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한승의 러브레터] 느림의 사랑
1. 계단을 걸어 올라가다 넘어져버린 어느 날, 계단을 없애는 리모델링 공사를 계획했습니다. 그런데 문득 없애고 싶어도 없애지 못하는 어두운 교회 계단 밑 지하에서, 비가 와 물이 새서 무너진 방에서 공부할 수 밖에 없던 아이들이 생각났습니다.
‘내가 누리고 있는 것이 너무 많구나.’ 저 하나만을 위한 계획이 변경되어 달꿈예술학교가 생겼습니다. 단지 나만을 위한 계획을 너와 함께로 바꾸었을 뿐인데, 얻어진 열매들은 열두 광주리가 넘치는 듯 합니다.
달꿈예술학교를 통해 많은 아이들의 변화가 보이고, 아이들을 위해 선생님들이 모이는 것을 바라봅니다.
2. 목회를 하며 학교를 섬기며 깨닫게 된 것이라고는, 내게 있는 것으로 하나님은 열두 광주리를 차고 넘치게 하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내게 없는 것을 가지고자 속도를 내고, 달려갈 필요가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오병이어를 쥔 아이는 수많은 인파 가운데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모두가 자기 것을 뒤로 감춘 채 누군가의 배고픔을 외면하던 인파 속에서 자기의 것을 내놓았던 소년과, 믿음으로 이를 함께 행한 제자들은 5천명의 사람들이 먹고도 열두 광주리가 차고 넘친 놀라움을 발견했습니다.
3. 그 광야에서 이루어진 시간은 어떤 의미였을까요? 그저 흘러가는 시간 속에 묻혀 버리는 수평적인 시간이 아니라, 평생 잊혀질 수 없는 모든 흘러가는 시간에 우뚝 솟아있는, 수직적인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 시간은 계산적인 빌립과 믿음 없는 제자들, 늘 화려한 이적만을 바라보던 사람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절대적 사랑의 시간이었습니다.
절대적 시간은 화려한 곳, 뛰어난 스펙, 부유함을 추구하기보다, 내게 있는 것을 가지고 주님과 관계맺는 삶으로 우리 인생의 시간을 바꿉니다.
내가 가진 것이 얼마 되지 않아도, 그것으로 다른 사람과 나누겠다는 용기로 가득찬 시간은 광야를 바꾸기 시작합니다.
4. 애틀랜타 밀알 최재휴 목사님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이른 아침 공항에서 헤어졌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헤어짐은 아쉬움이기는 하네요.
하지만 슬픔이 아닌 이유는 다시 만날 소망 때문만은 아닐겁니다. 헤어짐마저 기쁨인 이유는, 우리 모두 주님 안에서 장소만 다를 뿐, 주님의 시간을 보낼 거라는 확신 때문입니다.
5. 제 주변에는 참 좋은 신앙의 선후배 동역자들이 많은 것 같아요. 사랑의 편지에 모든 분들의 이름을 거론할 수 없지만, 이른바 누구나 바라는 대형교회 목회자가 될 수 있는 길 대신 지역에 어떤 나눔을 해야 할까 고민하시는 바로 세움 정립 교회의 양광모 목사님.
몇 번 뵙지는 않았어도 존재가 문제보다 귀하다는 명제를 알려주신 그냥 형 같은 어노인팅 멘토 박지범 목사님, 한국에서 가장 먼저 장애인 예배를 만드시고 시애틀 형제교회에서도 장애인 예배를 만드시는 개척자 같은 장영준 목사님,
그리고 20년 넘게 장애인 사역 하나만 애틀란타에서 집중하시며 다른 곳을 보지 않으시는 최재휴 목사님.
6. 신기하게 보실지 모르지만, 저는 이 존경할 수밖에 없는 목사님들과 같이 신학공부를 하거나 함께 같은 공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 다 다른 공간에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분들과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제가 무엇 하나 잘난 것이 있을까 생각해 보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저는 학력이나 경력이 화려하지도 않아요. 육신으로는 장애인이요, 영적으로도 그 누구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일천한 사람에 불과합니다.
7. 그래서인지는 모르지만, 제게 주님은 시험처럼 보이는 일들을 주실때마다 마음의 광주리에 늘 한 사람을 담아 주십니다.
계단을 올라가다 넘어질 때 리모델링 결정을 하던 그 순간, 하나님은 제 마음에 지하 계단 아래 냄새나는 교회 예배당에서 공부하는 한 청소년을 담아 주시고, 미국에 초대받아 대접을 받을 때마다 피자 한 조각에도 웃음꽃이 피는 청년들을 다시 담아 주십니다.
나이아가라 폭포의 절경을 코앞에서보며 압도당한 그날, 가장 멀리서 폭포를 바라보게 하시며 그 존재는 손가락 마디에 불과함을 들려주신 하나님이, 식당에서 허리를 구부린 채 오늘도 요리하고 계실 노권사님들의 존재를 담아 주십니다.
무엇이 더 크냐는 것입니다.
대구 어떤 교수님께서 이곳에 남아 연구를 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듣는 순간순간마다, 금요일에 모여 예배드려야 하는 청년들이 제 마음에 담겼습니다. 그래서 매주 대구와 서울을 오가며 3년 동안 너무 즐겁게 목회했습니다.
시애틀에 있는 한 교회에서, 목사님께서 진지하게 미국에 와서 함께 동역할 것을 권함 받을 때, 어떤 친구의 고백을 생각나게 하십니다.
6개월여만에 교회에 나온 친구가 제게 말합니다. “목사님. 오랜만에 와도 똑같이 거기 있어 주시고 똑같이 대해 주셔서 집 같아요. 고맙습니다. 목사님.”
8. 그럴 때마다 다짐했던 것 같습니다. “주님 걱정 마세요. 제가 있는 자리를 지킬게요.”
처음에는 이런 결단을 하는 제 스스로를 위로하기도 하고 칭찬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조용히 지난 시간을 돌아보니, 생각이 부끄러워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시간은, 줄 수 있는 사람과 함께할 때 행복하고 빠르게 지나갑니다. 반면 시간을 줄 수 없는 사람과 함께하는 것은, 시간을 멈추게 만들고 질식시킵니다.
2011년부터 지금까지 빠르게 지난 이 시간이 전혀 힘들지 않고 행복했던 이유는, 여러분이 이미 저를 행복하게 해주시는 존재들이었기 때문이네요.
여러 교우들이 제 부족함을 알고, 도와주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시간을 내어주었던 것입니다. 움직이기 불편할 때마다 머물러 주었던 것입니다. 함께 바라봐 주었던 것입니다.
성전 미문 앞 앉은뱅이를 위해 요한과 베드로가 함께 걷고 기도하고 바라보며 손잡아 주었던 것처럼, 2011년이나 2019년이나 전혀 발전 없는 저를 그저 옆에서 느리게 사랑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9. 어제 청년들이 ‘서프라이즈’를 해주었습니다. 생일이라고 말입니다.
갑자기 불을 끈 뒤 케이크를 들고 오면서, ‘목사님은 만원 이상 선물 안 받으셔서 영수증 포함해 9,800원 선물 가져왔다’는 그 말에, 잠시 찡했습니다.
저는 청년들뿐 아니라 성도들이 주일에 얼마나 쉬고 싶은지, 얼마나 친구들, 가족들과 보내고 싶은지 잘 압니다. 교회 사역에 얼마나 지쳐 있는지 너무 잘 압니다.
그런데 이 청년들은 저 한 사람을 위해 오늘 또 이런 고민을 해야 했구나. 이것을 위해 하루 온종일 힘들게 사역하고도, 오늘 또 이 자리에 머물렀구나. 이곳이 성전 미문이구나 싶었습니다.
화려한 곳, 뛰어난 스펙, 부유함을 추구하는 삶을 향하던 제게, 이미 제게 있는 것으로 충분함을 깨닫게 해 주셔서, 주님과 관계맺는 삶으로 우리 인생의 시간을 바꾸어주신 모든 분들에게 참 감사합니다.
10. 진심으로 사랑하는 여러분, 또한 사랑의 편지를 받으시는 여러분.
서로를 느림으로 바라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속도로 수평선을 질주하는 이 시대에 주님의 시간으로, 수직적인 시간들을 채워 주시는 서로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류한승 목사(생명샘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