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욱의 ‘연애는 다큐다’ 82] ‘사랑의 언어’를 마주하는 자세
1
사람은 모든 의사표시를 말, 글, 메시지로 한다. 말을 하지 않으면 속에 있는 생각을 누가 알 수 있겠는가.
사랑에 있어서도 ‘말’이란 가장 중요한 표현 방법이며, 모든 사랑은 언어에 기대어 있다. 사랑의 말은 편지가 되고 노래가 되고 기도가 되며, 열망과 환희와 회한이 된다.
말이란 너무 많거나 너무 적으면 문제가 된다. 너무 많으면 지키기 어렵고, 너무 적으면 속을 알 수 없다. 하지만 말은 ‘많고 적음’이 중요하지 않고, 실천의 양이 그 적당함을 좌우한다.
말과 행동이 일치된다면 아무리 말이 많아도 많은 것이 아니며, 말과 행동이 불일치하면 아무리 말을 아끼는 사람이라도 그는 말뿐인 사람이 된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이라도 실천이 적으면 그는 좋은 신앙인이 아니다. 말은 적게 해도 실천이 따르는 것이 훨씬 훌륭한 신앙이다.
좋은 말을 많이 하지만 삶이 형편없는 사람보다는 말이 없어도 바르게 사는 사람이 인정받아야 하는데, 세상은 그렇지 않다. 말만 잘하면 승승장구하기도 한다. 결정적 순간에 넘어질 수는 있어도 세상은 대체로 그런 사람들이 박수를 받는다.
차라리 말도 거칠고 삶도 거친 사람이 진실성 면에서는 더 나은 사람일 수 있다. 핵심적 거취 표현이 없이 점잖은 말로 자신을 포장하고 감추는 사람이야말로 교활한 사람이며 위선적인 인물이다.
“우리가 다 많은 것에서 실족하나니 만일 어떤 사람이 말에서 실족하지 아니하면 바로 그 사람은 완전한 사람이요 능히 온 몸도 제어하는 사람이라(약 3:2).”
이처럼 말은 제어하기가 힘든 부분인데, 말하기가 어려운 게 아니라 지키기가 어려워서 그렇다.
문제는 사람이 늘 귀가 얇아서 화려한 말에 잘 현혹되고, 자기가 듣기 좋은 말을 믿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종교적 수사를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을 영적인 사람으로 자주 오해하게 된다.
2
여장부 엘리자베스 여왕의 결기를 보여주는 영화 <골든 에이지>(2007)는 사실 천주교 가톨릭과 개신교 프로테스탄트의 전쟁을 다룬 영화다. 종교개혁을 이룬 영국은 무소불위의 권력인 가톨릭 교황과 예수회가 장악한 스페인 무적함대의 침략 앞에서 열세에 몰린다.
당시 종교전쟁으로 유럽은 거의 전멸했고 영국만 남았는데, 스페인의 오만은 개신교인들이 사탄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에 해방시켜야 한다는 명분으로 정당화되었다.
무적함대는 말 그대로 무적이었기 때문에 미혼 여성의 몸으로 전쟁을 치르기는 버거운 일이었지만, 엘리자베스 여왕은 전사부터 민초들까지 설득하고 죄수까지 석방시켜 온 힘을 이 전투에 끌어모은다. 결국 영국의 올인과 바다에서의 전투 때 불어닥친 알 수 없는 바람에 힘입어, 그녀는 골리앗 무적함대에 승리한다.
그런데 스페인의 왕과 신하들은 늘 십자가를 내세우고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운다. 기도도 영국군보다 더 많이 한다.
“주여, 분노를 그치소서. 우리가 교만했나이다.”
맥없이 불타고 가라앉는 자신들의 함대를 보면서 읊조리는 그들의 기도이다. 이처럼 그들은 종교적 의전이 많고, 사용하는 말도 겸허해 보인다.
그러나 이들 세력은 셀 수 없는 종교개혁자들을 죽인 자들이며, 성경을 라틴어에서 영어로 번역하는 자들을 화형시키고 부관참시까지 하던, 천하의 악인들이다.
우리도 얼마나, 우리 주변 크리스천들도 얼마나, 말끝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는가. 하지만 깊이 알면 그 말의 양과 신앙의 신실함은 결코 정비례하지 않고 들쑥날쑥하거나 오히려 반비례하는 경우도 많음을 알 수 있다.
세상 일도 마찬가지다. 국가 안보를 가장 많이 말하는 사람들이 군 면제는 제일 많이 받았고, 애국을 가장 많이 말하는 집단도 핵심에는 원정 출산을 다니는 미국 시민권자가 월등히 많다.
사람은 다 그런 거다. 겉으로 국가를 가장 사랑한다는 사람들이 있지만 전쟁 나면 제일 먼저 도망갈 사람이 거기 제일 많을 수 있고, 친일 청산을 부르짖는 사람도 많지만 정작 다시 식민지가 되면 제일 먼저 꼬리를 내릴 사람도 바로 그들일지 모른다.
정말 그런 생각들이 있다면 목청만 높일 것이 아니라, 지금 무언가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3
사랑도 말과는 다르다. 말이 많으면 진심이 없고, 말을 아껴야 마음이 크다는 뜻이 아니다.
말을 많이 하거나 적게 할 수 있고, 성격에 따라 그 양이 다를 수 있기 때문에 행동과 배경을 잘 살펴야 한다는 말이다.
일단 전혀 무르익지 않은 상태에서 말을 앞세우고 어떻게든 찔러보는 사람은 당연히 경계해야 한다. 하지만 이미 사랑하는 사이라면 말로 사랑하고, 말로 다투고, 말로 이별하는 법이라, 말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런 순간마다 말 한 마디에 너무 많은 것을 믿거나, 반대로 너무 크게 실망할 필요가 없다.
말한 것은 지키는 사람이 있고, 의지가 약한 사람도 있다. 확신이 들어야만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일단 뱉고 보는 사람도 있고, 말할 때는 거짓이 아니었지만 금세 변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토록 복잡한 ‘말’을 한 가지 잣대로 평가하거나 내 기준에 비추어 규정해버리면 정확한 판단을 하기 어렵다.
그래서 장미를 떠나온 어린 왕자가 그 잘난 체하는 꽃의 허영심 뒤에 감춰진 연약함과 사랑을 떠나온 뒤에야 깨닫고 후회한 것이다.
“… 그 꽃이 하는 말을 가지고 판단할 게 아니라 그 행동을 보고 판단했어야 하는 건데, 내가 도망치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그랬어! 그 하찮은 꾀 뒤엔 애정이 숨어있다는 걸 알았어야 했어….”
사랑의 언어는 늘 새겨들어야 한다. 한 사람의 입에서 사랑과 증오의 전혀 다른 이야기가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상대방의 ‘말’에 따라 상황을 판단하면 낭패를 볼 수 있다. 잘못된 선택을 하고는 “전에 말하지 않았느냐’고 아무리 따져도 소용없다.
또한 나의 사랑을 말로 하려고 하면 실패하기 쉽다. 말을 잘하고, 말로 감동시키고, 말로 설득해 사랑을 잡으려 해선 안 된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이유는 그분이 말씀과 실행에 차이가 전혀 없이 공평하시면서도 사랑이 넘치는 분이라는 것이 검증되었기 때문이다.
그분이 우리 말과 행동의 일치를 무게로 달아 우리를 대하셨다면, 용서받고 살아남을 자가 없을 것이다. 이처럼 큰 사랑일수록 말에 좌우되지 않는 법이다.
사랑의 언어는 귀를 간지럽히며 유혹하고, 또 마음을 다치게 하며 아프게 한다. 한마디로 감정을 요동치게 하는 것이 바로 ‘말’이다.
그래서 거듭되는 아픈 말은 아무리 외면해도 가슴을 치고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 영영 소화가 안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에 휩쓸리면 왜곡된 눈을 갖게 된다.
사랑은 여기서 판가름난다. 사랑하면 말 너머에 있는 애정을 읽고 단어와 단어 사이 여백에 숨은 아픔도 읽을 수 있다. 가슴을 후비는 아픈 말이나 하늘을 날게 하는 사랑의 찬사에도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다시 마주하는 힘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말’ 앞에서 겪는 고뇌는 사랑하는 모든 자가 치러야 할 자기 내면의 전쟁이다. 사랑이 그 전쟁의 승패를 가를 것이다.
김재욱 작가
사랑은 다큐다(헤르몬)
연애는 다큐다(국제제자훈련원)
내가 왜 믿어야 하죠?, 나는 아빠입니다(생명의말씀사) 외 30여 종
www.woogy68.blog.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