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한승의 러브레터] 의심이 마음에 심겨지면
안녕하세요. 오랜만입니다.
오늘 여러분과 나눌 이야기는 지난주 설교 내용입니다. 의심에 대한 내용입니다. 혹시 여러분이 의심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1.의심이 마음에 심겨지면, 무럭무럭 자랍니다. 의심의 씨앗은 여러 형태의 열매로 나타나는데 불안으로, 그리고 불안은 증오로, 그래서 자신을 해치기도, 타인을 해치기도 합니다.
의심은, 상대방의 일반적인 행동까지도 미움이 되기도 합니다. 그가 밥먹는 것도 욕심처럼 보이고, 밖에 나가는 것은 일탈처럼 보이게 만듭니다. 집 안에 있으면 게으름으로 보입니다.
2. 의심이라는 말 그대로 보면, 마음 안에 확실한 신뢰가 없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완전한 확신으로 채워질때에만 의심하지 않게 됩니다.
그럼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세상의 이야기가 나에게 ‘확신’이 될 수 있을까. 부모님의 이야기가 나에게 ‘확신’이 될 수 있는가.
그보다 더 본질적인 질문, 내 마음에 의심이 생긴 것은 아닌가? 진단받아야 합니다.
비전에 대해, 사람에 대해, 사랑에 대해, 수많은 의심 가운데 있는 것은 아닌가 말이지요.
3. 의심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 ‘포레오’는 혼란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즉 사람은 내가 생각하는 것, 가치관 등과 전혀 다른 현상이 주어지면 의심하게 됩니다.
그래서 의심스러운 이 상황, 자기 삶의 궤적과 어긋난 진리 앞에서 사람은 불안해지기 시작합니다. 사람은 걷다가 불안해지면 무언가를 짚으려합니다. 마찬가지로 의심으로 불안해진 사람은 결국 가장 쉬운 것을 붙잡습니다.
‘자기 생각’ 말이지요. 완전한 확신으로가 아닌, 불완전한 자기 확신만 강화시키면서 말이지요. 그런데 불완전한 자기 확신을 강화시키는 것은 결국 의심을 강화시키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 식으로 사람은 점점 ‘고집’이 강해질 뿐입니다. 바뀌지 않는 사람으로 고정화됩니다.
4.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십니다. “내가 너의 태에서 난 자식을 통해 복 줄거야. 하늘의 별처럼 자손이 많아질거야.” 75세때 주신 하나님 말씀입니다.
들려주신 말씀은 좋기는 하나, 나이로 보나, 상황으로 보나 의심이 생깁니다. 기다려 봐도 달라지는 것 같지 않습니다.
결국 사래는 아브람에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창 16:2)”.
하나님의 말씀, 진리가 주어졌습니다. 그러자 사래는 의심했습니다. 의심의 상태, 그 어긋남을 인내와 순종으로 엮지 아니하고, 자기 생각과 자기 계획으로 덧칠하기 시작합니다.
몸종 하갈. 가장 믿었던 여종에게 아이를 낳게 합니다. 사래가 품은 의심의 열매는, 믿었던 여종에 대한 증오로, 인류 역사상 가슴 아픈 형제들의 분리로 나타납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의심과, 자기 삶의 궤리를 자기 생각대로 풀어나간 탓입니다.
5. 우리는 여기서 의심의 또 다른 용어, ‘디아 크리노’라는 단어를 살펴보게 됩니다. 의심은, 분리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이지요.
영화 <다우트>는 제목처럼 '의심'과 관련된 영화입니다. 영화 배경은 니콜라스 학교에 시대적 변화에 따라 도널드 밀러라는 흑인 학생이 처음으로 입학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영화에는 중요한 인물 셋이 등장합니다. 플린 신부는 진보적 관념을 가진 신부인 반면, 알로이시스 교장은 보수적 관념을 가진 신앙인입니다. 그리고 제임스라는 수녀는 아직 어떤 입장을 취한 상태는 아닌 순수한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어느날, 도널드 밀러가 플린 신부와 면담하고 왔는데, 술냄새가 나고 표정이 좋지 않은 모습을 본 제임스는 자신의 생각을 교장 수녀에게 말합니다.
의심은 결국 자기 생각과 관념을 더욱 강화시키며, 플린 신부를 좇아내기에 이릅니다. 행복했어야 할 교장 수녀는, 그러나 제임스 수녀에게 안겨 펑펑 우는 모습으로, 의심은 언제나 분열로, 분열은 결국 자기 아픔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6, 영화는 결론을 이야기해 주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의 의견이 맞는지도, 누가 범죄를 저지른 것인지도 말해 주지 않습니다. 영화가 말하고 싶어하는 것은 바로 우리들 마음 속 가득한 ‘분열의 마음’, 그것이 곧 의심에서 시작됨을 말해 주고 있을 뿐입니다.
7. 의심으로 인해 분열되는 자아를 가진 존재들이 많습니다. 사래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고개 숙이고 비웃었던 것처럼, 예배를 드리면서 수많은 진리의 말씀 앞에서도, 듣기는 좋으나 이미 자기 생각과 고집으로 가득차 절대로 변화하지 않겠다는 삶을 사는 사람들은, 오늘도 내일도 끊임없이 분열하고 살아갑니다.
의심의 영은, 내 생각과 맞는 자들과만 함께 살아가기 원하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내 삶을 변화시키려 하는 하나님의 말씀과 점점 멀어지고, 내 삶과 비슷한 삶을 살아가는 자들과 하나되어가고 수평적인 교제는 좋지만, 수직적인 하나님의 말씀에서는 멀어지는 사람.
그렇게 그 사람들의 발자취는 영원히 아무리 달려가도 끝나지 않는 수평선을 그릴 뿐입니다.
8. 이러한 의심의 사람인 우리를 바로잡아줄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확신을 깨트리는 완전한 확신, 진리여야만 합니다.
어느 날 솔로몬에게 두 여인이 옵니다. 이들에게는 한명의 아이가 있습니다. 문제는 이 둘 모두 자기 아이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 안에 상주하는 질문의 행보입니다. “도대체 내 삶에서 어떤 것이 진리인가?”
같은 고민을 가진 왕은, 망설임이 없이 선택합니다. “아이를 둘로 나누어라.”
한 여인은 아이를 차라리 둘로 나누어달라 합니다. 그러나 한 여인은 아이를 나눌 바에는 저 여인에게 주라고 말합니다.
왕은 기다렸다는 듯, 판결을 내립니다. “후자의 여인이 진짜다.”
9. 우리는 이러한 판단을 내려야 하는 사람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실상 우리에게 바른 판결을 내릴 능력이 없습니다.
실제 우리 모습은 왕 앞에 나온 여인과 같지요. 때로는 전자의 여인의 마음이, 그러나 후자의 여인이 되어야 하는 우리 말입니다.
어떻게 후자의 여인이 될 수 있습니까? 대답은 간단합니다. 내 아이(생각)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왕(진리)을 믿는 것입니다.
그 왕은 오늘 내 의심. “과연 내 아이를 지킬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에 벌벌 떠는 우리의 모든 의심에서 자유케 하실 분이십니다.
10. 사실 우리 안에는 수많은 의심의 상처로 얼룩져 있습니다. 때로 내 의심때문에, 그 의심이 욕심이 되어 아이를 두 동강내 버린 일들이 있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의심하는 것도 아파 숨기고, 내가 나를 의심하는 것도 꺼내기 힘들어 구멍난 상처들. 누구에게도 꺼내기 힘들어 이유없이 눈물 흘리는 오늘이 가득합니다.
11. 예수님의 부활 사건에서 우리는 놀라운 사실 한 가지를 발견합니다. 도마와의 만남입니다.
부활을 하신 예수는 육체가 완전히 부활하셨습니다. 즉 새로운 몸으로 깨끗하게 되신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본 제자들이 여기저기 알리기 시작합니다. “진짜 예수님이 부활하셨어!”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 도마는 깊이 내재된 자신의 의심을 꺼내기 시작합니다.
“부활하셨다고? 웃기는 소리하지 말라고. 나는 그가 죽은 것을 똑똑히 봤어. 설령 그가 부활했다 치자. 그러면 손에 박힌 못자국이 있을것 아니냐. 만져봤어? 옆구리에 크게 뚫린 상처. 거기 내가 손을 넣어봐야 믿지. 그거 다 뻥이야 뻥.”
설령 예수님이 인간이라 할지라도, 감히 제자의 입에서 나올 수 없는 말입니다. 어떻게 제자가 감히 그분의 상처를 볼 수 있단 말입니까.
또한 설령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면, 모든 육신의 고통과 죽음을 이기신 사건이므로 십자가의 상처, 인간으로 겪어야할 구멍과 아픔마저 사라져야 정상입니다.
그런데도 도마는 부활했다면 구멍에 손을 넣어봐야 믿겠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도마의 마음에 깃든 의심은 예수에 대한 증오로 바뀌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그의 동료마저 비아냥대며 조소하고 있습니다.
이렇게까지 이야기했다는 것은 자기 의심과 자기 확신만으로 세상을 살겠다는 선언과 다름없습니다. 생각보다, 이런 마음으로 예배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12. 바로 여드레쯤 지날 때 일입니다. 그 날도 도마는 그저 함께 있던 동료들과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습니다. 햇볕과 차단된 텁텁한 회색 벽 안에 문을 꽉 닫은 채 말입니다.
마치 그렇게 꽉 닫힌 마음의 문처럼 차갑고도 딱딱한 벽 안에, 제자들과 도마만 있었던 그 순간 살아계신 예수님이 나타납니다.
제자들 중에 오직 도마를 바라보시고 말씀하십니다. “도마야.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보렴”.
도마의 마음 깊은 곳, 익숙한 목소리가 들립니다. 익숙하나 잊었던 목소리입니다.
그 분을 바라보니 익숙한 모습입니다. 부활 승천하신 화려한 그 모습이 아니라, 초라한 모습 그대로 앞에 서 있습니다. 바라보는 즉시 죄송스러운 마음이 밀려듭니다.
그러나 그 마음 한 구석에는 강력한 의심도 끓어오릅니다. “구멍에 손을 넣어봐! 가짜일수도 있잖아!”
제자의 신분, 의심했던 모습. 감히 손을 덜덜 떨며 내밀지 못하는 도마의 죄 많고 거친 손 위에, 예수님의 손이 덮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주님은 도마의 손을 붙잡고 이끌기 시작합니다.
검디 검은 도마의 손은 의심 많은 도마를 위해 못박히신 구멍난 손에 닿습니다. 덜덜 떨리는 도마의 손을 꽉 잡고 놓치 않으시는 주님은, 이제 커다랗게 구멍뚫린 피고름이 여전히 흐르고 있는 상처난 옆구리에 도마의 손이 닿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도마야. 이제 의심하지 말고 확신을 갖고 살렴”.
도마의 눈에 눈물이 쏟아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그의 인생이 바뀝니다. 의심은 완전한 확신으로 뒤바뀝니다.
13. 예수님은 그렇게 의심 많은 도마를 위해 부활하시면서도, 상처입은 그대로 부활하셨습니다. 여전히 그분은 인간의 모습으로 구멍 뚫리고 상처입은 그곳을 훤히 보여주십니다.
스승이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 자신의 모든 것을 여전히 보여주는 것, 한 생명을 위해 다 내어주는 것,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오직 그 분. 왕 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모든 의심에서 자유케 할 수 있는 분입니다.
14. 여전히 자신의 아픔과 상처를 꽁꽁 감춰둔 채 사는 여러분, 올해를 계획하면서 자기 생각과 자기 확신으로만 가득 차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것은 의심의 반증입니다.
나를 나 되게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세계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사용하신 분은 자기 정체성을 확실히 알고 상처를 당당히 드러낸 자들이었습니다.
상처는 감출수록 의심이 되지만, 그 상처를 드러낼수록 주님의 용서와 긍휼이 역사하기 시작합니다.
15. 설 명절입니다. 뉴스와 많은 미디어들은 한국 땅이 분열의 땅이라고 말합니다. 젊은이들은 흙수저 금수저로 비유하며 스스로 계급을 나누고, 그렇게 한국을 미워하며 떠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를 한국 사람으로 만드신 그 하나님 앞에 우리가 확신을 갖고 살기 시작한다면, 이 땅에서 해야할 일들은 너무나 많습니다.
이주 노동자들이 100만명을 넘어가는 시대에 무엇을 해야 할까. 다문화사회가 되어가는 이 나라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이혼 가정이 급증하여 가는 한부모 가정에서 내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노인 인구가 급증해 고독사하는 일이 많아지는 이 나라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학교 밖 청소년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오는 현장에서 나는 무얼 할 수 있는가. 젊은이들이 돈과 편안함만을 추구하는 현장에 감춰진 상처는 무엇일까?
설 명절, 우리들의 상처와 의심이 주님 말씀의 확신으로 채워지기를 기도드리며 축복합니다.
류한승 목사(생명샘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