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믿음이란 무엇인가
종교개혁의 계절이다. 그런데 조용하다. 2017년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은 후 종교개혁에 대한 관심이 도리어 사그라졌다.
사실 그럴 만도 하다. 매년 종교개혁을 부르짖었건만, 교회는 세상이 염려하고 조롱할 정도로 더욱 타락해 가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때에라도 계속해서 종교개혁을 생각하고 되뇌여야 한다.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특히 이러한 때일수록 더더욱 종교개혁의 기본 정신인 이신칭의를 분명히 해야 한다.
필자는 『나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울 수 있을까?』(좋은씨앗)라는 책에서 이신칭의를 아주 쉽고 간단하게 정리한 바 있는데, 종교개혁의 계절을 맞아 지면을 통해 더욱 간략하게 정리하여 독자들에게 소개하려고 한다.
이신칭의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인식에서부터 출발한다. 루터는 “나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울 수 있을까?”라는 고민에서 이신칭의를 발견했다. 거룩하신 하나님(사 6:3; 47:4) 앞에서 사람은 죄인이다(롬 1:21; 엡 2:1, 3; 4:18).
공의로우신 하나님(사 5:16) 앞에서, 죄인은 형벌을 받아 마땅하다. 죄인은 하나님 앞에서 의로울 수 없다. 죄에 대한 분명한 인식 없이, 이신칭의는 바르게 설 수 없다. 개혁파는 한결같이 이신칭의를 말하기에 앞서 죄의 심각성을 고백한다.
죄인은 하나님 앞에서 의로울 수 없는데, 그렇다면 율법을 열심히 지키면 의로워질 수 있을까? 안 된다. 이 세상에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
율법을 어느 정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있어도, 완전히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8, 13문답,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6장 4절,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149문답).
아무리 종교적인 사람이라도 그의 의는 더러운 옷과 다를 바 없다(사 64:6).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을 뿐이다(롬 3:20). 그래서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갈 2:16; 3:11; 5:4).
사람이 율법으로 할 수 없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보내셨다. 그리스도는 친히 하나님의 한 의가 되셨다(롬 3:21-22; 빌 3:9).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생애 전체를 통해 율법에 온전히 순종하셨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완전한 속죄를 이루어 하나님의 의가 되셨다(롬 4:25; 고전 1:30; 고후 5:21).
우리 안에서는 의를 찾을 수 없다. 우리 밖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만이 우리의 의가 됨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1장 1, 3절). 이 의는 우리의 행위와 노력으로는 도무지 얻을 수 없는 의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 하나님의 의는 어떻게 죄인인 우리의 것이 될 수 있을까? 전가(轉嫁, imputation)다. 그리스도의 의가 나의 의로 여겨지는 것이다(롬 4:3-9, 22-25). 간주되는 것이다.
우리가 의로움을 위해 무슨 일을 하지 않았지만, 마치 우리가 한 것처럼 여겨진다. 나는 무수히 많은 죄를 지었고, 그 죄를 없앨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마치 죄가 전혀 없는 것처럼, 죄를 한 번도 지은 적 없는 것처럼 여겨주신다(고후 5:19, 21).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칭함을 얻는다(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60문답). 나의 죄가 예수님의 죄가 되고, 예수님의 의가 나의 의가 된다. 이를 위대한 교환이라고 한다.
그리스도의 의가 나의 의로 여겨지고, 간주되고, 전가되려면, 수단이 필요하다. 바로 믿음이다. 그래서 이신(以信)이다.
믿음으로써 의롭다 칭함을 얻는다(롬 3:22, 27, 28, 31). 이 방법은 유일한 방법이다. 갈라디아서 2:16; 빌립보서 3:9; 디도서 3:5가 분명히 말한다. 그래서 오직 믿음이다(롬 3:27). 솔라 피데(Sola Fide)다.
믿음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의를 받아 의지하게 하는 칭의의 유일한 수단이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1장 2절). 이 방법 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
이 때 믿음이란 맹목적 신앙이 아니다. 두루뭉술한 태도가 아니다. 분명하고 확실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그리스도가 나의 의로움이 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행하신 일들을 믿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의가 나의 의로움이 됨으로 비로소 의롭다 칭함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이러한 내용을 알고 동의하고 신뢰하는 것이 구원에 이르는 믿음(Saving Faith)이다(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72문답).
믿음은 우리 의로움의 근거가 아니라 수단이다. “믿음으로”라는 말은 믿음이 수단이라는 말이다. 믿음 그 자체가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를 의롭게 하고, 믿음은 그 의가 우리의 것으로 전가되게 하는 수단이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1장 1절,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73문답, 벨기에 신앙고백서 22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61문답).
믿음은 칭의의 근거나 공로가 될 수 없다.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근거는 그리스도다.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얻는다고 하니, 행위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오해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 해서, 신자의 삶에서 행함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오직 믿음’은 ‘의롭다 칭함을 받는데 있어 행함이 아무런 기여를 하지 못한다’는 뜻이지, 신자의 삶에서 행함이 불필요하다는 뜻이 아니다.
행함은 칭의의 수단은 아니지만, 칭의의 결과물이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사람은 반드시 행함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진정으로 믿는 자는 행함을 무가치하게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행함을 더욱 중요하게 여긴다(롬 3:31;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1장 2절).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신자는 동시에 거룩하게 된다.
우리를 구원하게 만드는 믿음은 항상 행위를 일으키는 믿음이요,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다(갈 5:6; 약 2:17, 20-26). 참된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진 사람이 감사의 열매를 맺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64문답; 벨기에 신앙고백서 24조).
그렇다고 행함이 의롭다 함을 얻는 수단이 될 수 없음은 분명하다. 신자에게 행함은 결코 자랑이 되어서는 안 된다. 공로로 내세울 수 없다. 우리의 행함은 믿음의 열매와 증거일 뿐이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6장 2절).
참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은 신자라면 행함을 무가치하게 여기보다는 오히려 더더욱 행함을 통해 자신의 믿음을 나타내 보이기 위해 힘써야 한다.
지금까지의 내용은 성경과 개혁주의 신앙고백서와 요리문답이 매우 분명하게 가르치는 바요, 루터, 칼뱅, 존 오웬, 휫필드, 에드워즈, 스펄전, 바빙크, 벌코프 등이 분명히 강조한 바다.
이 교리는 지금까지 개신교회를 지탱해온 근본 진리다. 이 교리가 전파되는 것마다 교회는 생명력을 얻었고, 왕성했고 건강했고 성장했다.
종교개혁의 계절에, 다른 무엇보다도 이 교리가 모든 교회의 강단에서 선포되고,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확고하게 심겨지기를 바란다.
손재익 목사 (한길교회 담임)
『나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울 수 있을까?』(좋은씨앗)
『성화, 이미와 아직의 은혜』(좋은씨앗)
『벨기에 신앙고백서 강해』(디다스코)
『특강 예배모범』(흑곰북스)
『설교, 어떻게 들을 것인가?』(좋은씨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