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은 빛을 싫어하지만, 빛은 어둠을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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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한승의 러브레터] 어른이 된다는 것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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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돌아보니 가을 하늘이 한 걸음 훌쩍 내디뎌 우리곁에 온 느낌입니다. 언제까지나 여름일 것 같았는데, 가을이 코끝을 간지럽히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주간 청년 시기에 점검할 것이 곧 사랑이고 꿈이라는 것을 나누었습니다. 그것을 위해 ‘자립’해야 한다는 것을 말이지요.

이후 삶은 사실 똑같습니다. 내가 사랑한 그 대상과 한 가정을 이루는 장년, 그리고 노년이 되면서 우리들은 무엇이 달라지는 것일까요.

오늘 사랑의 편지에서는 어른이 된다는 것을 보고자 합니다. 그 사람은 무엇이 달라질까요.

해답은 간단합니다. ‘더 많은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1. 세상 모든 것에는 바름과 바르지 않음이 공존합니다.

삐뚤빼뚤 차선을 지키지 않고 막무가내로 내지르는 도로 위 무법자를 보면서 우리는 바른 운전이 무엇인지 돌아보게 되듯, 바르지 않은 모습들을 통해 나의 바름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랑에도 바른 사랑과 바르지 않은 사랑이 있습니다.

2. 하나님이 어둠을 만드셨습니다. 어둠과 빛의 차이점은 딱 하나입니다.

어둠은 빛을 싫어하지만, 빛은 어둠을 향한다는 것입니다. 어둠은 빛의 존재 속에서 자신의 존재가 사라지지만, 빛은 어둠 속에서 자신의 존재가 빛이 납니다. 그래서 빛은 어둠을 향하고, 빛은 어둠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3.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독생자는 곧 빛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혼돈과 암학가운데에 있던 이 땅에 ‘빛’을 창조하셨습니다. 말씀의 빛이 이 땅에 임하자 ‘질서’가 생겼습니다. ‘질서’는 그러므로 빛이 어둠을 향할 때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질서, 말씀의 빛이 무엇인가를 곰곰히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것이 이 땅을 다스릴 유일한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4. 어느 날 율법사가 예수님께 다가와 묻습니다. “선생님. 도대체 수많은 말씀의 법칙들, 하나님 말씀하신 것들 중 뭐가 가장 중요한 것입니까?” 즉 말씀에서 질서를 정돈해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곧바로 대답하셨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해서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우선이다. 그리고 둘째도 이와 같은데,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나님의 말씀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이 말씀을 요약하면, ‘하나님 사랑, 사람 사랑’이라고 우리는 배우지 않았습니까?

그걸 다시 요약하면, 말씀을 다 요약해서 지켜야 할 것이 뭔가. 한 마디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기자는 하나님 당신이 곧 ‘사랑’이시라고도 표현합니다.

5. 그렇다면 사랑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신명기 10장 13절입니다.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배를 잘 드리고 기도를 열심히 드리고 찬양을 뜨겁게 하건 안하건, 상처받고 힘을 잃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완전하신 분이세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면 지킬수록, 우리에게 행복이 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상하게 말씀에 집중하면 집중할수록, 나에게 깨달음이 있지 않습니까? 사탄은 바로 그 말씀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찬양을 큰 마음 먹고 남 눈치 안보고 뜨겁게 부를 때, 은혜가 더하지 않던가요? 사탄은 그래서 그 찬양을 드리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기도를 용기내서 뜨겁게 시작하면,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은혜가 있지 않던가요? 그래서 사탄은 기도하지 못하게 막습니다. 다 여러분이 행복해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6. 여러분. 마찬가지로 사탄은 여러분이 바른 사랑을 구현하지 못하도록 막습니다. 어떻게 막을지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사탄은 우리에게 ‘교활한’ 존재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사탄은 늘상 보는 일상 가운데 숨어 있습니다. 마치 에덴동산 가운데 늘 있던 뱀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가장 사랑하는 여인의 언어가운데 있고,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의 용기 가운데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탄은 여러분에게 눈치채는 존재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사탄이 사랑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다면, 그건 가장 쉬운 전략이겠지요.

7. 사탄은 여러분들이 ‘바른 사랑’을 하지 못하고 ‘어긋난 사랑’을 하도록 시험합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시험은 늘 따릅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가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어둔 세상에 빛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을 다스리는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처럼 보이는 또 다른 사랑으로 유혹하게 됩니다.

8. 무엇이 바른 사랑인가?

첫째로, 바른 사랑은 생명으로 이어져야만 합니다. 창세기 1장 27-28절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시고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복을 주셨어요. 그 복이 곧 말씀을 지킬때 받게 되는데, ‘생육하고 번성하는 복’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이 땅의 동식물을 만드시면서도 같은 복을 주셨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는 복’,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사랑으로 구현되는 일입니다. 사랑한다면서 생명으로 이어지지 않는 관계는, 바른 관계가 아닌 자기 욕심입니다.

둘째로, 바른 사랑은 너를 위해 자기를 버릴 줄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를 버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내가 죽는 사랑이 있습니다. 바로 솔로몬에게 다가온 두 여인입니다. 한 생명을 놓고 갈라서라도 소유하겠다는 여인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요, 이 생명을 내가 갖지 않더라도 살리겠다는 여인의 사랑은 사랑입니다.

전자는 소유하더라도 바른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후자는 이별이어도 아름다운 사랑입니다.

어떻게 자기를 버릴수 있는가? 의문을 품을 수 있습니다. 자기를 기꺼이 너를 위해 희생할 수 있는 사랑은, 나 자신이 바른 사랑을 구현하면 하나님이 나를 책임져 주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처럼, 바른 사랑은 결국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시고 죽이신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땅에서 일어나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구현되는 자유와 사랑을 점검해 보십시오. 내가 이 사람과 결혼하게 해달라고 간절하게 요청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그 사람을 위해 나는 무엇을 버릴 수 있는가?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요구하는 사랑으로 이 땅이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생각하지 않으면, 그 사랑은 바르지 않은 욕망에 불과함을 뒤늦게 깨닫습니다. 생명의 역사는 나타나지 않고, 욕망의 잔재만 확장될 뿐입니다.

셋째로, 바른 사랑은 협착이 아닌 확장이어야 합니다.

최근 연세 있으신 분들이 많이 생기는 병 중 하나가 ‘척추관 협착증’입니다. 말 그대로 척추관이나 신경근관이 좁아져서 통증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경이 잠시 마비되거나 극심한 통증으로 다리의 마비증상이 옵니다. 즉 척추관이라는 아주 작은 공간이 좁아지면 사람이 걷지 못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랑을 한다면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삶의 반경이 좁아지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만드신 이유를 생각해야 합니다. 같은 사람이 서로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다름을 통해,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 다름이 하나가 될 때, 참된 생명이 잉태됩니다. 하나님의 설계는 이토록 놀라운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하나되게 하신 이유는 단지 생육과 번성에만 있지 않습니다. 이미 위에서 설명드린 것처럼, 그것은 짐승에게도 있는 복입니다.

동물적 사랑은 간단합니다. 만나서 결혼하고 집 짓고 애 낳고 그리고 죽는겁니다. 생명은 확장되지만, 그 안에서 동물과 같은 사랑으로 만들어지는 가정에 참된 ‘생명의 역사’가 나타날 리 만무합니다. 여전히 자기 먹고 사는 문제가 급한 동물적 가정들이 양산될 뿐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만들고, 남자와 여자가 하나되어 살아가게 하시면서, 이와 같은 복을 내리셨습니다.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즉 이 땅을 다스리고 이 땅을 하나님 말씀대로 통치하게 하기 위한 질서의 사람이 되기 위해, 가정을 일구게 하신 것입니다.

어느날 아담이 혼자 모든 동물들의 이름을 짓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주신 은사이므로 훌륭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너무 힘들어 보였습니다. 창세기 2장 20-23절입니다.

“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그래서 아담이 여자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둘이 서로 만나 함께 하나님 나라를 다스릴 꿈이 있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돕는 배필’로 정하셨던 것입니다.

문제는 아담입니다. 딱 보니까 너무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고백합니다.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너무 아름다운 이 고백을 두고 김복유 씨의 ‘잇쉬가 잇샤에게’가 나오지 않았습니까? 그 찬양의 가사가 이렇습니다.

‘내 눈에 휘장이 걷히고 계절이 바뀌고 시간이 흐르고 빗장이 풀리고, 계절이 바뀌고 시간이 흐르고 내 눈에 휘장이 걷히고 이제 난 보이오 그대가 보이오’.

맞습니다. 이제 아담 눈에 보입니다. 그대가 보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문제였습니다. 아담 눈에, 여자만 보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명이 사라집니다. 하나님 말씀이 잊혀집니다.

찬양이 이렇게 이어집니다.

‘아름다워 그댈 기다렸소 매일 꿈꿔왔소 주의 손을 잡은 아리따운 그대 모습 이제 깨어나오’.

대체 언제 기다렸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남자를 잠재웠습니다. 자다가 일어난 것뿐입니다. 순간 일어난 일입니다.

그런데 이 가사에 따르면, 아담은 매일 꿈꿨답니다. 착각하는 것입니다. 여자를 본 순간, 하나님의 자기 계획도 꿈도 사라지고 맙니다.

이 가사의 핵심은 마지막에 있습니다.

‘함께 걸어가오 주가 주신 동산 다스리며 걸어가오’.

함께 걸어가야 하는 사명입니다. 주가 주신 동산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걸어가는’ 동사로서의 사명이 함께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인 생각으로 이 찬양을 좋아합니다. 이 마지막 대목 때문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 찬양을 남자가 여자에게 불러주는 사랑 노래로 활용합니다. 김복유 씨가 그런 의도로 만들었을 리 없다고 생각합니다. 찬양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그리스도인 청년들이 이 찬양의 가사처럼 사명은 잊고 서로에게 눈멀어 사명을 잊는다는 것입니다. 어느날 여인이 들고 온 열매, 아담이 이것을 모를 리가 만무합니다.

모든 만물의 이름을 짓던 아담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아담에게 명령하신 먹지 말라고 한 열매 딱 하나입니다. 그걸 아담이 모를 리 만무합니다.

그런데 보이지 않습니다. 여자가 말합니다. “이것 좀 먹어봐요, 정말 맛있어요.”

아담에게는 그 순간 하나님이 주셨던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다. 여자의 목소리만 들릴 뿐입니다.

자, 여자의 목소리가 보이고 들리는데, 하나님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고 더이상 보이지 않는다. 눈이 멀고 귀가 먼것입니다.

9. 사랑한다면서 서로에게만 빠져 산다면, 이와 같은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서로의 계획을 위해 예배의 자리는 멀어지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여러분, 결국 그 계획이 향하는 곳은 어디일까요? ‘먹고, 놀고, 마시는 곳’에 다녀옵니다. 사랑이 돈독해지는 듯 해 보입니다. 그러나 생명의 역사는 없습니다.

아니, 만약 그것을 통해 서로가 더 잘 보이게 되었다면 생각해 보십시오. 그 사람 때문에 놓치고 있는 소중한 존재는 없는가? 하나님, 그리고 소중한 지체들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꿈도 사라지는 것은 아닌가?

10. 사랑은 마주 보는 시간만큼,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랑한다면서, 서로만 봅니다.

여러분, 그것은 서로의 얼굴만 점점 크게 보게 할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것들을 놓치게 할 것입니다. 서로만 보고 예배드리는 사람은, 서로가 상처입는 순간 수많은 소중한 지체들을 잃게 만듭니다.

그 사람이 결혼하면 어떻게 될까요? 한 가정이 창조되었습니다. 창조는 하나님의 능력이어야 하는데, 애초에 만나면서부터 하나님과 멀어졌습니다. 그 상태로 새롭게 만들어진 가정은 창조적 능력이 아닌, 인위적 가정입니다. 여전히 그 사람만 봅니다.

결국 자기 자식만 봅니다. 자기 남편과 아내만 봅니다. 자기가 버는 돈의 액수만 바라봅니다. 결국 청년 시절 정의를 부르짖던 자기 자신의 모습은 가정을 일구면서 사라집니다. 내가 그토록 부르짖었던 부정과 부조리를 행하는 가정이 되고 맙니다.

사랑의 확장성을 놓쳤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함은 더 많은 사람을 품기 위함임을 알아야 합니다.

11. 사랑한다면, 그래서 함께 꿈을 논의 해야 합니다. ‘우리는 왜 만났는가?’ ‘우리는 왜 만나야 하는가?’ 그것을 말씀 앞에서 점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따라서 교제할 때, 서로가 서로에게 거리를 둘 수 있어야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 청년들이 연애하면서 서로를 구속합니다. 스마트폰부터 검사하고, 카톡 내용을 공유하고, 그동안 친구 사이였던 남녀 관계에 간섭합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3장은 뭐라고 합니까? 사랑은 언제나 ‘오래참고, 온유하며, 시기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여기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12. 하나님은 그래서 이처럼 무너진 사랑의 관계를 점검하기 위해, 아담에게 하나의 문장을 던지십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영어성경은 세 단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Where are You?”

첫째. ‘너’를 물으십니다. 정체성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사랑하기 위해 ‘나’ 혼자만의 정체성이 확고해지지 않으면, 누군가를 바르게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 땅에 목적이 있게 창조하셨습니다. 남자로, 여자로. 또 수많은 달란트를 주셨습니다. 모두 다 다릅니다. 물어야 합니다.

둘째, ‘어디’를 물으십니다. 우리의 공간에 대해 점검하라는 것입니다.

수풀 뒤에 숨으면 보이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는 아담에게, ‘어디’를 물으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맡겨주신 공간 앞에 순종하기보다, 마음대로 바꿉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따라 예배드립니다. 그래서 상처를 입으면 떠납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곳에 따라다닙니다. 그러니까 공간에 따라 자기가 바뀌는 것입니다.

집에만 가면 소리 치고, 이기적으로 변화하고, 자녀에게 세상적인 가르침을 요구하고, ‘돈이 최고다, 성공해야 한다’, 가르치는 모습에서 탈피해야 합니다.

셋째로 ‘동사’를 물으십니다. 무엇을 하고 살아가는가, 나는 왜 이 일을 해야 하는가?

이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그저 돈을 벌기 위한 자기 자신, 내가 오늘 실적을 달성해서 복받은 존재가 되어버린 자기 자신, 그 사람은 오늘 내가 일을 하는 목적을 상실해 버렸습니다.

그 사람은 그저 동물적 행위만 할 뿐입니다. 먹고 자고 아이를 낳고 사는 것이 사랑하는 일이라고 말입니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아담은 여자와 함께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한 일을 역동적으로 행했습니다. 그것은 바른 사랑이 아닙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내가 이 일을 왜 해야 하는가, 생각하고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 그 동사를 점검하라고 하십니다.

13.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날 대한민국 이 땅이 너무 혼돈하지 않습니까? 그 가운데서 여러분은 이 세 가지 단어를 기억해야 합니다.

1) ‘너’라는 정체성.

왜 하나님이 한국사람으로 태어나게 하셨을까. 왜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을까.

2) ‘어디에’라는 공간성.

나는 어디에서 살아야 할까, 나는 어디에서 일해야 할까, 나는 어디에서 공부해야 할까, 나는 어디에서 그리스도인다워야 할까.

3) ‘행함’의 점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무엇을 자랑하는가.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점검될 때, 혼돈을 빛으로 정돈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여러분을 통해 이 어두운 세상을 정리해 나갈 것입니다.

용기를 내십시오. 사랑은 용기가 있어야 구현이 가능합니다. 바른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진심으로 사랑하는 여러분, 바른 사랑을 하십시오. 바른 사랑을 꿈꾸십시오. 바른 사랑만이 여러분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습니다.

성큼 서서히 다가온 가을,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신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여러분의 행복을 빕니다.

류한승 목사(생명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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