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덕영 박사의 창조신학] 프랜시스 베이컨의 학문과 신앙
근대 과학과 철학, 과학 혁명의 개척자이자 경험주의자
프랜시스 베이컨의 학문과 신앙, 16세기 천재들의 시대에 등장하다
16세기 유럽과 조선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16세기 서양과 우리나라에서는 탁월한 인물과 학자들이 대거 등장한다. 도대체 서양과 조선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얼핏 살펴보아도 조선에서는 퇴계 이황, 남명 조식, 율곡 이이, 기대승, 서애 유성룡, 이순신, 오성과 한음, 송강 정철, 조선 최대 여류시인 이옥봉 등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쏟아졌다. 비록 임진왜란이라는 국란을 겪었음에도, 16세기 조선의 선조 임금 시대(재위 1567-1608)는 탁월한 천재들의 시대였다.
서양에서도 걸출한 인물과 학자들이 나타났다. 대륙에서는 먼저 15C 태어나 16C 주로 활약한 종교 쪽의 코페르니쿠스(1473-1543)와 마르틴 루터(1483-1546) 그리고 16C 태어나 활동한 요한 칼빈(1509-1564)이 있었다.
이탈리아에서는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가 태어났고, 독일에서는 천문학자 케플러(1571-1630), 16세기 후반에는 프랑스에서 태어나 네덜란드에서 활발히 활동한 합리주의(rationalism)자 데카르트(1596-1650)가 태어났다.
영국에서는 우리가 살펴보려는 경험주의자(Empiricism)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이 등장했다. 베이컨 가문은 사실 영국 어떤 가문보다도 천재들이 쏟아진 전형적인 수재 집안이었다.
과학혁명의 시조 베이컨
프랜시스 베이컨은 영국의 철학자, 과학자로 과학혁명의 시조라 불린다. ‘아는 것이 힘’이라는 말을 했듯이, 그는 경험주의자로서 학문에 대한 굉장한 열정을 지닌 사람이었다.
좀 더 극찬한다면 데카르트는 대륙(합리론)을, 베이컨은 영국(경험론)을 대표하는 새로운 철학과 새로운 과학 방법의 길을 연 근대 철학과 근대 과학의 개척자들이었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엘리자베스 1세의 국새관이자 대법관인 니콜라스 베이컨의 아들로 태어나 케임브리지 대학의 트리니티칼리지에서 공부했다.
프랑스 유학을 거쳐 엘리자베스 1세 여왕 밑에서 국회의원, 제임스 1세 시절에 사법장관과 아버지와 같은 국새관(Lord Privy Seal)을 지낼 만큼 능력을 인정받은 사람이었다. 반면 그는 뇌물 수뢰 혐의로 부침을 겪기도 한다.
베이컨의 경험론
본래 경험론은 앎의 문제를 다루는 인식론(Theory of knowledge)의 문제로, 고대의 경험론은 존재론적 측면이 강했다. 따라서 통상적 경험론은 근대 이후의 인식론 차원의 경험론을 말한다.
근대 과학은 귀납을 통해 이론적 성과를 거두기 시작했고, 이후 사회과학에도 적용되는 철학이다. 한때 국내에서는 귀납적 성경 해석이 큰 유행을 탔던 적이 있다. 이렇게 귀납적 경험론은 논리적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일정한 장점도 가진 방법론이다.
베이컨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저서 『오르가논』(Organum)을 대신하고자 ‘학문 대혁신’을 위한 전 6부작을 계획하였으나, 실현된 것은 3부였다. 제1부 『학문의 진보(1605)』를 거쳐 1620년 역작인 『노붐 오르가눔』(Novum Organum, ‘신기관’)을 집필해 귀납법을 제시하여, 경험론(empiricism) 철학의 효시가 되었다.
즉 베이컨은 이 책에서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근거는 오직 경험뿐이라는 인식론을 전개한다. 베이컨은 과거의 궤변과 오류는 네 종류의 우상 탓이라고 보았다. 이를 위해 이 책의 1부에서 인간이 버리고 고쳐야 할 우상(Idol)을 제시하고, 2부에서는 우상에서 벗어나는 과학적 방법론으로 귀납을 제시했다.
베이컨이 말한 4개의 우상
베이컨은 인간이 이성적 진리에 접근하는 것을 방해하는 4개의 우상(idola)이 있으니, 바로 종족(種族)의 우상, 동굴(洞窟)의 우상, 시장(市場)의 우상, 극장(劇場)의 우상이라 했다. 앞의 둘은 개인의 내적 문제와, 뒤의 두 개는 사회적 조건과 관련이 있다.
특히 온갖 편견과 ‘가짜뉴스’가 난무하고 오히려 ‘사이비들’이 일부 여론을 주도하는 수준 이하의 우리 사회 풍경을 보면, 베이컨이 얼마나 시대를 앞서간 천재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먼저 종족의 우상(The idols of the tribe)은 온 인류 종족이 자연 현상들이 마치 거짓된 거울에 비추어진 양, 공통적으로 어떤 것을 한 번 믿으면 그와 일치하는 사실만 받아들이고 어긋나는 사실은 무시해버리는 경향을 말한다. 이 같은 믿음에는 인간 개인이 가진 생물학적 특징이나 사회적 정서 및 편견들이 포함된다.
베이컨 시대의 사람들이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 생각하거나, 또한 자연을 의인화하여 본다거나, 혹은 인간 자신이 목적적 행위를 한다는 이유로 자연에서도 목적을 찾는 것이 모두 종족의 우상이다.
동굴의 우상(The idols of the cave)은 인간 개개인이 어두운 동굴(개인의 동굴)에 갇힌 것처럼 넓은 세계를 보지 못하기에,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성향이 다르다고 말한다.
이러한 성향들은 사람들이 어떤 지식을 받아들일 때, 편견을 가지고 자신이 원하는 것만 걸러 듣게 만든다. 이는 빛(진리)을 차단하는 동굴과도 같아 동굴의 우상이라 한다.
시장의 우상(The idols of the marketplace)은 시장처럼 조심성 없는 언어들이 난무하는 환경에서 사람들은 불완전하고 부적당한 의사소통으로 운명이나 실체 등에 대해 논쟁을 벌인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런 단어들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붙인 단어일 뿐이므로, 쓸데없는 논쟁이다. 이것은 마치 사람이 서로 교역하며 관련을 짓는 시장에서 사물들에게 적합지 못한 단어나 이름을 붙여 사용하는 모양이라 시장의 우상이라 부른다.
극장의 우상(The idols of the theater)은 무대 위의 마술·허구에 미혹되듯이 자신 스스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못하고 기존 학문의 권위만 따라서 생겨나는 편견을 말한다.
역사적 전통에 충성하다 보니, 관련 없는 내용에 플라톤의 이데아 같은 걸 운운하는 철학자들이 이에 속한다. 베이컨이 살던 시절은 극장은 권위를 상징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이런 것을 극장의 우상이라 부른다.
베이컨의 귀납법
베이컨은 이런 우상들을 버리기 위해, 귀납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를 위해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새로운 사실에 대한 폭넓은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다.
즉 이를 위해 첫째 발견 목록을 작성하는 단계가 있다. 어떤 현상에 대한 법칙을 발견하려 하면, 실험과 관찰로 그 현상이 발생하는 경우를 목록에 쓴다. 둘째 작성한 목록을 바탕으로 제거 목록을 작성하는 일이다.
세 번째 단계는 목록의 내용을 토대로 가설을 작성하는 일이다. 가설을 작성하는 것은 실험과 관찰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여기에는 반드시 인간의 이성을 사용해야 한다.
네 번째 단계는 가설을 검증하는 것이다. 가설을 바탕으로 실험을 반복하여 가설이 맞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여기서 오류가 나타난다면 그 가설은 반드시 포기해야 한다.
베이컨은 자신의 저술에 정리한 귀납법이 올바른 과학적 방법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지식의 유용성과 실천적인 적용에 지나치리만큼 집착한 탓에 실제 과학 법칙이 발견되는 과정의 복잡성을 인식하지 못한 한계가 있었다.
또한 베이컨의 결정적 약점은 과학적 방법을 추구하면서도 베이컨 스스로 수학적 이해가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따라서 수학에 탁월한 합리주의자 데카르트가 등장하기까지, 경험론은 일정한 한계를 가진 방법론으로 남는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시작되는 논리학에서 귀납법의 위상을 확고히 했으며, 과학적 세계관과 방법론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베이컨의 저작은 완벽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다방면에서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베이컨은 『새로운 아틀란티스』(The New Atlantis, 1623)에서 새로운 아틀란티스(호주 대륙의 남쪽 바다에 위치)에서 사람들이 과학적 방법(귀납적인 방법)으로 생산 증가를 꾀하고 플라톤의 정치 이념을 실행하려는 가상의 공동체를 묘사한다. 또 문명은 과학을 통해 진보하므로 학문을 연구하는 자연 과학 단체(대학)을 만들자고 주장했다.
이 구상은 훗날 영국 왕립학회와 프랑스 과학아카데미로 실현되었고, 이는 과학혁명의 요람이 되었다. 즉 16세기에 이미 베이컨은 오늘날의 자연과학대학 설립 구상의 선구자가 된 셈이다.
베이컨의 신앙
그렇다면 베이컨의 신앙은 어땠을까? 그는 철학자였으나 신학자는 아니었기에, 신학적 서술을 하지는 않았다.
베이컨은 자신의 신앙과 신념이 잘 묘사된 ‘수상록’에서 “하나님에 대해 전혀 의견을 갖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의견을 갖는 것보다는 낫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전자는 믿지 않는 것이지만 후자는 모독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빌라도를 예로 들면서 베이컨은 빌라도가 “진리가 무엇이냐”고 질문하면서 사실 그 대답을 들으려 하지도 않았다(요 18:38)고 말하며, 인간이 참 된 진리를 대할 때 가지는 보편적 경박함을 지적한다.
베이컨은 또한 삶의 역경에 대해 “구약성경은 순탄한 삶이 축복이라 했고, 신약성경은 역경이 축복이라 했다”고 말해, 은혜 시대의 역경 속에도 역설적인 기쁨과 희망이 있다는 것을 전하고 있다.
베이컨은 또한 신앙의 유무와 상관없이 창조주 하나님께서 사람 모두에게 차별없이 베푸시는 자연(일반) 은총의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 마태복음(5장 45절)을 인용한다.
하나님은 선인과 악인 구별없이 해를 비추시며, 비를 내려주신다. 그러면서 베이컨은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부의 비를 내리고 명예와 덕성을 빛나게 하지는 않는다”는 성경적 섭리를 이야기한다.
죽음에 대해서는 어땠을까? 베이컨은 가치 있는 목적을 달성한 사람에 대해 가장 아름다운 성가로 “주여, 주께서 이제는 주의 말씀대로 이 종을 편안히 놓아주시옵소서(누가복음 2장 29절)”라는 시몬의 말을 인용한다.
그러면서 “살아있을 때 질투를 받았던 사람도 죽으면 사랑을 받게 된다(호라티우스 <서한시>)”고 했다.
부모와 자녀에 관해 말하며 잠언을 자연스럽게 인용(잠 10:1 등)하는 것과, 당시 대중들에게는 일반적이지 않았던 라틴어 성경을 능숙하게 활용하는 것으로 보아, 그가 영국의 전통적 신앙 가정에서 자랐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다만 탁월한 철학자요 과학자이기는 했으나, 역시 베이컨은 신학자는 아니었음도 분명하다. 그리고 천재적 소양이 반드시 깊은 신앙까지 통달하는 것은 아님을, 베이컨은 보여주고 있다. 필자의 개인적 소견이다.
1626년 3월, 베이컨은 자신의 귀납적 방법으로 눈이 부패 과정을 얼마나 늦추는지 알기 위해 실험을 하다, 독감에 걸려 한 달 후 사망한다. 이를 두고 ‘근대 과학의 순교자’ 같은 별칭이 붙기도 한다. 자신의 연구 방법론을 온몸으로 실천하다 생을 마감한 셈이다.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 평택대 <과학과 신학> 교수, 조직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