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한승의 러브레터] ‘예술로 예수를’, 이제 ‘예수로 세상을’
한 명을 위하여 생겨난 학교가 있습니다. 달꿈예술학교입니다. 지난 2월 23일, 달꿈예술학교의 졸업식이 있었습니다. 오늘은 졸업식 설교 말씀을 토대로 사랑의 편지를 전합니다.
1. 달꿈학교가 개교하고 이제 1년여가 흘렀습니다.
수많은 단체의 진짜, 가짜 여부는 필요의 주체가 누구인지에 따라 갈라집니다. 가짜냐 진짜냐 달라지는 기준은 욕심입니다. 즉 누가 필요해서 만들어진 단체인가 입니다. 많은 교회나 선교단체, 학교, 즉 어떤 공동체건 누가 필요해서 만들었는지에 따라 진짜와 가짜가 달라집니다.
2. 학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너에게 필요해서 만든 학교여야 합니다. 쓸데 없는 학교 말고, 쓸데 있는 학교입니다.
학교와 함께하며 늘 가졌던 생각은, 학교가 이 시대에 필요한 학교였으면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막 2:17).
3. 필요한 학교가 되기 위한 가치관은 흔들리지 않는 곳에서 찾아야 합니다.
흔들리지 않는 것은 말씀밖에 없어 말씀 속에서 찾다보니, 눈에 들어오는 몇몇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잃어버린 양 한 마리 비유였습니다.
99마리를 자리에 두고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찾기까지 찾지 않겠냐는 말씀. 1 vs 99의 비교가 아니라 존재 하나의 가치가 회복되는 순간. 즉 상대적 존재가 아닌 독립적 존재로서의 절대 가치 말입니다.
상대적 가치의 비교로 자신의 가치를 환산하는 이 시대, 그러나 예수님의 계산은 그 누구든 독립적 가치로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독립적이고 절대적 가치로 살펴보면, 양 한마리의 가치는 99마리건 1만 마리건 달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양의 상태에 따라 가치가 올라갑니다. 지금 당장 목자가 필요하냐 아니냐입니다.
4. 공교육에서 품어주지 못해 잃어버린 학생. 꿈을 인정해 주지 않는 비교의 가치기준으로 가득찬 세상에서
꿈을 꾸는 아이를 만났습니다. 꿈 앞에 평등한 세상, 너무나 당연한 상식이 없어지는 세상에서 저는 고민해야 했습니다.
“나는 무엇을 버려야 하는가?”
“내게 있는 99는 무엇인가?”
한 아이의 독립적 가치를 회복시키기 위해 고민해야 할 것은 버려야 할 것들이었습니다. 필요한 학교가 되기 위함입니다.
5. 달꿈예술학교는 바로 그런 선생님들이 모였습니다.
뮤지컬 학원을 운영하는 선생님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분들은 본인 학원의 학생들이 있는 상황에서, 생계를 유지하고 가족을 꾸려나가야 합니다.
그럼에도 한 명을 가르치기 위해 1시간 넘는 거리를 오가며, 시간이 없어 식사도 못하시고 바로 다른 곳으로 가셔야 했습니다. 그 분에게는 우리 학교가 아프리카였던 모양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1년을 가르쳤는데 졸업 작품 하나 완성 못했던 학생에게 화 한번 안 내고 품어준 미술 선생님. 토요일마다 열린 뮤지컬 프로그램을 마련해 아이가 혼자 되지 않도록 수많은 배우들과 만나게 해준 선생님도 있습니다. 유일하게 쉬는 날, 한국사 수업을 가르친 전도사님, 덕분에 한국사 1등급까지 달성했습니다.
교육 공간이 없어, 그 공간을 마련해주기 위해 30년 살던 집을 허문 부모님이 계십니다. 그냥 허문 것이 아니고 수억의 빚을 내서 짓고는 동네에서 온갖 오해를 받아야 했습니다. 매번 다른 등교 시간에 아예 다른 약속을 잡지 못했던 선생님도 있습니다.
보이는 선생님들의 노고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학교 운영을 위해 섬기겠다며 모인 사무국 선생님들은 토요일에 모이는 2-3시간을 위해 자신의 토요일을 비우고 학교에 와야 했습니다.
이 분들이 가까운 곳에 거주하는 분이거나 한가한 분들이 아닙니다. 모두 직장 근무를 하시는 분들로 심지어 양주, 김포에서 와야 했습니다. 이 분들에게 자기 자녀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 청소년 자녀를 두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분들은 한 명을 향한 가치를 찾기까지 찾는 여정을 걸어갔습니다.
6. 지역에 학교를 알리고 소통하며, 동시에 학교 운영을 위해 카페를 오픈했습니다. 최고의 재료를 저렴한 가격에 제공하면서 지역 주민들에게나 이 공간을 오가는 모든 분에게 쉼의 자리가 되기를 바라며, 카페를 섬기는 카페지기들은 자신의 휴일을 반납하고 와서 섬깁니다.
월세도 없고, 보수도 없는데 1년 운영하고 나서 순수익을 살펴보니, 무려 1년 순수익이 약 100만원이 조금 넘습니다.
오늘 십일조를 먼저 떼어내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남은 금액은 학교에 전달되게 됩니다.
7. 선생님 한 분에게 봉사료를 많이 드리지 못해 죄송하여 이야기를 드렸습니다. 그러자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목사님. 아시겠지만 예술가들은 배고픕니다. 그런데 배고파도 무대를 올립니다. 작품을 만듭니다. 그것이 예술가입니다. 돈 때문에 어려워 마세요.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이 학교의 학교다움입니다.”
8. 이 정도면 사람들은 묻습니다.
“도대체 왜?” “이 정도까지 할 필요가?”
네, 자신의 향유 옥합을 깨트려 예수님의 발에 쏟아부은 여인을 향해 던진 사람의 말처럼 말입니다.
“그 돈이면 가난한 사람들을 더 많이 돕지?” “그 돈이면 아프리카에 학교를 세우지?” 라는 말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9.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이토록 무엇 때문에 살아왔는지, 그 대상을 다시 살펴봐야 합니다. 바로 단 한 명의 이 학교 졸업생입니다. 그 존재가 얼마나 귀한지 우리는 말해야 합니다.
“넌 우리의 전부였다. 아무것도 아깝지 않았어.”
“너 때문에 우리가 있었다.”
10. 한 명을 위해 생겨난 학교에서 한 명이 졸업하고 나니, 이제 아무도 남지 않았습니다.
텅 빈 학교가 되었습니다. 네, 정말로 보이는 것도 없는 곳이 되었습니다.
여전히 아프리카를 향한 관심보다 한 명을 위해 일하는 곳에 관심은 덜하지만 두렵지 않습니다.
저는 믿습니다. 광야에 성령이 함께하심을 믿습니다. 광야일수록 말씀으로 승리해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으로 가치관을 가다듬으려 합니다.
10. 달꿈학교의 정체성을 밝혀주는 또 다른 말씀이 있습니다. 마가복음 5장에 나오는 12살 된 소녀에게 하신 주님의 말씀입니다.
“아이야 일어나라”고 하신 그 말씀은, 그러나 그 아이에게만 있지 않음을 발견합니다. 같은 장에서 열두 해 혈루병 걸린 여인에게도 “평안히 가라” 하셨던 예수님.
더 나아가 꽁꽁 묶여서 헤어나올 수 없는 귀신들린 청년이 살던, 귀신들린 도시 거라사 지방을 바라보셨습니다.
세상 방법으로 치료 못하는 청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예수님께서 청년에게 가정으로 돌아가라 했습니다. 그러나 청년은 예수께서 자기에게 행한 큰 일을 데가볼리에 전파했습니다.
청년은 가족에게만이 아니라 돈의 노예된 세상, 그 곳을 향해 거침없이 질주하며, 예수가 자신에게 한 모든 일을 담대히 전했습니다.
11. 한 명을 위해 세워진 학교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습니다. ‘예술로 예수를’이 학교의 과정이었다면, 이제 ‘예수로 세상을’ 향한 여정이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청소년이었던 학생이 청년이 되어 이제 달꿈학교를 나감으로 달꿈인으로서의 삶이 시작된 것입니다. 본인을 일으켜 세웠던 예수님의 능력으로 담대히 세상을 향해 나아갈 것입니다.
나아가 달꿈학교도 또 다른 누군가를 위해 일어날 것입니다. 비단 청소년뿐 아니라, 그 누가 되더라도, 그가 열두해 혈루병을 앓은 사람이건, 청년이건, 주님의 관심이 담긴 사람에게 우리 학교의 시선도 갈 것입니다.
12. 사랑하는 여러분. 청년이 된 아이에게만 주님의 관심이 있지 않습니다. 비교하며 자신의 가치를 훼손했던 사람. 남의 가치 마저 어긋난 비교가치로 평가절하해버린 사람.
그래서 오늘 자신의 현장이 아프리카가 아니라, 늘 땅끝을 바라보며 오늘의 현장을 버렸던 저와 여러분의 시선이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류한승 목사(생명샘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