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태 칼럼] 한용운의 시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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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 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 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품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 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한용운, 님의 침묵

한용운은 범어사에 들어가 「佛敎大典」을 저술하여 대승불교의 반야사상(般若思想)에 입각하여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 참여를 주장하였다.

1916년 서울 계동(桂洞)에서 월간지 「유심」(唯心)을 발간했고, 1919년 3·1 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 그로 인해 일경에 체포되어 3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을 출판하여 저항 문학에 앞장섰다. 1935년 장편소설 「흑풍」(黑風)을 조선일보에 연재하였고, 「조선불교유신론」, 「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 「불교대전」 등의 저서를 남겼다. 서울 성북동에 있는 심우장에서 중풍으로 고생하다 세상을 떠났다.

그가 남긴 한시들을 같이 읽어봄으로 한용운의 문학적 소질과 뜨거운 애국심 및 생활불교인의 모습을 배워보면 좋겠다.

①옥중에서 지은 한시다.

“가을 기러기 한 마리 멀리서 울고(一雁秋聲遠) 밤에 헤아리는 별 색도 다양하네(數星夜色多) 등불 짙어지니 잠도 오지 않는데(燈深猶未宿) 옥리는 집에 가고 싶지 않는가 묻는다(獄吏問歸家)
하늘끝 기러기 한 마리 울며 지나가니(天涯一雁叫) 감옥에도 가득히 가을 소리 들리는구나(滿獄秋聲長) 갈대가 쓰러지는 길 저 밖의 달이여(道破蘆月外) 어찌하여 너는 둥근 쇠뭉치 혀를 내미는 거냐(有何圓舌椎)”.

②감옥에서 면회하러 온 학승에게 전해준 것 같다. 아무 보람도 없이 헛되이 사는 와전(瓦全)과 명예와 충절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는 옥쇄(玉碎)를 대비시켜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기개를 굽히느니 차라리 깨끗이 죽는 것이 아름다운 일이라는 내용이다.

“헛된 삶 이어가며 부끄러워하느니(瓦全生爲恥) 충절 위해 깨끗이 죽는 것이 아름답지 않은가(玉碎死亦佳) 하늘 가득 가시 찌르는 고통으로(滿天斬荊棘) 길게 부르짖지만 저 달은 밝기만 하다(長嘯月明多)”.

③일제에 시달리고 있는 조국을 ‘임’으로 나룻배를 타는 ‘행인’으로 비유하여 이렇게 그리워하고 이렇게 사모하는 애국 애족의 정신을 엿볼 수 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나룻배라 당신은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옅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비를 맞으며
밤까지 낮까지 나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낮까지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 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 오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갑니다”.

-한용운, 나룻배와 행인

김형태 박사(한국교육자선교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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