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나 음악이나 미술에서 고전이라 하면, 오랫동안 시간의 부대낌 속에서도 건재하며 모든 시대, 많은 이의 사랑을 받는 작품들을 일컫는다.
‘일리아드’도 그 중 하나다. 수많은 신과 영웅들의 애환이 만들어낸 대서사시 ‘일리아드’의 “오디세이아”가 왜 그렇게 오랫동안 서구인들에게 회자되고 인기가 있는 것일까?
공부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호메로스(호우머)의 일리아드에 관한 이야기를 한두 번씩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당대의 교과서로 삼은 수많은 그리스(회랍)의 희극과 비극의 작가들은 말할 것도 없고 2,000여 년 동안 여러 시대와 각 나라를 넘나들며 수많은 사람들이 호메로스 작품의 테마와 상징, 또 인물과 영웅담에서 영감을 얻어냈고, 새로운 문화·예술 작품을 창작하거나 학문 영역을 확장했다.
그래서 호메로스는 영광스런 시인의 대명사이자, 영원히 탐구와 모방의 대상이요, 문학적 상상력과 영감의 원천이 되었고 현재도 역시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궁구(窮究)의 대상이다.
‘일리아드’는 역사와 신화의 경계선을 넘나든다. 작가의 허구(fiction)와 역사적 사실(fact)이 혼재돼 있다.
트로이 전쟁(Trojan war)과 트로이 문명의 실존 여부가 그러했고 고대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분포와 세력 관계의 사실 여부도 논란의 주제이다.
하지만 독일 고고학자였던 하인리히 슐리만의 1873년 발굴로 트로이 전쟁(Trojan war)은 현재 터키 영토인 소아시아 지역의 일리오스에 있었던 트로이 왕국과 필로폰네소스 반도에 산재했던 그리스 도시 국가 연합군 사이에서 10년간 벌어졌던 전쟁이었음이 밝혀졌다.
트로이 왕국의 왕자 파리스가 그리스 지역의 스파르타 왕 메넬라오스의 왕비 헬레네(Helene)를 납치해 간 사건이 전쟁의 직접적 원인이었다. 헬레니즘(Hellenism)의 어원이 의미하듯, 헬레네는 영원한 여성성의 상징으로서 서구 문학의 중요한 소재가 되었다.
이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는 사랑과 분노, 삶과 죽음이다. 전쟁 과정에서 인간 군상들이 겪는 애환에 신들이 개입한다. 그리스의 고대 신들은 기독교의 유일신 야훼와는 전혀 다른 존재이다. 사회적, 심리적 기능을 갖고 있지만, 도덕(윤리)적 기능과는 거리가 멀다.
플라톤이 추구한 지성적으로 완벽한 무결점의 신도 아니요, 초월적인 신도 아니다. 고대 그리스의 신들은 자연신으로 모든 인간사에 영향을 미쳐 모든 자연현상에 깃들어 있는 신들이다.
신들은 영생할 뿐이지 신들의 세계에서나 인간과의 관계(교감) 속에서 인간적 특성과 감성을 그대로 표출한다. 인간처럼 신들끼리도 편을 갈라 싸우기도 한다.
물론 신들의 개입이 물리적 현실이든 아니든 간에, ‘일리아드’가 무한한 영감과 흥미를 자극하는 비결은 신과 인간이 서로 얽혀 만들어내는 이런 교감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인간이 신에게 위안을 받고 스스로 격려하기 위해 신에게 의지했고 때로 자신의 실패와 불운을 신의 나쁜 개입 탓으로 합리화시킬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트로이 전쟁을 지배하는 가장 큰 동기와 힘은 ‘분노’이다. 파리스에게 아내를 빼앗긴 메넬라오스의 분노, 자신의 전리품이자 사랑하는 브리세이스를 아가멤논에게 빼앗긴 아킬레우스의 분노, 자신의 시종이자 절친인 파트로 클로스를 죽인 헥토르에 대한 아킬레우스의 분노가 뒤엉켜 트로이 인들과 그리스 인 사이에 피의 보복을 부르는 전쟁의 원인이 되고 있다.
사랑과 신뢰, 그리고 우정을 잃어버린 데 대한 분노가 계속 확대 재생산되는 비극이라 할 수 있다.
호메로스는 이들의 분노를 신들이 더욱 부추기게 하지만 인간들 스스로 분노를 녹이는 화해를 만들어내게 하고, 마지막엔 생자필멸의 한계를 깨닫게 하여 겸허하게 죽음을 맞이하게 만든다.
또 신들의 예언과 파트로콜로스 및 헥토르의 장례식을 통해 그 어떤 영웅호걸도 결국은 죽을 수밖에 없다는 운명을 겸허히 수용하게 만든다(박경귀의 <고전 읽기: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김형태 박사(한국교육자선교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