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한승의 러브레터] 사명과 거룩
1. 한 청소년이 언젠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밥에다 돈 쓰는게 제일 이해가 안 돼요.”
이 친구는 옷 사는 것이나 다른 것에는 돈을 아끼지 않습니다. 그런데 먹는것에는 돈 쓰는게 죽을만큼 아깝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친구는 맛있는 음식이 눈 앞에 있으면 가장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는 것입니다.
2. 사역 중에 큰 사역은 밥 사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제 사역 중에 상당히 큰 부분을 차지합니다.
이제 성탄절이 곧 다가옵니다. 통장을 살펴보니 여전히 올해도 조카들에게 선물해줄 돈은 없습니다. 관계 맺는 목사님이나 지인들에게 이맘 때가 되서 선물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습니다.
한 달 급여의 대부분은 미리 떼어놓는 헌금과 지출되는 교통·통신비를 제외하고는 아이들 밥값으로 지출돼, 언제나 현금은 마이너스입니다.
3. 가끔, 무엇이 중요한지 우리가 놓치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시고 둘이 하나 되게 만드신 이유는 세상을 통치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바른 가정의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해져서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만들기 위함입니다.
저는 누구보다 조카바라기 삼촌이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그렇습니다. 예전에 조카에게 이렇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사랑하는 준영아. 너에게 좋은 삼촌이었던 것처럼, 이제 좋은 목사가 되는 것이 삼촌이 해야 할 일이야.”
4. 우리 모두는 주님의 말씀이 내가 먹을 것, 내가 버는 것보다 중요하다는 것 정도는 압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이 돈과 명예. 지인보다 중요하다는 것도 압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나라가 오늘 이 땅보다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도 압니다.
그런데도 정작 중요한 순간의 판단은, 왜 반대가 되고 맙니까. 그것은 일상의 거룩함에 실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룩함은 평범함의 구별에 있다는 것 말입니다.
일상의 거룩함을 구현하기 위해 좋은 믿음의 가정도, 믿음의 친구도, 좋은 교회도 필요한 것입니다.
예배당의 예배를 위해 교회가 필요한 것도, 결혼을 위해 배우자가 필요한 것도, 교육과 프로그램을 위해 교회가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5. 거룩함은 예배당 안에서의 구별된 자세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함은 말씀을 읽고 기도하고 있는 분량과 시간, 그 자세를 말하지 않습니다.
거룩함은 내가 어디에 돈을 쓰고 있는가의 재물의 구별성에서 나타나고, 내가 어디에 얼만큼의 시간을 쓰고 있는가의 시간의 구별성에서 드러납니다.
거룩함은 내가 누구를 만나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의 관계의 구별성에서 드러납니다.
6. 2009년 수술을 하면서 병원균이 감염됐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아찔한 일인데, 그 때는 무식함이 용감함이라고, 그냥 그런 줄로만 알았습니다.
왜 퇴원을 안시키는지도 모른 채, 항생제를 왜 계속 바꾸며 투여하는지도 모른 채, 한 달 내내 항생제를 줄줄히 몸에 쏟아부었습니다. 자연스레 항생제 알러지 같은 것이 생겼습니다.
7. 퇴원하고 몸이 완전히 회복되기 직전, 청년들을 만나고 그렇게 저의 사역은 시작되었습니다. 평신도로부터 전도사 목사 담임까지, 이후부터 매년 연례행사처럼 두세 차례 크게 병치레를 합니다.
고통스러운 순간은 항생제를 쓸 수 없어, 회복이 더디다는 것입니다. 항생제를 부득이 써야 하면, 소화가 전혀 되지 않아 이중고를 치루어야 합니다. 그래서 아프면, 밥을 먹지 않습니다. 그러다 더 크게 아픈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몸의 회복이 더딘 채 아무것도 먹지 못하면 링거를 맞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링거를 맞다가, 또 링거 부작용에 혼나기도 합니다.
8. 작년 말, 송구영신예배 전후로 몸이 많이 아팠던 기억이 납니다. 하필이면 가장 바쁜 그 시기에 몸이 탈이나, 바로 전날 링거를 맞고 설교했습니다. 더하여 링거 부작용도 발생했습니다.
이 악 물고 설교한 것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입에 침이 하나도 고이지 않아, 입 안에 작은 사탕을 물고 설교해야 했습니다.
9. 올해는 제법 잘 버텼다 싶었습니다. 올해가 가장 바쁜 해였는데, 크게 병치레 하지 않고 잘 버텼습니다. 그런데 역시나 연말이 되서 그냥 넘어가지는 않네요.
수 개월 동안 심한 기침으로 목이 좋지 않았는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감기가 들었습니다. 조금 나아지려던 찰나, 서울디자인페스티벌에 학생을 데리고 코엑스에 간 날 몸살에 된통 걸려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마음은 시원했습니다. 수능이 끝나고 할 것 없어 싱숭생숭해하는 학생이, 그 날만큼은 빛나는 눈동자로 이것저것 체험도 하고 즐거워했기 때문입니다.
10. 5세 때 교통사고 이후, 사실 몸이 아픈 것은 마음에 별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아플 때면 으레 마음 속에는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하나님의 섭리로 쉬어가게 하시니, 얼마나 감사한지요.
지난 주일 오후, 사역을 일찍 마무리하고 집에 들어와 곧바로 씻고 누웠습니다. 가족들이 모두 모여 저녁 식사를 하는데, 그 소리가 제 방에서는 잘 들립니다. 주로 그날 저의 건강이 주된 이야깃거리였습니다.
“아니 야외수업을 왜 가서 그래?”
“가서 뭐 하는것도 없는데 왜 가?”
“아무도 카페 하라고 한 사람도 없는데, 그건 왜 그리 열심히 해?”
그러고 나서, 왜 아픈지에 대한 저마다의 다른 해석들이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몸이 아파 마음이 힘들지 않는데, 사랑하는 가족들의 걱정 어린 이야기들이 오히려 마음이 아픕니다.
11. 우리 가족들은 제가 보기에도 나름대로 균형잡힌 신앙인들입니다. 바른 가치관을 갖고 지금까지 교회를 참 잘 섬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생각이 가족 안에서는 잘 구현되지 않음을 종종 봅니다. 그날 침대에 누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우리 사랑하는 가족 안에, 본래 저와의 관계로 인해 지켜야 할 바른 신앙관과 사명이 연약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성탄절을 앞둔 저의 가족에 대한 마음입니다.
12. 사랑하는 여러분, 몸이 연약한 목회자가 되면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성도의 짐이 되는 순간, 목회자의 자리는 내려와야 한다는 오래 전의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프다는 것이 핑계가 되어 사역을 놓치면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연약함은 겸손의 씨앗이요, 주님만 빛내기 위한 좋은 도구이지, 사명을 내려놓는 핑계가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13. 그런데 사명은 일상 속에 있습니다. 아파서 설교를 못하는 것이 사명이 아니라, 참된 사명은 연약한 몸으로 누구와 함께 지내고 있는가에 있습니다. 누구와 함께 밥먹을 계획을 하는가에 있습니다. 누구를 위해 돈을 쓰는가에 있습니다.
사명은 일상의 거룩함에서 빛을 발하기 때문입니다.
14. 이제 성탄이 곧 다가옵니다.
성탄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거룩이 무엇인지 보여주신 날입니다. 그래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하신 주님의 초대에, 우리도 다시 태어나는 날입니다.
하늘 보좌 버리고 베들레헴 가난한 동네 이름 없는 여관 마굿간의 거룩함으로 다가오신 예수,
위대한 하나님의 형상 대신, 무력하기 짝이 없는 아기의 일상으로 거룩함이 되신 예수,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의 무너진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 말밥통을 거룩함으로 바꾸신 예수,
죽음과 고통이라는 평범한 인간의 일상에 던지며 십자가를 거룩함으로 바꾸신 예수,
흔하디 흔한 빵과 음료를, 당신의 몸과 맞바꾸시며 식탁을 거룩함으로 바꾸신 예수와의 관계가 회복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참된 성탄, 내 자신이 말구유 위에 거듭나는 2018년 성탄절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유한승 목사(생명샘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