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인들의 집회가 아니라, 성령의 집회가 이어지기를
칼빈의 제네바에서 정착하고 재점화된 종교개혁의 열풍은 삽시간에 전 유럽을 강타했다. 그중 종교개혁의 가치와 열매들을 가장 많이 받아 누린 나라는 영국이다.
영국은 프랑스의 위그노들을 비롯한 종교개혁가들의 신학과 신앙의 유산을 그대로 수혈받아 위대한 청교도들을 생산했다.
가히 16-17세기는 청교도의 시대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들에 의해 주도된 영적 부흥은 이후 전 세계 개신교회의 영적 자신이 되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18세기는 이러한 개신교회의 부흥을 방관하지 않았다. 독일에서 불기 시작한 임마누엘 칸트(I. Kant)에 의한 계몽주의와 이신론(理神論, Deism)은 기독교회의 근간을 위협했다. 이들의 전략은 매우 이성적이며 지능적이었다.
즉 하나님의 존재를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으면서, 기독교의 하나님처럼 신이 세상에 관여하거나 계시에 의해 자기를 나타내는 인격적인 주재자가 아니라, 인간에게는 자율권을, 자연에게는 자연질서의 법칙을 부여한 다음 초월해 계시는 신으로 각색했다. 그것을 합리주의라 불렀다.
이런 이념과 가치관들이 교회 안으로 침투하자 많은 교인들이 이것들을 수용하기 시작했으며, 점점 교회도 영향을 받아 기독교의 초자연적인 특성을 부인하고 오직 이성주의적인 신앙을 강조하게 되었다. 설교도 도덕을 말하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그리하여 영국은 그 찬란했던 종교개혁기의 영적 부흥과 자산들을 다 상실하고 다시 영적 어둠에 빠졌으며, 사회는 부도덕과 무질서와 가난으로 어두워졌다.
하층민들은 가난과 문맹의 무지와 태만으로 교양을 잃어버렸고, 대중들은 술과 오락과 쾌락과 도박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영국 역사에 있어 이보다 더 심한 방탕의 시절은 없었다. 어느 역사가는 이때의 영국인들을 짐승에 비유할 정도였다.
극히 소수의 사람들은 가슴을 치며 통곡했다. 모든 희망이 사라진 듯 보였다. 그러나 이런 때에도 하나님은 그의 나라를 위해 열심이 특심인 사람들을 예비해 두시었다.
기독교회사에서 하나님의 이런 예비하심과 특단의 조치는 하나의 비상계획처럼 준비되고 실행되었다. 열두 사도에 이어 하나님은 바울을 예비하셨고, 초대교회 때 영지주의 등 이단의 발호에 대비해 저스틴과 터툴리안, 이레니우스 등 걸출한 변증가들을 예비하셨다.
삼위일체론에 반기를 든 아리우스주의에 대비해 아타나시우스를, 마니교와 펠라기우스주의에 대비해 어거스틴을 준비해 주셨으며, 중세 스콜라신학에 대비해 안셀무스를, 십자군 전쟁과 르네상스와 교황청의 극심한 타락상 등 종교개혁 전야의 어둠을 청산하기 위해 칼빈을 비롯한 여러 종교개혁가들을 예비해 두신 하나님이셨다.
18세기 영국을 위해, 아니 전 세계의 기독교회를 위해 하나님이 예비하신 인물을 꼽으라면 이의 없이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다.
《18세기 영적 지도자》의 저자 라일(John C. Ryle, 1816-1900)은 18세기 영국을 부흥으로 이끌었던 11명의 영적 거인을 소개하면서, 휫필드를 가장 먼저 거론했다. 그는 “100년 전 모든 영적인 거장 중에서 휫필드만큼 시대의 요구를 빨리 파악하고 영적인 전쟁에서 위대한 사역을 행한 사람도 없다”고 했다.
20세기 영국을 대표하는 복음주의자 로이드 존스(M. Lloyd Jones, 1899-1981) 목사는 휫필드를 가리켜 “영국이 배출한 가장 걸출한 설교자”라고 평했다.
어릴 때부터 목회자의 꿈을 꾸고 자란 휫필드는 대학 시절 홀리 클럽의 찰스 웨슬리가 선물한 청교도 헨리 스쿠걸(Henry Scougal, 1650-1678)의 《인간의 영혼 속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라는 책을 읽고 크게 회심했다.
그는 이 책을 읽고 외적인 행위나 의식으로는 영혼이 구원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후 극심한 자기 부인과 기도를 병행하면서 스스로 거듭남의 은혜를 받기 위해 고통스러운 기간을 보냈다. 21살 때였다.
계속적인 금욕과 내적 투쟁으로 몸이 허약할 대로 허약해져 침대에 누워 지내던 어느 날, 그는 갑자기 거듭남의 체험을 했다. 병은 더 깊어져 거의 7주 동안 꼼짝도 못했지만, 그의 영혼은 성령님에 의해 점점 정결하게 되는 것을 느꼈다.
그를 누르고 있던 무거운 죄의 짐이 벗겨지는 해방감을 발견하고 침대에서 일어나 기쁨의 포효를 했다. 이후 그는 평생토록 ‘거듭남’이 신앙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설파했다. 그는 “참된 신앙은 하나님과 영혼이 결합하는 것이며, 내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는 것”이라 했다.
22세 되던 해부터 시작한 그의 설교는 순식간에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1739년 킹스우드에서 광부들을 대상으로 야외 설교를 시작한 이래, 56세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대중 집회를 1만 8천 회나 인도했고 총 1억 명 이상의 사람들에게 거듭남의 설교를 했다. 스코틀랜드를 14회 방문했고 아일랜드에 두 번, 미국에는 7번 방문했다.
특히 두 번째 미국 방문 중인 1740년에 일어난 ‘제1차 대각성 운동’은 순전히 휫필드의 집회가 기점이었다. 보스턴에서 있었던 집회에서는 한 장소에 보스턴 시민의 인구보다 더 많은 2만 3천 명이 몰려들었다 한다.
사람들에게 그의 집회가 광고되면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가게 주인들은 곧장 문을 닫았고 공장도 가동을 중단했으며, 농부들은 농기구를 놓고 집회장에 모였다고 한다. 이로 인해 미국 뉴잉글랜드 인구 30만 명 가운데 무려 25만 명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그의 사역이 탄탄대로였던 것은 아니다. 그는 회개를 요청하고 거듭나라고 선포하는 것을 죽기보다 듣기 싫어하는 수많은 폭도들과 다른 설교자들의 공격을 받았으며, 한 번도 교회 강단에 서서 설교를 해 보지 못했다.
심지어 가톨릭 교도의 테러를 받아 거의 목숨을 잃어버릴 뻔 하기도 했다. 집회 때마다 썩은 계란을 던지고 더러운 오물을 뒤집어쓰게 하고 몽둥이를 휘젓고 돌멩이를 던지는 험악한 사태가 연발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굴하지 않고 담대하게 하나님의 ‘거듭남’의 복음을 전했다. 그의 설교 현장은 가히 성령의 폭발적인 역사의 현장이었다. 모든 죄악들이 성령의 바다에 던져져 자취를 감추는 승리의 현장이기도 했다.
지난 세기의 한 사람의 역사적 인물을 이참에 재조명하는 것은 그만큼 한국교회의 현실이 녹록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적 쇠퇴는 말할 것도 없고 도덕적 타락과 의기소침까지 더해진 상태다.
물론 지금도 숨은 곳에서 남은 자들의 절실한 간구와 열정들이 조국의 교회를 지키고 있음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다시 휫필드를 거론하는 것은 다시 한국교회 안에 성령의 거듭남의 역사가 일어나길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광인들의 집회가 아니라, 성령의 집회가 이어지기를 원한다. 교회의 위세를 내세우는 주장들이 아니라, 스스로 겸비하여 거듭남의 체험들이 일어나 갱신되는 역사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과 능력에 의한 변화를 갈구해야 함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
최더함(Th. D., 개혁신학포럼 책임전문위원, 바로善개혁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