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다빈치는 잠수함도 설계했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이것이 인류에게 선한 쪽보다는 나쁜 쪽으로 쓰여 질 것 같아 사람들에게 공개하지 않기로 작정했다고 한다. 학자로서 그가 가지고 있던 윤리적 측면을 알 수 있는 대목이라 하겠다. 오늘날 과학 기술이 발달하면서 과학의 이 윤리적인 측면이 점점 더 부각되고 있는 것을 보면 다 빈치의 이런 통찰력은 우리의 관심을 끌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잠수함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노트에는 장갑차, 기관총, 도시의 계획, 기하학, 해부학, 건축, 재료의 강도 실험, 성형술, 카메라 옵스큐라, 콘텍트 렌즈, 증기의 힘, 하늘이 왜 푸른지 등의 고안과 설계와 설명이 가득하였다. 그야말로 지극히 사적인 독창적 노트요 메모였다. 끈과 리본과 가죽 장정 속에 보존된 그의 노트는 약 1만 3천 쪽에 달하였다.
1519년 4월 23일 다 빈치 사망 후 그의 유품들은 가족이 아닌 오랜 친구였던 귀족화가 프란체스코 멜치(Fracesco Melci)의 관리로 넘어갔다. 1570년 멜치가 죽자 이 유품들은 외아들 오라치오(Orazio)에게 넘겨졌다. 하지만 오라치오는 다 빈치 유품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다 빈치의 유품들은 다락방 선반에 그대로 방치되었다. 다 빈치의 유품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동기를 마련한 셈이다.
이 노트는 18세기말까지 일반 사람들에게는 알려져 있지 않았다. 다 빈치의 은밀한 개인 자료들은 프랑스의 문화침략자들이 이탈리아로 들어와 파리로 가져가 드디어 세상에 공개되었다. 오늘날 이 유품 가운데 남은 것은 겨우 절반이 조금 넘는 총 7천 쪽 분량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이들 유품은 온 세상의 수집가들에게 분산되어 버렸다. 이 중 가장 유명한 것이 1994년 빌 게이츠가 3천만 달러로 구입한 「코덱스 해머(Codex Hammer)」이다.
도무지 그 능력을 측량할 수조차 없을 만큼 온갖 것들에 관심을 갖고 있으면서도 뛰어난 화가의 기질을 발휘한 이 천재의 방안에는 박쥐, 도마뱀, 쥐, 잠자리, 뱀, 메뚜기, 벌 그리고 별의별 짐승들과 벌레들이 우글거리고, 또 어떤 것들은 썩어서 냄새가 요란하여 방문객들을 놀라게 하였다고 전해진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 모든 것들이 그의 그림의 소재였으며 연구 대상이었다.
다 빈치가 해부학을 배우려는 사람들에게 "시체의 혐오감을 극복해도 사지가 갈기갈기 찢겨지고 피부가 벗겨진 보기에도 끔직한 시체와 밤을 지새우는 공포가 있고, 이것을 극복해도 그림에 대한 필수적인 재능이 필요하고, 재능이 있어도 투시 화법의 지식이 있어야 하고, 그 지식이 있어도 기하학의 증명법이나 근육의 힘과 세기에 대한 평가법에 숙달되어 있어야 하고, 이 모든 것이 있어도 인내가 부족해서 근면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 말에서 오늘날 의학에 대한 도전이 만만하지 않음을 놀랍게 예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는 완벽한 인체 해보를 적어도 30번 행하였으며 수천 장의 해부 스케치를 남겼다. 이런 치열한 능력을 갖추지 못한 아이를 부모의 과욕으로 시험 한번 치지 않고 의전원까지 억지로 구겨 넣은 교수 부부가 생각난다. 지도 교수는 그렇게 의학에 재능 없는 아이는 교수 생활 동안 처음 본다고 했다. 수차례 낙제에 자퇴를 막으려고 교수는 수차례 장학금까지 주었단다. 그런 아이가 억지로 졸업하여 돈을 잘 번다고 인생에 무슨 소용이 있을까? "자연을 알려고 하는 자는 운동을 이해해야 한다." 다 빈치의 말이다. 필자는 딸을 억지로 의전원에 밀어 넣은 교수 부부에게 "의학을 이해하려면 인생을 알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성화 제작에 얽힌 일화
이 놀라운 천재에게 훌륭한 성화들을 남길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은 또 다른 축복이었다고 본다. 그 중에서도 불후의 명작인 《최후의 만찬》은 그의 나이 44세 되던 해, 그러니까 1497년에 제작이 시작되어 2년 동안에 걸쳐서 완성된 그림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이 작품에 쏟은 정성은 남다른 것이었다.
그는 이 작품을 그리면서 어떤 때는 밥 먹는 것도 잊고 밤을 새워 가며 그렸으며, 때로는 이 천재 화가에게도 뚜렷한 구상이 떠오르지 않아 며칠씩이나 붓만 든 채 멍하니 하늘만 쳐다보며 지내는 날도 많았다.
2년이 지나는 동안 그가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예수님의 제자 한 사람, 한 사람은 참으로 살아서 움직이는 듯한 역동감이 느껴진다. 그림에서 보이는 제자들의 모습은 그 품성이 마치 그대로 살아서 우리 앞에 움직이는 듯하다. 그러나 이 천재 화가에게도 고민은 있었는가보다. 그도 마지막까지 완성하지 못하고 고민하는 두 사람이 있었다. 바로 예수님과 가룟 유다였다. 예수님을 표현한다는 것은 천재인 그에게도 너무나 난감한 일이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그분은 곧 하나님"이시라고 했다.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은 그를 몰랐다고 했다. 그분이 바로 자기가 지으신 땅에 오셨으나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다고 했다.
말씀, 곧 하나님께서 육신이 되어 오신 바로 그 사랑의 예수님을 그려내는 일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주님을 팔아먹은 배신자 가룟 유다를 그리는 것도 썩 마음 내키는 일은 아니었다.
기도와 번민으로 며칠이 지나갔다.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날을 새며 우두커니 앉아 있는 다빈치의 모습은 영락없이 정신 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도대체 예수님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 것일까? 이 천재 화가에게도 그것은 풀 수 없는 수수께끼요 고민이었던 것이다. 마침내 그림을 부탁한 성당의 수도원장은 그를 찾아와서 재촉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주위에 비친 그의 모습은 잔꾀를 부리거나 조금은 이상해진 사람처럼 보였는지도 모른다. 독촉하는 수도원장에게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젠 남은 부분은 예수님과 가룟 유다뿐입니다. 만일 당신이 가룟 유다의 모델이 되어 주신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완성시킬 수가 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수도원장은 다시는 독촉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도 역시 그는 위대한 화가였다. 오랜 산고 끝에 그의 손으로 이 위대한 그림은 완성되었던 것이다. 이 《최후의 만찬》이야말로 다 빈치의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고백이었다.
조금은 괴짜로 느껴지기도 하는 이 천재 화가는 누구보다도 다방면의 재능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으며, 그 받은 달란트를 남김없이 사용한 사람이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천재 중의 한 사람으로서, 더불어 인류의 마음속에 진한 감동을 끊임없이 선사하는 성화들을 남긴 그는 분명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이었다.
다 빈치는 1513년 가을 로마에 도착하여 미켈란젤로(1475-1564)가 그린 시스티나 천장의 《천지창조》 중의 '대홍수' 그림을 보면서 바다와 땅을 완전히 비현실적으로 그렸다고 신랄히 비판하기도 했다. 하지만 또 다른 천재 화가들인 라파엘로(1483-1520)와 미켈란젤로가 활동 중인 로마에서 나이든 다 빈치가 실력을 펼칠 기회는 별로 없었다.
1516년 프랑스와 1세의 초청으로 프랑스로 가서 살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그곳 상크르라는 곳에서 1519년 4월 23일, 69세를 일기로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마르틴 루터가 《95개조 논제》를 발표하여 종교 개혁의 신호탄을 올린 2년 후였고 마젤란이 세계일주여행을 출발한 바로 그 해였다. 그렇지만 그가 그린 아름다운 성화들은 우리 곁에서 그의 이름과 믿음을 길이길이 우리 주위에 남기고 있다.
"어린 그리스도의 작은 두상이 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손수 만든 것이다. 이 두상에서는 어린아이의 단순함과 순수함이 지혜와 지성과 위엄과 함께 느껴진다. 부드러운 어린이의 분위기와 함께 판단력을 지닐 나이의 특성도 보여주는 정말 탁월한 작품이다."
1560년대 밀라노의 화가인 지오반니 로마초의 글이다. (끝)
조덕영(창조신학연구소 소장, 평택대 <과학과 신학> 교수, 조직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