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덕영 칼럼
프톨레미의 지구 중심설
먼 옛날 사람들은 지구가 무엇엔가 고정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은 고대 이집트의 천문학자 프톨레미(Ptolemy:주후 100-170년 경)가 제안한 이론 때문에 생긴 것이다. 그는 천문학적 지식을 모은 저서 《천문학 집대성 Megalē Syntaxis tēs Astoronomias》을 썼는데 아랍어역본(譯本)인 《알마게스트 Almagest》로 명성을 얻으면서 그의 책은 코페르니쿠스 이전 시대까지 최고의 천문학 이론서로 활용되어졌다.
그는 지구가 우주의 고정된 중심이고 별이나 그 외의 모든 행성들은 지구 주위를 돌고 있다는 천동설을 주장하였다. 즉 그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으로 태양계의 천체들은 달·수성·금성·태양·화성·목성·토성의 순서로 자리하고 있다고 여겼다. 지구와 태양의 위치가 서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로서는 대단한 관찰력이라 할 수 있겠다.
지구는 편평한가 구형인가
물론 이 같은 주장은 지구가 중심이라는 의미이지 편평하다는 생각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헬라의 아리스토텔레스(주전 384-322)나 소수를 발견하고 지구 둘레 길이를 측정했던 에라토스테네스(주전 273-192년 경) 같은 철학자들과 성 어거스틴(주후 354-430), 암브로시우스(340-420년 경) 등 교부들은 지구가 구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토마스 아퀴나스(1224년/1225년-1274년)도 자신이 추종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을 따라 지표면의 다른 곳에서 별자리의 위치가 변하는 것이 지구가 둥글다는 증거라고 생각했다. 다만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는 경주 속에 모든 이방 지식은 방해거리라고 보았던 락탄티우스(240-320년 경)는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구가 고정되어 있다는 일반적 생각은 마치 정설처럼 16세기까지 계속되었으며, 당시 유럽의 종교 지도자들도 지구는 당연히 우주의 중심이며 성경도 그것을 뒷받침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만일 당시에 지구가 태양을 도는 태양계의 한 행성이라고 누군가 주장했다면 그것은 당시 사회를 지배하던 로마 카톨릭 지도자들에 대한 엄청난 반역 행위였으며 매우 충격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이 당시로서는 놀랍고도 혁명적 주장을 편 사람이 결국 나타났다. 바로 코페르니쿠스(Nicholas Copernicus:1473-1543)였다.
지금까지도 사람들은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이 생각했던 천동설 때문에, 정말로 성경에는 지구가 움직이지 않는 평평한 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오해를 하곤 한다. 그렇지는 않다. 우리는 달이든 태양이든 많은 구형의 천체를 늘 보고 있지 않은가. 성경 시대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북편 하늘을 허공에 펴시며 땅을 공간에 다시며"(욥기 26:7).
코페르니쿠스의 어린 시절
코페르니쿠스는 폴란드의 상업 중심지였던 북쪽 토룬이라는 지방에서 사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당시 부유한 상인이면서 마을의 행정관을 평생 동안 지낸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열 살 되던 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코페르니쿠스는 카톨릭 주교였던 외삼촌의 도움으로 학업을 이어가게 된다. 외삼촌 왓첸로데는 폴란드의 카톨릭 4대 교구 중 북부에 위치한 바르미아 교구의 주교로, 조카인 코페르니쿠스가 신부가 되기를 원했다.
코페르니쿠스의 학업 여정
어릴 적부터 총명하고 순종적이었던 그는 외삼촌의 권유대로 외삼촌이 졸업한 당시 폴란드의 수도요 유럽 문화의 중심지였던 크라코우 시에 있는 수학과 천문학의 명문 크라코우 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그러나 학교를 마치기도 전에 그는 외삼촌의 도움으로 유럽 최초의 대학이었던 이탈리아 북부 볼로냐대학으로 옮겨 교회법을 공부하였으며, 그 후 폴란드 프롬볼크 시 프라우엔브루크 대사원의 신부가 된다.
비록 정식 사제는 아니었다고 일부 알려지고 있지만, 교단의 일원이 되어 사제와 동등한 지위를 그는 일생 동안 지니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의 관심은 역시 교회법보다는 크라코우 대학 시절부터 관심을 가진 천문학이었다. 이탈리아에서 공부하는 동안 코페르니쿠스는 그의 평생에 영향을 준 유명한 천문학자 노바라 교수와 친구가 되었는데, 그는 프톨레미의 천동설을 부정한 사람이었다. 노바라 교수와 사귀면서 코페르니쿠스는 지구가 우주의 물리적 중심이 아니고 태양의 주위를 도는 행성임을 확신하게 된다. 이때부터 그는 천문학을 체계적으로 공부하며 천체를 관측하는 방법을 정확히 익히기 시작한다. 또한 천동설을 좀 더 명확히 알기 위해 희랍어도 배우기 시작하였다.
당시의 천문학은 의학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카톨릭 교구의 재정적 도움으로 공부를 하던 코페르니쿠스는 의사가 부족했던 당시에 '훈련된 의사로 봉사하겠다는 조건으로 계속 공부할 수 있는 길을 열어달라고 교구에 요청'하였으며, 허락을 받아낸다. 코페르니쿠스는 당시 가장 유명했던 파두아 대학과 페레나 대학을 거치며 학업을 계속하였고, 그러는 도중 월식을 관찰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리고 대학에서 강의할 기회도 얻게 된다. 나이 서른이 되어 이미 그는 천문학뿐 아니라 교회법, 고전, 수학, 형이상학, 언어학 등의 전문가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고국 폴란드에서의 코페르니쿠스
1503년 고국 폴란드로 돌아온 그는 주교인 외삼촌의 일을 도우면서 의사로 봉사하게 되었다. 따뜻한 성품에 놀라운 의술을 지녔던 그에 대한 소문은 금세 주위에 알려지기 시작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아왔고, 무엇보다 가난한 사람들을 무료로 치료해 주고 약도 그냥 나누어 주는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의사였다.
의사로 봉사하면서도 지속적으로 천체 관측 연구에 몰두한 그는 다방면의 전문가였다. 당시 통용되었던 화폐에는 값비싼 은이 섞여 있었다. 이 사실을 모르던 농민들은 이 동전을 그대로 사용하였는데 이 사실을 아는 약삭빠른 사람들은 그 동전을 녹여 은을 제거한 후 새 동전을 만들어 유통시키기 시작했다. 이것은 경제에 나쁜 영향을 주었으며 선량한 농민들에게만 피해가 갔고 피해는 계속 늘어났다. 코페르니쿠스는 은이 섞인 이 동전을 모두 거두어들여야 함을 주장하는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1516년 독일서 생겨난 정치․군사적 종교 집단이었던 튜톤 기사단이 바르미아의 프롬볼트시를 공격하였을 때는 성 안의 교회 재산 관리자로서 이들을 맞아 싸우며 시민과 농민들을 보호한 강직하고도 용맹한 사람이었다. 그는 이 일로 바르미아의 지사로 추대되기도 하였다.
천문학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의 관심
외삼촌이 세상을 떠난 후 그는 프라우엔브루크로 돌아왔는데, 이곳 사원에는 천문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천문학에 관한 그의 열정은 끝이 없었다. 그런 가운데 코페르니쿠스는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돈다는 확신을 수학적으로 정리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는 이것들이 세상에 알려질 경우 세상 사람들이 받을 충격에 대해 계속 고민하는 섬세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다.
이런 가운데 그는 독일에서 온 한 수학자를 만나게 된다. 개신교인 루터교를 믿는 비텐베르그의 루터란 대학의 수학 교수 레티쿠스였다. 역사를 통해서 잘 알다시피 당시 카톨릭 교구들은 루터교를 강력히 반대하고 있었다. 코페르니쿠스는 이 문제에 관용적이었기 때문에 그와 급속히 친해지게 된다. 레티쿠스는 코페르니쿠스의 새로운 우주론에 큰 감명을 받았다.
"코페르니쿠스 신부님! 이렇게 놀라운 발견을 왜 세상에 알리려 하지 않습니까?"
"아직 보완할 부분이 많고 나는 정통 천문학자도 아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무어라고 평할지 고민입니다. 또 인쇄할 곳도 마땅치 않고---"
"아닙니다, 신부님! 이것은 참으로 위대한 발견입니다. 정 그러시다면 제 글에 일부를 인용해도 좋겠습니까?"
1540년, 레티쿠스는 <첫 번째 설명>이라는 제목으로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간단히 소개하였다. 이 작은 책은 많은 사람들의 흥미를 끌게 된다.
코페르니쿠스적 우회
"신부님, 이제 이 논문을 출판할 시기가 왔나봅니다. 제 친구가 이 일을 주선해 주겠다고 합니다."
레티쿠스는 코페르니쿠스의 원고를 당시 인쇄술이 발달한 독일에서 출판되도록 친구 요한 페트레우스에게 위탁하였다. 책의 인쇄가 진행되고 있던 1542년, 레티쿠스는 라이프치히의 교수로 가게 되어 책의 출판 지도를 계속할 수 없게 되자 당시 유명한 루터교 목사였던 오시안더에게 이 일을 부탁하게 된다. 오시안더는 수학과 천문학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었다.
오시안더와 코페르니쿠스는 편지로 의견을 나누었는데 다음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오시안더, 지구가 움직인다는 나의 논문이 책으로 나온다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나 프톨레미를 따르는 사람들이 얼마나 분노를 할까요?"
"코페르니쿠스 신부님, 저에게 이 일을 맡겨 주십시오. 이것은 진리입니다. 다만 이것은 천체 운동의 법칙을 정확히 알리는 한 가지 목적이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하여 <천체의 운행에 관하여>라는 이름으로 이 역사적 논문은 출판이 준비되었다. 오시안더는 "독자들에게"라는 이름으로 다음과 같이 서문을 쓰고 있다.
"이 가설들이 반드시 참이어야 할 필요는 없으며, 실제로 참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가설들은 관찰된 사실을 잘 설명하는 계산된 수치를 잘 제공하고 있다."
이 내용은 당시 종교 재판관들의 눈길을 피하기 위해 오시안더가 마치 저자의 글인 것처럼 삽입한 것이었다. 그런 방식은 아무도 이 위대한 천문학적 업적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지 참뜻을 깨닫지 못한 채 코페르니쿠스를 종교 재판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효과가 있었다. 이것이 바로 후세 사람들이 <코페르니쿠스적 우회>라고 하여 널리 전하는 내용이다. 코페르니쿠스는 또 교황 바오로 3세에게 직접 이 논문을 바치고 있다.
"존경하는 교황님께,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창조하신 우주에 관한 종래의 학설이 불충분한 점을 안타깝게 여깁니다. 지구가 움직인다는 것을 이야기한 이 책은 세상 사람들이 읽게 되면 제 생각이 틀렸다고 저를 추방하려고 할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어떤 비판도 그대로 감당하겠습니다. 하지만 먼저 이 천문학적 연구를 교황님께 바치고자 합니다. 제가 사는 이 먼 곳에서도 교황님은 하나님께서 주신 성직과 학문을 사랑하시며 수학에 깊은 조예가 계신 뛰어난 분이라고 알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코페르니쿠스의 연구는 낡은 천문학에 종지부를 찍었을 뿐 아니라 새로운 천문학을 여는 시발점이었다. 그러나 소수 천문학자들만이 그러한 사실을 이해하였기 때문에 즉각적인 충격이 없이 코페르니쿠스는 무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미 코페르니쿠스는 여생이 다한 노인이었다. 오직 레티쿠스 만이 이 논문의 위대함을 잘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코페르니쿠스의 말년
코페르니쿠스는 다음 세대에 하나님을 믿었던 유명한 과학자들인 케플러와 갈릴레이의 연구에 역사적으로 중요한 기초를 제공한 셈이었다. 코페르니쿠스는 기독교 신앙과 과학 사이에 아무런 갈등 없이 교구의 성직자로 40년간 각별한 헌신과 봉사로 교회를 섬기면서 연구에도 몰두한 사람이었다.
그는 "우주는 지극히 선하신 하나님께서 질서 정연하게 우리를 위하여 만드셨다"고 하였으며, 또 "나의 이론이 어렵고 대중의 의견과 매우 모순되는 듯하나 하나님의 도움으로 더욱 대낮처럼 밝고 분명하게 수학을 모르는 사람도 이해할 수 있도록 밝힐 것"이라고 그의 책에서 주장하고 있다. 미즈와라는 사람은 "그는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를 그 자체로 사랑한 순수한 과학자였다"고 했다.
연구 중에도 교회의 분열을 보며 항상 슬퍼했던 이 과학자는 말년에 중풍에 걸리게 된다. 안타깝게도 인쇄되고 있던 자신의 책을 한 줄도 읽어보지 못한 채 눈을 감게 된 것이다. 그는 임종하면서 친구들에게 책 몇 권을 증정하였으며, 나머지 장서들은 모두 성당에 기부하였다. 그리고 모든 재산은 결혼한 누이에게 남겨주게 된다.
그러나 그는 이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도 값진 더 큰 유산을 남겼다. 그것은 새로운 천문학과 과학 시대의 출발을 알리는 위대한 유산이었다. 그는 종교인으로서 화가와 시인으로도 활동하였으며, 진실 된 의사요, 경제학자, 정치가, 군인으로 그리고 과학자로서 다방면의 삶을 살던 사람이었다.
그의 친구 기세 주교는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주신 그의 순결한 영혼, 고결함 그리고 박학다식함에 빚을 지고 있다. 그는 우리들에게 사랑과 감사를 넘치게 한 친구였다"고 그를 평하고 있다.
그가 살던 프롬볼크 성당에서 장사된 그의 무덤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
"하나님, 바울에게 허락하신 은혜와 베드로에게 베풀었던 은총을 바라지는 않습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의 도둑에게 보여 주고 베풀어 주셨던 그 은혜만이라도 주옵소서!"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조직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