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더함 목사의 플러스통신] 풍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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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혈. ⓒ유튜브 캡처

▲풍혈. ⓒ유튜브 캡처

풍혈(風穴, air-hole)은 지하 저온층에서 내뿜은 차가운 공기가 크고 작은 바위 사이의 공극(틈)을 따라 지상으로 분출되는 현상이다.

모자라도 쓰지 않으면 얼마 남지 않은 머리칼마저 바싹 태어버릴 것 같이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한여름에도, 몸이 시리도록 차가운 기운을 공급하는 풍혈이야말로, 신비한 자연현상임에 틀림없다.

제주도 곶자왈 지역에는 화산지대에서 볼 수 있는 용암과 관련된 표식들이 많다. 각종 동굴들과 궤(바위굴), 여러 군데에 걸쳐 형성된 함몰지와 도랑들은 수분을 함유하는 기능이 뛰어날 뿐 아니라, 특이한 지형으로 인한 온도와 습도를 유지하는 미기후(국소 지역의 특별한 기후)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풍혈은 이러한 지형적 특성에서 나타나는 기현상 중 하나이다.

이렇게 곶자왈 내에 발달한 제주도 풍혈 지역은 용암동굴처럼 기온과 기후변화의 영향을 최소한 받으며 온도와 습도를 일정하게 유지시킴으로서, 고산지대 식물과 중산간지대 식물이 공존하고 북방계 한대 식물과 남방계 아열대 식물이 공존하는 특수한 식물 서식지대가 만들어졌다.

특히 아열대 식물과 한대 식물이 공존할 수 있는 비결은 용암 함몰지역의 온도 분포 특성 때문이다. 함몰지대 지표면의 한여름 온도는 23.1℃인데 비해 함몰지 바닥은 평균 8.4℃로 나타난다. 이는 함몰지 내 기온이 제주도 겨울 평균 기온인 6.7℃와 별다른 차이가 없을 정도이다.

이렇게 지표와 바닥간의 14-15℃에 이르는 온도차는 해발 2,200m의 온도차에 해당하는 것으로, 곶자왈 내 함몰지에서 북방계와 남방계 식물이 공존하는 과학적 이유이다.

여러 가지 점에서 곶자왈의 풍혈은 우리 인생에 던지는 의미가 상당하다. 곶자왈은 한라산처럼 고산지대는 아니지만 여름철에 시원한 풍혈을 분출함으로써 북방계 식물의 안전한 서식지를 제공한다. 그리고 지표면에선 고온을 유지하면서 아열대 식물들을 한 곳에서 공존하게 한다.

자연적으로 북방계 식물과 남방계 식물이 공존한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현상이다. 그중에서 풍혈은 한여름을 찾는 사람들에게 더위를 피하는 시원한 공간을 제공한다.

풍혈을 온몸으로 맞으며 드는 생각이 있다. 두 가지 적대적이거나 대립적인 존재의 공존을 목격하기에 드는 생각이다.

손자병법은 ‘知彼知己 百戰百勝(지피지기 백전백승)’이라 하면서, 적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비결을 가르쳐 준다. 어느 축구 감독은 ‘닥공’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며, 오직 공격만이 승리하는 비결이라 자신만만해했다.

그뿐인가. 대다수 국가들의 국가(國歌)는 전진과 승리의 노래들이다. 그렇다. 인생에서 살아남으려면 적을 이겨야 한다. 승리의 고지에 오르려면 남을 짓밟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거듭나기 전의 어거스틴은 한때 마니교라는 이단 사상에 매료된 적이 있었다. 마니교는 베고파 무화과나무 열매를 먹고 싶어 하는 불쌍한 이웃에게 긍휼을 베푸는 것을 오히려 패배적인 몸짓이라 가르쳤다.

어거스틴도 그런 잘못된 사상에 물들어 가난한 이웃을 돕는다는 것은 나쁜 행동이라 생각했다고, 그의 <고백록>을 통해 고백했다. 그들 모두에게 승리는 고지에 오르는 것이라 가르쳤고 그대로 행동했다.

전쟁에서는 약한 자를 용납하지 않는다. 강한 자만이 승리하고 남는다. 그런데 세상이 곧 전쟁터다. 세상은 살아남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남보다 잘 살아야 하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야 하고 결국 사다리를 타고 제일 높은 자리를 향해 올라야 한다.

지금도 이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아둥바둥’ 거리며 힘겹게 사다리를 타고 오르고 있다. 여기서 밀린 사람들은 밑이 보이지 않는 바닥을 향해 낙하한다. 실패자는 이때 몸과 마음이 찢기는 고통을 겪는다.

한편으로 위에선 승리의 함성이 들린다. 고통의 포효와 승리의 함성을 동시에 내뿜는 이 자극적인 불협화음들이 세상을 뒤덮고 있다. 화음을 상실한 소리들은 육신의 고막뿐 아니라 영혼의 심장을 칼로 찌르는 것이다. 세상은 이렇게 승리와 실패가 당연히 존재하는 것인 양 가르친다.

그러나 곶자왈의 풍경은 다르다. 칡과 등나무가 서로 반대되는 방향으로 나무 몸통을 감고 오르며 갈등(葛藤)하지만, 서로 죽이는 법은 없다.

소나무와 가시덩쿨들이 엉키고 엉키지만, 그리하여 결국 소나무가 말라 죽고 서로 전쟁하는 듯 보이지만, 결국 소나무의 헌신과 희생으로 숲의 토양이 비옥해지고 다시 이끼가 발생하고 고사리들이 자라고 소나무가 부활하고 성장하는 공존공생의 세상을 일군다.

어쩌면 이들은 사람들과 달리 서로 공존하고 공생하기 위해 서로 사랑하는 법을 터득한 존재들인지 모른다. 이들에게 죽음은 더 이상 죽음이 아니다. 이들의 죽음은 다시 태어나는 과정의 하나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들에겐 조급함이나 날쌘 돌이처럼 사는 법이 없다. 이들은 그저 서로 존재하고 서로를 바라보며 살아갈 뿐이다.

이 시간에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본다. 가시에 찔리고 채찍에 맞으며 피를 흘리시면서 우리의 죄를 대신 갚아주시려는 그 처절한 몸짓과 그 파장이 온 몸을 뒤감는다.

주님의 마지막 포효는 “다 이루었다”이셨다. 무엇을 다 이루셨다는 말씀인가?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모든 사명을 다 이루셨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아직 이 말씀의 효력은 우리에게선 다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여전히 우리는 죄인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산다.

여전히 우리는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기 못하고(빌 2:3), 자기를 낮추어 죽기까지 복종하지 못하고 살며(빌 2:8),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 없이 하라(빌 2:14)는 가르침에 역행한다.

형제와 이웃을 사랑하고 심지어 원수마저 사랑하라는 주님의 가르침을 잊고 산다. 풍혈처럼 타인에게 시원함을 선사하는 존재들이 모여 사는 세상이면 안 되는 것일까? 이런 정신 나간 생각을 하고 사는 ‘얼간이’들이 행복을 누리는 세상이면, 어찌 아니 되는 것인가?

▲최더함 박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최더함 박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이 즈음에서 우리는 참된 교회가 무엇인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교회로 사용된 ‘에클레시아’는 단수가 아니라 복수형 명사로서 ‘공동체’를 뜻한다. 교회는 개인이 아니라 주님의 지체들의 모임이다. 그러므로 조용히 개인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그는 아직 교회의 일원이 아니다.

‘에클레시아’는 서로를 섬기는 공동체다. 서로의 필요를 나누고 서로의 고민거리를 해결하고, 서로의 꿈의 성취를 위해 내가 그의 발판이 되고자 하는 곳이다. 내가 성공하고자 하는 곳이 아니라 다른 이를 그 자리에 밀쳐 올리는 섬김의 공간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다른 이의 가려움을 긁어주고 답답함을 시원하게 풀어주는 풍혈 같은 존재여야 한다. 그런 교회를 위해 하나님은 “서로 사랑하라(요일 4:7)”고 하셨고,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8)”고 말씀하신 것이다.

사랑이 별거냐. 사랑은 잘난 체 않고 남보다 위에 서지 않으려 하고, 좀 낮추어 따뜻하게 말하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칭찬하고, 만나면 반갑게 인사하고 안부 묻고 즐겁게 차 한 잔 마시고 무엇이라도 남모르게 슬쩍 돕는 것일 테다.

그런 사랑의 교회가 남아 있다면, 그래도 희망이 있지 않을까?

최더함(Th. D. 개혁신학포럼 책임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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