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르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라 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리라 하셨느니라(사도행전 1장 11절)”.
오순절이라고도 불리는 성령강림절입니다. 성령을 보내시기 전, 성경은 주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셨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라는 말씀을 읽으며,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교회에 다니는 성도들아, 어찌하여 하늘만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볼 생각이 없느냐”라고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주님의 승천과 다시 오실 사이의 시기를 ‘교회의 시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승천하심으로 주님이 우리 곁에 계시지 않는다는 두려움과 공포, 그리고 당혹감 때문에 찾아오는 불안은 예수님 당시나 지금 똑같습니다.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에베소서 1장 22-23절)”.
교회의 머리이자 교회를 충만케 하시는 이는 그리스도라고 노래하지만, 출발하는 교회의 시기는 주님의 승천 후에 나타나는 주님이 부재라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을 신뢰하고 사랑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부재라는 당혹감은 그 옛날 제자들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어려움 역시 어떤 면에서는 그 때보다 더 힘들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고 믿습니다. 하지만 우리 믿음이 약해지거나 공동체에서 믿음의 결속이 해이해질 때, 마치 주님이 안 계신 것 같은 당혹감을 삶 속에서 느끼게 됩니다.
이 당혹감을 메우고자 성도들과 교역자 간의 서로 친교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만, ‘지혜와 계시의 영’이 아니라면, 그렇게 우리가 지니게 된 희망이 아니라면, 그리스도의 부재라는 당혹감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믿음은 주님의 부재를 주님의 현존으로 바꾸어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수많은 당혹감 앞에서도 이렇게 질문해야 합니다. 주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주님의 뜻에 순종하여 행할 때, 교회가 지닌 당혹감은 주님 현존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특히 교회 안에서만 주님의 이름으로 친교할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 나아가 주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과도 함께 어울려 친교해야 합니다. 그들의 삶 속에서 함께 어우러짐으로, 사랑이 무르익는 것입니다.
늘 교회 안에서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은 눈빛으로 시작하여 가슴과 진한 감동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표현과 실천이 없는 사랑은 허구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죄를 짓는 일은 갈수록 어렵지만, 사랑은 하면 할수록 쉬워지는 것임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거짓말을 한 번 하게 되면, 그 거짓말은 또 다른 거짓말을 낳습니다. 그러다 보면 만성이 되어 더 큰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결국 파국으로 치달으며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되는 이유는, 입술만으로 사랑을 외치는 자들 때문이며, 그 중심에는 주님이 부재중인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은 처음에는 어려운 것 같지만, 나를 내려놓고 마음을 열면 누구나 가능한 것입니다. 남녀노소 빈부 차이를 극복한 사랑은 불꽃처럼 타오르며, 쉽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사랑은 아름다운 질서를 유지하며, 함께 어우러져 기쁨을 충만케 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3-44)”.
대개 미움은 나의 이익에 부합되지 않고 나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생깁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장로와 권사 등 항존직 선출 과정에서 자신에게 투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를 미워하여 거들떠보지도 않으려는 사례들이 흔히들 발생하지 않습니까.
법정 투쟁이나 개인적 원한 때문에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진 사람을 보통 원수라고 부릅니다. 그 원수의 소유물인 길 잃은 나귀나 소를 보았을 때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옳겠습니까. 생각 같아서는 그 소나 나귀를 멀리 쫓아버리거나 죽이고 싶은 충동을 누구나 갖고 있겠지만, 신명기 22장 1-4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원래 주인인 원수에게 돌려주라고 명령하십니다.
만일 구약 시대 이스라엘 사람이 자기 원수와 짐승들이 길 잃은 것을 보았다면 그것을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합니다. 만일 그 짐승이 과중한 짐으로 엎드러진 것을 봤을 때도, 다시 그 짐승을 도와주라고 말씀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나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나 짐을 싣고 가다가 그것이 엎드러진 것을 봤을 때도, 못본 체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를 도와서 짐을 부리라는 것입니다.
형제의 잃어버린 것을 발견했을 때는 그것을 돌려주라고 명령하십니다. 나아가 그것이 설령 원수의 것이라도, 이 규례와 명령을 적용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신 22:1-4). 성경에는 그 좋은 예가 있습니다. 다윗 왕과 선지자 나단의 이야기를 참조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러므로 너는 거짓된 풍설을 퍼뜨리지 말며 악인과 연합하여 위증하는 증인이 되지 말며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며 송사에 다수를 따라 부당한 증언을 하지 말며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해서 편벽되이 두둔하지 말지니라(출 23:1-3)”.
이 말씀은 사회 정의와 사회 복지에 대한 법규입니다. 사회 정의를 추구하는 일은 개개인의 올바른 도덕성과 공정한 처신으로, 좌로나 우로나 치우쳐서는 안 되는 것을 기초로 하는 말씀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공생애 기간에 직접 눈으로 주님의 말씀과 행적을 3년간이나 보고 들었으면서도 주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의심했던 도마처럼, 믿음이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보지 않아도 믿는 자가 되어 라는 주님의 거룩한 당부를 우리 성도들은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지금 한국교회 안에는 많은 좋은 교회들이 있습니다. 그 좋은 교회들의 좋은 모습을 본보기로 우리는 변해야 할 것입니다.
헛된 것들을 위해 귀한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참된 신앙을 위해, 주님의 사랑을 위해, 지금도 세상에서 갈급해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퍼뜨리는 이 땅 모든 신앙인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놀라운 기적과 은혜를 경험한 후, 서서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던 ‘갈릴리 사람들’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