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태 칼럼] 11월에 읽는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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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지금은 태양이 낮게 뜨는 계절, 돌아보면, 다들 떠나갔구나, 제 있을 꽃자리, 제 있을 잎자리, 빈들을 지키는 건 갈대뿐이다/ 상강(霜降). 서릿발 차가운 칼날 앞에서, 꽃은 꽃끼리, 잎은 잎끼리, 맨땅에, 스스로 목숨을 던지지만/ 갈대는 호올로 빈 하늘을 우러러, 시대를 통곡한다. 시들어 썩기보다, 말라 부서지기를 택하는 그의, 인동(忍冬)/ 갈대는, 목숨들이 가장 낮은 땅을 찾아, 몸을 눕힐 때 오히려 하늘을 향해 선다. 해를 받든다” (오세영/ 세월).

② “한 사람이 서 있네, 그 옆에 한 사람이 다가서네, 이윽고 11이 되네/ 서로가 기댈 수 있고 의탁이 되네, 직립의 뿌리를 깊게 내린 채/ 나란히 나란히 걸어가시네/ 북풍한설이 몰아쳐도, 끔쩍하지 않을 곧은 보행을 하고 싶네/ 한 사람 또 한사람이 만나,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올곧은 모습으로, 어기여차, 어기여차, 장단에 맞춰, 풍악에 맞춰, 사뿐히 사뿐히 걸어가시네/ 삭풍이 후려쳐도 평형감각 잃지 않을 온전한 11자로 자리매김하고 싶네” (반기룡/ 11월이 전하는 말).

③ “달밤에는 모두가 집을 비운다. 잠 못 들고 강물이 뜨락까지 밀려와 해바라기 마른 대궁을 흔들고 있다/ 밤 닭이 길게 울고, 턱수염이 자라고, 기침을 한다. 끊임없이, 이 세상 꽃들이 모두 지거든 엽서라도 한 장 보내라던 그대/ 반은 잠들고 반은 깨어서 지금 쓸려가는 가랑잎 소리나 듣고 살자, 나는 수첩에서 그대 주소 한 줄을 지운다” (이외수/ 입동).

④ “가을 들판이 다 비었다, 바람만 찬란히 올 것이다/ 내 마음도 다 비었다, 누가 또 올 것이냐/ 저녁 하늘 산머리 기러기 몇 마리 날아간다/ 그리운 사람아. 빈 마을 들 끝으로/ 그대 새가 되어, 언제 날아올 것이냐?” (이성선/ 입동 이후).

⑤ “산다는 거 그런거지 뭐/ 정 주고, 정 받고/조금씩, 기대고 부벼대다가/ 때로는, 남인가 봐, 착각도 하다가/ 찬바람 불어오면/ 돌려줄 거, 서둘러, 돌려주고/ 훠이훠이, 홀가분히 떠나가는 것/ 산다는 거, 그런거지 뭐/ 근데 근데 왜 그리 힘든지 몰라” (김유미/ 늦가을).

⑥ “한 장의 지폐보다 한 장의 낙엽이, 아까울 때가 있다. 그때가 좋은 때다, 그때가 때 묻지 않은 때다/ 낙엽은 울고 싶어 하는 것을, 울고 있기 때문이다, 낙엽은 기억하고 싶어 하는 것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낙엽은 편지에 쓰고 싶은 것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낙엽을 간직하는 사람은, 사랑을 간직하는 사람이다” (이생진/낙엽).

⑦ “제 무게에 겨워, 스스로, 몸을 놓고, 한없이 가벼움으로, 세월에 날리며, 돌아가고 있는 한 생(生)의 파편, 적막 속으로 지고 있다/ 가벼이, 다 버리고 다 비우고도 한 평생 이 얼마나 무거웠던가/ 이제, 우주가 고요하다, 눈썹 위에 바람이 잔다” (홍해리/낙엽편지).

⑧ “이제는 누구를 사랑하더라도, 낙엽이 떨어질 때를 아는 사람을 사랑하라/ 이제는 누구를 사랑하더라도, 낙엽이 왜 낮은 데로 떨어지는지를 아는 사람을 사랑하라, 이제는 누구를 사랑하더라도, 한 잎, 낙엽으로 떨어질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하라, 시월의 붉은 달이 지고 창밖으로 따스한 봄빛이 그리운 날/ 이제는 누구를 사랑하더라도 한 잎 낙엽으로 떨어져 썩을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하라/한 잎 낙엽으로 썩어, 다시 봄을 기다리는 사람을 사랑하라” (정호승/이제는 누구를 사랑하더라도…).

옛날 선비들은 이해관계보다 명분을 소중히 여겼다. 見利思義(견리사의, 유익을 취할 때마다 정당한가를 점검했다), 釣而不網 弋不射宿(조이불망 익불사숙, 낚시질은 해도 그물로 싹 쓸어 잡질 않았고 화살을 쏘되 잠든 새는 겨누지 않았다).

정당한 방법과 절차를 따랐다. 속임수나 뒤통수를 치는 것은 서양의 결투에서도 절대 금지사항이었다. 정정당당함을 세월의 순환에서 배워야겠다.

계절의 순환과 산천 초목의 생태현상이 모두 진리를 가르쳐주는 교과서이다. 하나님이 직접 교육하는 인생학교다 눈뜨고 귀 열고 생각하며 깨닫도록 하자. 보아도 깨닫지 못하는 자가 진짜 맹인이다.

김형태 박사(한국교육자선교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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