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한승의 러브레터] 영적 성장단계: 청년기
샬롬, 오랜만에 드리는 편지입니다. 오늘은 영적 성장단계 중에서 청년기에 대해 나누어 보려 합니다.
1. 태아의 시기가 인내의 시간, 믿음의 시간이라면, 아동기는 존재의 귀함이 무엇보다 중요한줄 알아 함께 교제하고 노는 단계입니다.
청소년기는 친구의 중요성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등의 관계가 구현되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진짜 친구를 만들기 위해 자신의 것을 기꺼이 내주고, 혈통 너머의 관계에 눈을 돌립니다.
이제 청년기인데요. (장년기는 지난번 사랑의 편지에 다루었지요.) 청년의 시기는 사랑이 필요한 시간입니다. 청년이 되면서 모두가 사랑이 시작됩니다.
2. 청년의 시기는 자유라는 환경과 능력이라는 지성, 아름다움이라는 육적인 모든 것이 조합되는 상황이기에, 서로를 사랑하기 가장 쉬운 시간입니다.
그런데 육적인 사랑과 관계로 인해 놓치기 쉬운 것이 ‘영적인 사랑’입니다.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을 좇아 사랑하다, 정말 필요한 영적인 관계를 놓칩니다. 어쩌면 그것이 가장 필요한 순간인데 말이지요.
3. 그래서 이 시기에는 ‘참된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사랑은 경험하며 얻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과의 싸움과 끝없는 자기 부인을 통해 사랑해야 합니다.
자신의 욕심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사람만 바른 사랑을 구현할 수 있습니다. 생각하면서 사랑하지 않으면 자신의 사랑하던 방식대로 생각하게 됩니다.
어린아이 시기에는 부모의 사랑이 전부라면, 청소년 시기의 사랑은 그보다 넓은 친구관계로 이어집니다. 청년 시기의 사랑은 그 사랑을 완성해 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내 마음대로 할 자유와, 육적인 아름다움과 지성.
이 놀라운 시간과 특권을 잘못사용하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능력과 자유로움을 구속받아 사는 불쌍한 청년의 시기, 여전히 청소년기의 모습으로 삽니다.
4. 우리는 이미 청소년기에 ‘평등’의 관계가 중요함을 배웠습니다. 우정을 통해 혈육관계 너머에 있는 ‘평등’을 배웠다면, 이제 그 평등이 ‘사랑’으로 구현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자립’입니다.
사람을 올바로 사랑하기 위해 ‘자립’해야 합니다. 자립한다는 것은 단지 ‘이제 나 혼자 돈 벌어’의 의미가 아닙니다. ‘이제 나 사랑하는 사람 생겼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기독교인들조차 자립을 위와 같이 생각하는데, 올바른 자립은 곧 바른 사랑의 관계를 구현하기 위해 종속적 관계를 점검하고 스스로를 개혁하는 것입니다.
5. 내가 바르게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반드시 내가 종속되어 있었던 그 사람과의 종속적 관계에서 자유해 져야 합니다.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신 5:15)”.
이스라엘 백성들이 420년간 이집트(애굽)에 살면서, 자기 정체성을 ‘종’ 이라고 규정합니다. 하지만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종과 주인의 관계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 형제요 자매. 모두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래서 광야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사람의 종처럼 지냈던, 종속적 관계로 살았던 지난날을 정리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를 자유케 하시는 하나님의 자녀로, 그분 아래 평등한 사랑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6. 또 중요한 것은 사람을 올바로 사랑하기 위해 꼭 필요한 자립은 ‘물질의 집착’에서 자립하는 것입니다.
광야는 먹을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달라고 해서 주신 것이 만나와 메추라기뿐입니다. 그런데 그 음식이 아무리 맛있다 한들, 1년 365일 같은 음식을 먹는다면 우리에게 행복이 될수 없습니다.
광야에 있던 120만여명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음식도, 물질도, 절대 행복의 조건이 될 수 없음을 배운 것입니다. 음식은 음식으로, 돌은 돌대로, 하나님 만드신 대로 자립해서 사는 것. 그 목적대로 사는 것이 올바른 자립입니다.
목적대로 산다는 것은 바로 사람이 사랍답게 사는 것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하나님은 두가지 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라”. 즉 바른 사랑을 하는 것이 사람답게 사는 길입니다. 그 사랑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관계 없이는 구현될 수 없고, 사람을 바로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7. 먹는 것은 일용할 양식일 뿐, 우리는 살기 위해 먹는 것입니다. 따라서 먹고 마심을 통해 물질에 얽매인 자기 욕심을 버림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먹을 것 없는 광야에서 먹을 것을 주심으로 안식일과 이어지게 하셨고, 이웃 사랑을 구현하게 하셨습니다. 이웃 사랑은 만나와 메추라기를 쌓아두지 않음으로써, 나누어 먹을 수 있는 사랑을 매일 가정에서 실현하게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선교를 ‘아프리카’라고만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봉사를 특별한 곳, 특정한 시간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사랑의 마음이라면, 오늘 여러분이 서 있는 곳에서 일용할 양식을 구현하십시오. 오늘 여러분들의 밥값을 어떻게 사용하느냐, 여러분의 휴가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이 자리는 사랑의 자리가 될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되지 않는 사람, 즉 올바른 물질 관계, 사람 관계가 정립되지 않은 사람이 봉사와 사랑을 특정한 시간과 특정한 장소라고 생각한다면, 실제로 여전히 사람에 얽매이고 장소에 얽매이고 물질에 얽매인, 자기 자립이 구현되지 않음을 모르는 것입니다. 바로 그 자기 욕심과 싸워야 합니다.
7. 생각보다 참 많은 청년들이 부모로부터 종속적 관계로 살다, 자신이 오늘 사랑해야 할 대상을 놓칩니다. 생각보다 참 많은 청년들이 서로를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연인간의 사랑이 종속적인 관계임을 놓치고 서로를 자신의 구속 하에 두려합니다.
정말 많은 청년들이 선교와 봉사라는 미명 하에 여전히 애굽과 이집트의 노예 된 자기 자신을 부인해야 함을 모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청년의 시기는 딱 한 사람만 바라보는 시간은 아닙니다. 그 시간을 준비하는 단계입니다. 청년의 시기는 일이 목적이 되는 시간도 아닙니다. 그 시간을 준비하는 단계입니다. 그것은 장년의 시기에 결정됩니다.
이전까지 ‘사랑이 무엇인가’를 배우는 시기이고,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단계입니다.
만약 청년 시기에 ‘올바른 사랑’을 구현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와 외부와 싸우지 못한다면, 그 사람의 사랑은 한 명을 통해 만인을 사랑하는 주님의 마음이 아니라, 한 명을 소유하기 위해 만인을 버리는 집착의 가정을 창조하게 됩니다.
그 가정은 소유의 사랑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썩을 수밖에 없고, 그 사랑은 버림이기 때문에 생명을 창조할 수 없습니다.
8. 그래서 청년의 시기에 사랑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사랑 안에서 그 사랑을 배워나가야 합니다.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전 12:1-2)”.
사랑의 편지를 받는 여러분, 혹시 연인 관계인 분이 있으십니까? 지금 당장 하나님 안에서 사랑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오직 하나님만 유일한 ‘자립자, 자존자’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당신 자신을 소개하기를, “I am who I am”이라고 소개하셨습니다. 즉 “나는 자존자다! 나는 나 자신이다”.
이 말을 왜 하셨겠습니까? 모세의 마음 속에 “나는 능력없어, 나는 정말 저 사람들을 보기 싫어”라는 증오의 마음. 무능력한 자존감이 바닥에 있음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애굽의 왕자로서의 삶은 그리울 수 있지만. 그 애굽과 맞서 싸워야하는 자기 자립의 정신이 결여된 모세에게 애굽을 의존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광야의 삶에서 만나게 된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을 버리고 자신을 조롱하고 미워할 게 뻔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만나기 싫어하는 모세에게, 지금의 나태함에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 세상은 모두 서로에게 의지하고 이끌리는 관계인 반면, 하나님만 홀로 유일하게 영원하신 분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에 있는 사람만 사랑의 선택에 현명할 수 있습니다.
9. 그래서 비로소 자립한 사람은 생각하게 됩니다. “나는 무슨 일을 해야 하는가?”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왕자처럼 군림했던 애굽과 맞서 싸움을 선택했습니다.
모세는 보기 싫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돌아가기 위해 자기 자신과 싸워야 했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꿈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아니 자존자이신 하나님이 꿈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청년의 시기는 ‘꿈’을 위해 목숨 거는 시기입니다. 꿈, 가슴 설레게 하는 이 단어 말입니다.
물질의 노예에서 해방된 자는 그 너머를 꿈꾸게 됩니다. 사람의 노예에서 해방된 자는 그 너머를 바라게 됩니다.
10. 지난 주간 저는 장년의 시기에 대해 나누었습니다.
일을 해야 하는 시기. 한 사람을 바라보는 시기…. 그런데 바로 이 청년 시절의 고민이 사라진 장년. 바른 고민이 사라진 가정은 여전히 자기 자녀도 종속적 관계로 양육하고 교육시킵니다.
자기 생각대로 자기 뜻대로, 결국 관계는 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신뢰가 사라지고 믿음이 사라진 관계에는 사랑이 생길 수 없습니다. 사랑이 없는 믿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서 돈을 벌어주어도, 관계가 벌어집니다.
자녀는 결국 성장해 청년이 될 때 가정에 복수하게 됩니다. “나도 내 멋대로 살거야!”
그 자녀도 돈을 좇아 삽니다. 자녀도 결국 자기 유익을 좇을 겁니다. 세상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토록 후회하던 어른들의 어제가 이제 자녀들의 미래가 되었습니다.
11. 사랑하는 여러분, 청년 시기에 고민해야 할 사랑, 자립, 꿈에 대한 고민으로 돌아가십시오. 그래서 사랑해야 할 대상을 바르게 사랑하기 위해 스스로와 싸우시기 바랍니다.
사랑해야 할 대상을 사랑하기 위해 여러분을 노예처럼 부리고 있는 외부와 맞서 싸우시기 바랍니다. 영원한 자립자, 자존자이신 하나님 안에서 꿈꾸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류한승 목사(생명샘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