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정윤 박사의 창조론 다시 쓰기
3. 빛의 의미와 '욤'의 길이
창 1:5 וַיִּקְרָא אֱלֹהִים לָאֹור יֹום וְלַחֹשֶׁךְ קָרָא לָיְלָה וַיְהִי־עֶרֶב וַיְהִי־בֹקֶר יֹום אֶחָד׃. [바이크라 엘로힘 라오르 욤, 베라호셰크 카라 라엘라, 바예히 에레브 바예히 보케르, 욤 에하드] 이 구절은 한글 성경에서 '하나님이 빛을 낮(욤)이라 부르시고 어둠(흑암)을 밤(라옐라)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에레브)이 되고 아침(보케르)이 되니 첫째 날(욤 에하드)이니라'고 번역하고 있다. 앞 구절들에서 창조자 하나님은 그의 영을 보내 지구가 만들어진 상태를 살펴보신 뒤에 흑암에 빛을 있게 하심으로써 빛과 흑암을 나누셨다. 이 구절은 흑암에서 빛을 나누신 하나님이 낮과 밤이 이어지는 '날'(욤)을 제정하시는 모습을 서술한 것이다. 이 빛에는 하나님이 계획하신 수많은 정보가 담겨 있다. 정보는 해석을 제대로 해야 사용할 수 있다. 아무리 좋은 정보라도 해석하지 못하면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고, 사용하지 못하는 정보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그렇다고 정보를 잘못 해석하여 억지로 사용하면 오히려 독이 된다.
오늘날 우리는 수없이 많이 존재하는 행성들 중에서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는 생태계가 지구에만 만들어져 있다는 아주 특별한 사실을 알고 있다. 이 특별한 사실을 알고 있고 창조를 믿는 기독교 신자들은, 하나님이 흑암에 싸여있던 지구에 좋은 생태계를 만들기 위해서 빛이 있게 하셨다고 믿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 신자들은 이런 바탕 위에서 이 구절에 서술된 빛의 의미와 '욤'의 길이에 대해 좀 더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창세기 저자는 고대 히브리인들에게 빛에 대한 정보를 자세하게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러나 창세기 뒤에 나오는 성경에는 쓰인 순서에 따라 빛에 대한 서술의 변화가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빛의 정보에 대한 이해는 인간의 지적 능력이 향상됨에 따라 확장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제는 현대인의 관점에서 이 구절에 서술된 빛이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흑암에서 나누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특별하게 이해해야 한다. 그런 사실을 알고 보면 그 빛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보다 심오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창조자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특별한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에서 가장 잘 나타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구약성경에서 예언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 빛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창세기에서부터 신약성경에까지 두루 살펴보아야 한다. 여기에서는 지면상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창조자 하나님은 이 구절에서 빛을 '욤'으로 불러 낮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썼다. 이어서 '욤'은 밤을 포함하여 한 '날'을 의미하는 말로도 사용되었다. 그 외에 토라에서는 얼굴의 빛을 이용하여 나쁜 질병들을 알아내는 방법을 서술하고 있다. 구약성경에는 빛에 대해 번개의 빛이나 해의 빛과 같은 물질적 표현에서 점차적으로 좋은 것, 생명의 빛, 주의 빛, 의인의 빛 등과 같이 인간에 관련된 의미로 발전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예언서들에는 빛이 하나님의 임재, 이스라엘, 의인의 의(義) 등으로 은유적 표현에 사용되었다. 스가랴 14:7에서는 '주의 오심'을 예언하면서 빛으로 표현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신약시대에는 빛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게 된다.
신약성경은 그리스어로 쓰인 것이다. 신약성경의 서술은 히브리어 구약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70인 역본'을 통하여 연결할 수 있다. 요한복음 1장은 신약성경의 창세기라고 부를 만하다. 여기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창조자 하나님과 공동 창조자로 서술되어 있다. 요한은 '태초에(ἐν ἀρχῇ) 말씀(λόγος)이 하나님과 함께(πρὸς τὸν θεόν) 있었으니, 곧 하나님(θεὸς)'이라고 서술했다. 여기서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이어서 서술된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라는 구절을 보면, 요한은 만물의 창조자가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라고 보고 있다. 또한 요한은 예수를 '사람들의 빛' (φῶς τῶν ἀνθρώπων)으로 서술했다(요 1:4). 요한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세상의 빛'(φῶς τοῦ κόσμου)이라고 말했고(요 8:12, 9:5, 11:9),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다고 증언했다(마 5:14). 요한복음에서 '태초에'(ἐν ἀρχῇ)는 창세기의 '태초에'(베레쉬트)와 같은 시기를 말한다. 또한 창세기의 '오르'와 요한복음의 'ㅎ포스'는 동일하게 빛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요한복음에 의하여 태초의 창조 이전부터 '세상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공동으로 창조를 계획하고 협의하셨던 사실이 명백해진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빛'이 공동 창조자라면, 사람은 창조되기 이전에 이미 계획되었다는 사실도 드러난다. 흑암에서는 생태계가 존재할 수 없다. 그렇다면 흑암에서 나눠진 빛은 물질적인 빛이 아니라, '세상의 빛'이시고 '사람들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주와 지구의 창조에 임재하시고 있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는 점도 분명하게 이해된다. 창세기를 더 읽어보면 '세상의 빛'으로 만들어진 아담과 그의 자손들이 창조자 하나님의 창조계획대로 살지 않았으므로 '세상의 빛'이 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사람들과 세상의 빛이신 분을 알아보고 그를 믿는 사람들만이 그와 같이 '세상의 빛'이 될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 구절에서 서술된 빛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한 일부 신자들은 물질적 빛의 의미인 '욤'의 시간적 길이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런 사람들은 '욤'의 길이를 지구와 우주의 연대 계산에 적용하여 논쟁을 벌이고 있다. 그들의 논쟁을 보면, 서로를 향해 '너는 지옥에 간다'하는 식이다. '욤'의 시간적 길이가 길고 짧은 것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어떻게 천당과 지옥을 가르는 심판의 기준이 된다는 말인가? 어쨌든 논쟁이 벌어지면 결론을 내야 한다. '욤'의 길이에 대해서 논의하자면,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이미 앞에서 논의한 대로 하나님이 빛을 창조하신 것이 창조의 시작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창세기의 첫 마디인 히브리어 '베레쉬트'(처음에)가 하나님의 창조가 시작된 때를 알려주는 말이다. 그러나 창1:5에서 쓰인 히브리어 '욤 에하드'를 '첫째 날'이라고 번역한 성경들 때문에 오해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오해의 원인은 '베레쉬트'와 '에하드'를 동일하게 '처음'의 때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히브리어 '에하드'는 서수(序數)의 '첫째'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저 '하나'(one)를 의미하는 기수(基數)이다. 창 1:9에서 물이 '한' 곳으로 모이라는 구절에도 이 말(에하드)이 쓰이고 있다. 서수를 의미하는 '첫째'의 히브리어는 '라숀'(רִאשֹׁון)이다. 이 말은 칭 32:18에서 에서와 야곱의 순서를 말할 때에 쓰였다. 그렇다면 '베레쉬트'와 '욤 에하드'의 시간적 차이는 어떤 것일까? 간단히 말하자면 '베레쉬트'는 우주의 창조를 시작한 때를 말하고, '욤 에하드'는 지구에 생태계의 창조를 시작한 때를 가리키는 것이다. 만약 창세기 저자에게 이 구절(창 1:5)에서 하나라는 기수 '에하드'를 쓴 이유를 묻는다면, 그는 이미 앞에서 '첫째'를 의미하는 '베레쉬트'라는 말을 썼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라숀'과 '레쉬트'(앞에 붙인 '베'는 전치사이다)는 같은 어원에서 나온 말이라는 사실은 이러한 차이를 설명하는데 확고한 증거가 된다.
어떤 원전(原典)을 다른 나라 말로 번역하면 의미가 달라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창세기의 원전은 히브리어로 쓰였다. 그러나 한글성경의 창세기에 오역을 제공한 원전은 영국 국교회가 제임스 왕(Charles James Stuart, 1566-1625) 시대에 번역한 영어성경 KJV(King James Version)이다. 아시아 지역에서 선교 초기에 영어권 선교사들에 의해서 번역된 기독교 성경들은 '욤 에하드'를 the first day로 오역한 KJV를 대본으로 한 것들이다. 그리고 오늘날 '욤'의 길이를 가지고 우주와 지구의 연대 문제 논쟁에 불씨를 만든 것은 영국국교회의 제임스 어셔(James Ussher, 1581-1656) 주교이다. 그는 하나님의 천지 창조가 BC 4004년에 시작되었다고 주장하는 『연대기』를 1650년에 출판했다. 어셔 주교가 당시 KJV에서 '욤 에하드'를 영어로 번역한 the first day가 오역이라는 사실을 몰랐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1534년 영국 의회의 '수장령' 통과에 의해 세워진 영국국교회가 초기에는 로마 가톨릭의 라틴어 불가타 성경을 그대로 사용했고, 그는 『연대기』를 라틴어로 썼기 때문이다. 라틴어 성경에서는 올바르게 '태초에'가 in principio로 번역되어 있고, '욤 에하드'는 dies unus로 번역되어 있다. 영국국교회가 욤 에하드'를 the first day로 오역한 KJV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1611년부터이다. 어셔의 연대기가 출판된 이후 BC. 4004년에 천지창조가 시작되었다는 주장은 KJV 관주(冠註)에 수록되어 널리 알려졌다. 이것이 기독교 신자들에게 '베레쉬트'와 '욤 에하드'를 같은 날로 오해하게 만든 주요 원인이 되었다. 어셔 주교가 굳이 KJV의 오역을 문제 삼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근거로 BC. 4004년에 천지창조가 시작되었다고 주장한 것은 지성을 갖춘 기독교 성직자로서 할 일이 아니었다. 따라서 어셔 주교의 행동에 대해서는 당시 왕위 계승권 문제로 곤경에 처해 있던 제임스 왕실과의 사이에는 모종의 협력을 주고받는 야합이 있었다고 추정할 수밖에 없다. 어셔 주교는 생전에 국교회의 최고위직을 누렸고, 죽은 뒤에 그는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 묻히는 등 영국 시민으로서 최대의 영예를 누렸던 사실이 이런 추정에 신뢰를 더해준다. KJV가 '욤 에하드'를 one day로 번역했거나 수정했더라면 한글성경도 '한 날에'라고 번역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이 빛을 가장 먼저 창조한 것이라고 오해하면, 이 날을 창조의 첫째 날이라고 보게 된다. 그러면 이 구절에서 서술된 저녁과 아침의 순서에도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빛을 '낮'이라고 규정한 뒤에 저녁이 아침보다 먼저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히브리인들의 '욤' 계산 방식으로는 밤이 없는 날이 되어야 한다. 이 경우에 처음의 '욤'에는 밤이 없고 낮만 있게 되므로, 빛이 있기 이전의 시간은 포함되지 않게 된다. 말하자면 반쪽 하루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규정된 '욤'의 구성을 맞추기 위해 하나님이 밤으로 규정한 흑암을 찾아보면, 빛이 있기 이전에 흑암이 있었다. 이 흑암이 처음 빛(낮)이 있기 전의 밤이다. 그러나 한글성경은 이 구절에서 이 흑암을 어둠이라고 오역하여 밤을 찾을 수 없게 만들어놓았고, 그 때문에 이 '욤'이 반쪽만 있는 것으로 오해하게 만들고 있다. 이 구절을 다시 보면,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고 서술한 부분에서 '되니'라고 번역한 것도 오역이다. '되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동사는 '하야'이다. 이 동사는 앞에서 논의했던 '빛이 있으라고 하시니 빛이 있었고'에 쓰인 것이다. 그러므로 한글로는 이 구절을 '저녁이 있었고(예히 에레브), 아침이 있었다(예히 보케르). 한 날에(욤 에하드).'라고 번역하는 것이 저자의 의도에 가장 가까운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까지 논의한 바탕 위에서 흑암과 빛을 나눈 처음 '욤'의 시간적 길이에 대해서 결론을 정리하기로 한다. 처음의 빛으로 만들어진 낮과 '욤'은 하나님이 지구의 생태계를 조성하기 시작한 때로 본다. 따라서 처음 '욤'의 밤으로 규정된 흑암에는 하나님이 천지의 창조를 시작하신 때로부터 처음의 빛을 있게 한 때까지의 시간이 포괄되어 있다. 이 경우에는 우주의 빅뱅부터 시간을 계산하게 되므로 현대과학에서 계산하는 우주와 지구의 연대에 시비할 이유가 없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처음부터 '욤'은 물리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자들이 '욤'의 길이를 가지고 우주와 지구의 나이가 젊었느니, 늙었느니 하고 논쟁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를 잘못 이해한 것을 자랑하는 어리석은 행동에 지나지 않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