 기억하실 필요가 없으므로 그 자체가 형벌이 된다.

3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기억하는 것이다. 사람을 배신하는 것은 기억을 저버리는 일이다.

“본성의 애정이 없으며 협정을 어기며 거짓 고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자들을 멸시하며(딤후 3:3)”.

애정이 없으면 협정을 어긴다. 사랑의 약속도 저버리고 많은 약속들을 깨버린다. 이것은 기억을 부정하는 일이다. 사랑하면 기억한다. 그리고 기억한 것을 실천하고 약속을 지킨다.

하나님은 ‘기억’으로 인간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신다. 구원의 예표인 노아의 방주를 보면 하나님이 노아의 여덟 가족을 안에서 ‘들어오라’고 말씀하신다(창 7:1). 그리고 친히 문을 닫으셨다고 하셨다(창 7:16). 또한 일 년 동안 그들이 생명을 지킬 수 있도록 ‘기억’하셨다.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모든 생물과 모든 가축을 기억하시니라. 하나님께서 바람을 땅 위로 지나가게 하시니 물들이 줄어들었고(창 8:1)”.

이 밖에 성경의 무수히 많은 곳에서 하나님은 기억하고 지키신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 약속은 스스로도 깨실 수 없는 확실한 안전보장이 된 상태다.

만일 누군가 크리스천이 기억을 지우는 기계에 잘못 들어가 구원의 경험과 지식과 과정까지 모두 잊는다 해도, 하나님은 한 번 주신 구원을 지키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며, 인간의 궁극적인 행복은 그 사랑, 잊지 않고 기억하시는 그 사랑에 온전히 기대어 있다.

그래서 사랑은 기억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기대지 말되, 내가 기억할 것은 기억해 주는 것이 사랑의 도리일 것이다. 어차피 아무리 아파도 모든 기억을 지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런 기계도 없다. 술을 마시고 정신을 잃어봐도 깨어나면 기억은 그대로다.

윈도 시스템에는 날짜를 설정했다가 시스템이 꼬였을 때 바로 그 시점의 상태로 돌아가는 복구 기능이 있지만, 아무리 부러워해도 인간에게 그런 축복(?)은 허락되지 않았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며, 기억은 자기 혼자만의 전유물이 아니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래서 사람은 평소에 평생 새겨도 아프지 않을 기억을 남기면서 살아야 하는 거다. 그리고 아프지 않은 사랑, 서로 상처 주지 않아도 되는 사랑을 해야 한다.

미래에 아픈 과거를 덜 지니고 살려면 바로 오늘 좋은 기억을 쌓으면 된다. 사람들은 이 사실을 자주 망각하고 일부러 외면하는 일도 많아서, 사랑도 일도 인간관계도 일단 뛰어들어 후회할 일을 만드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래서 대부분의 아픈 기억은 자신의 미련 때문에 만들어진다.

아픈 과거를 지울 수는 없다. 하지만 지울 수 있는 과거도 있다. 그것은, 내일 과거가 될 오늘을 잘 사는 것이다. 아프지 않게, 지우고 싶지 않게 말이다.

김재욱 작가

사랑은 다큐다(헤르몬)
연애는 다큐다(국제제자훈련원)
내가 왜 믿어야 하죠?, 나는 아빠입니다(생명의말씀사) 외 30여 종
www.woogy68.blog.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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