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덕성 칼럼] 하나님의 섭리와 색깔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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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한의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중국을 강타하고, 전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고 있다. 죽음의 바이러스에 오염되지 않으려고 온갖 수단을 동원한다. 외출 때는 마스크를 쓰고 물안경을 쓰고 장갑을 낀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손으로 직접 누르지 않는다. 저항력을 강하게 한다는 마늘, 양파, 갓김치를 먹는다.
“당신은 가장 높으신 분의 보호를 받으며 살고 있습니까? ‘주님은 나의 피난처, 나의 요새, 내가 의지할 하나님’이라고 고백하십니까? 그렇다면 주님은 당신을 사냥꾼의 덫에서 빼내 주시고, 염병에서 건져 주십니다. 흑암을 틈타서 퍼지는 전염병과 백주에 덮치는 재앙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왼쪽에서 천 명이 넘어지고, 오른쪽에서 만 명이 쓰러져도, 재앙이 당신에게는 가까이 오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천사들에게 명하여 당신이 가는 길마다 지키라고 합니다. 발이 돌부리에 부딪히지 않도록 천사들이 붙들어 줍니다(시편 91편).“
오늘 예배 시간에 읽고 형제자매들에게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한 시편이다. "전염병 재앙을 두려워 말라, 천 명, 만 명이 쓰러져도 당신은 무사할 것이다. 수호천사가 나를 보호한다”는 믿음의 시에 ‘아멘’이라는 추임새로 화답했다.
그렇다. 하나님이 나를 보호해 주실 것이다. 그런데도 교회 모임에서 악수 대신 팔꿈치 인사를 했다. 나는 외출할 때 마스크를 쓴다. 출입할 때 손을 자주 씻는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영생의 확신을 가졌는데도, 중국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우한 폐렴을 걱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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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나는 어느 지식인으로부터 전쟁 걱정, 나라의 미래 걱정이 쓸모 없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 하나님이 보우하시는 우리나라인데, 어떻게 세워진 나라인데, 함부로 전쟁이 일어나고, 적화통일될 것이라고 생각하느냐는 것이었다. 북한의 핵무장과 한반도 대륙 전쟁 가능성 걱정은 정말 부질없는 생각인가?
북한 어느 인사가 ‘서울 불바다’ 발언을 했을 때, 대한민국은 ‘핵 공갈’로 여기고 무시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에는 핵이 없다, 핵이 있으면 내가 책임지겠다”고 말했다. 대통령의 말을 신뢰한 대한민국은 오랜 세월 동안 북한의 핵무기에 무대응, 무대책, 무반응으로 일관해 왔다. 그러나 가짜뉴스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수상할 때도 북한은 핵무기를 만들고 있었다.
사회주의 국가인 북한 핵무기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사는 우리에게 공포를 주고 있다. 핵무기의 위협은 공상이 아니다. 가짜뉴스가 아니다. 엄연한 현실이다.
사회주의는 반기독교를 지향한다. 기독인들이 공산주의 세력 확장에 대응하고, 기독교 신앙의 자유를 빼앗길까 걱정하고, 정부의 소극적 대응이 비합리적이라고 비판하는 일은 지극히 정상적이다. 국민들과 기독인들이 정부의 사회주의의 낭만화 작업을 걱정하면서 저항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월남한 기독인들은 공산주의, 사회주의 통치의 본질과 피해를 경험했다. 군사독재 정권이 반공주의를 앞세워 권력을 유지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반공 자체는 잘못이 아니다. 가짜 평화와 가짜 평화이론을 준엄히 꾸짖는 일은 정당하다.
대한민국 정치권력을 장악한 현 정권 안에는 사회주의 운동권 출신들이 많다. 반일·반미의 날카로운 적 개념을 가지고 나라를 이끌고 있다. 기회가 오면 언제라도 이 나라를 적에게 넘겨줄 것으로 생각된다.
낮은 연방제 통일이 그 첫 단계이다. 낮은 연방제 통일은 적화통일 전 단계이다. 그렇다. 나라가 없어질 지경이다. 그런데도 나라 걱정은 쓸모 없는가? 대한민국은 하나님 나라처럼 영원한 나라, 무너지지 않는 나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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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지도는 지속적으로 바뀌어 왔다. 전쟁은 반복돼 왔다. 인류사는 전쟁사다. 전쟁은 일어날 듯하면서 일어나지 않기도 한다. 예측하지 않은 전쟁이 순식간에 일어나기도 한다. 평화롭다고 할 그 때가 참 위험한 시기이다.
국가의 평화는 힘으로 지켜진다. 독도가 우리 땅인 것은 우리나라가 힘으로 그것을 지켜낼 수 있을 때까지만이다. 내가 거의 매일 건너다 보는 일본 땅 대마도는 해운대에서 불과 56km 지점에 있다. 저 땅을 탐하지 않은 우리 조상들은 평화를 사랑한 사람들인가?
유럽의 지식인들과 학자들은 사회주의의 모순과 실패를 경험하고서 이구동성으로 “그것을 버리라”고 말하고 있다. 기독인들은 정치라는 현실 구조 안에 살고 있다. 신 냉전시대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이념들이 기독교 신앙과 어떤 관계인가를 냉철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자본주의는 유토피아가 아니다. 수정자본주의도 완전하지 않다. 자본주의가 잘 정착된 나라는 사회주의 국가 보다 더 훌륭한 복지와 사회 정책을 펼친다. 유럽 중세기 봉건제도가 당시로서는 최선의 경제, 정치 시스템이었던 것처럼, 자본주의, 자유민주주의는 현재 국가의 번영을 보장하는 최선의 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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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대와 동백섬을 산책할 때마다, 고독한 삶을 살았던 할아버지의 삶이 그려진다. 자기 나라 사랑, 조국 걱정을 한 분이다. 최치원, 그는 12살에 당 수도 서안 국학원에서 공부하고 나이 18세에 그 나라의 빈공과 시험에서 장원 급제했다. 중국의 어느 지방 통치자로 활동했다. 저술가이며, 시인이며, 작가이다. 많은 작품들을 남겼다. 『격황소서』(881)는 명문 중의 명문으로 꼽힌다.
최치원은 서른 즈음에 조국 신라로 귀국했다. 당에 머물 때 지은 책들을 모으고 간추려, 우리 민족 최초 최대 석학의 명문을 담은 『계원필경』 20권은 왕에게 바쳤다. 책 제목에 대해 “모래를 헤쳐 금을 찾는 마음으로 계원집(桂苑集)을 이루었고, 난리를 만나 융막(戎幕)에 기식하며 생계를 유지하였기 때문에 필경(筆耕)으로 제목을 삼았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최치원이 신라로 돌아온 것은, 볼품없는 나라이지만 조국이었기 때문이다. 조국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골품제에 밀려 외직으로 나돌았다.
889년 진성왕 3년에 신라의 재정이 궁핍하여 조세를 독촉한 것이 농민봉기로 이어지고, 신라는 전면적인 붕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양길, 궁예, 견훤이 신라 공략을 노리고 군사력을 키우는 시기였던 것 같다. 전쟁의 위협이 날로 커지고 있었다.
최치원은 894년 진성왕에게 나라를 살릴 개혁상소 시무책 10여 조를 올렸다. 집권체제의 해이, 골품제 사회의 누적된 모순 등 해결방안을 제시했다. 진성왕은 이를 받아들였지만, 관리들은 개혁을 싫어했다.
신라는 이미 자체적인 제체정비 능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시무책은 실효를 거두지 못했고, 왕위는 효공왕으로 넘어갔다. 난세를 만나 나라의 몰락을 바라만 봐야 하는 처지의 최치원, 그는 비통한 자신의 불우함을 한탄하면서 관직에서 물러나, 경주 남산, 부산 해운대, 가야산, 지리산 등을 유람하며 지냈다.
최치원이 하늘로 승천했다는 말도 있고, 신선이 되었디는 이야기도 있다. 세월이 지나, 지리산 계곡 어느 동굴에서 최치원의 시로 확인된 여러 편이 시문이 발견되었다. 그곳에서 한 많은 삶을 마치고 세상을 떠난 듯하다. 신라인 최치원이 부활했다는 이야기는 전해지지 않는다.
최치원의 호는 고운, 자는 해운이다. 곱다거나 아름답다거나 행운아라는 의미가 아니다. 고독한 구름, 바닷구름을 뜻한다. 호와 자처럼, 그는 신라의 멸망을 내다보면서 한스럽고 고독한 삶을 살았다. 구름처럼 왔다 가는 인생의 허무함을 깨닫고 가족과 함께 이곳저곳으로 떠돌았다. 최치원의 나라 걱정을 무시한 신라는 망하고 없어졌다.
해운대와 동백섬에는 매일 중국인 여행객들이 가득하다. 우한 폐렴을 유발시켜 세계를 공포로 몰아가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는 동백섬을 두려워 하지 않을 것이다.
동백섬을 산책하면서 마스크를 쓰지 않은 사람은 대부분 한국인이고, 쓴 사람은 대부분 중국인이다. 아름답고 쾌적한 해운대와 최치원 기념공원인 동백섬은 어느새 걱정해야 할 위험한 명소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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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최치원 30대 손이다. 조국의 발전에 조금이나마 이바지하려고 미국 국적을 포기하고 대한민국으로 귀화했다. 벌써 30년 전이었다. 나는 소총을 거머쥐고 36개월의 대한민국 군복무를 했다. 전방 전투 교육사단에서 복무했다.
그리고 납세의 의무를 성실히 이행했다. 이 나라가 평화롭고 부강하며 정의로운 사회로 발전하기를 한없이 바라고 있다. 전쟁 없는 복지 국가로 발전하기를 희망한다.
전쟁 걱정, 나라 걱정을 쓸모 없는 생각이라는 어느 지식인의 말을 듣고서, 나는 머리를 갸우뚱 했다. 그 때 나의 머리에 떠오른 것은 그 지식인이 백제인이거나 고려인일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나라 걱정, 전쟁 걱정, 몰락 걱정은 쓸모 없는가? 백제인, 고려인이라면 ‘그렇다’고 말할 것이다. 신라인이라면 ‘쓸모 있다’고 말할 것이다.
나라 걱정, 전쟁 걱정을 부질 없다고 하는 사람은 프랜시스 베이컨이 오래 전에 말한 ‘종족의 우상’에 포로된 상태가 아닌가 싶다. 우리가 직면한 현실을 합리적으로 판단하지 않는 듯하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시류와 권력과 정세에 편승하는 허접한 지식인일 게 분명하다.
해운대에는 밤낮 사람들이 붐빈다. 동백섬은 부산을 찾는 관광객들의 필수 답방지이다. 거의 매일 중국인 관광객이 무리지어 방문한다. 최치원의 30대 손인 나는 해운대 동백섬 입구에 바구니 하나 갖다놓고 통행세 달라고 하고 싶다.
전쟁 걱정이 부질없는 생각이라는 지식인, 조상을 구실로 통행세 받을 생각을 하는 지식인, 이들의 차이는 무엇인가? 전쟁 걱정이 부질없다고 함은 중국 바이러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대비 노력을 불필요한 것으로 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어느 페이스북 친구는 전염병을 걱정하기보다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 일이 앞서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교회당 남여 화장실 비누를 새 것으로 바꾸어 놓았다고 한다.
하나님은 창조와 경륜과 섭리로 세상과 인생을 자신의 뜻대로 주관하시는 분이다. 자신과 가정과 교회의 안전을 위해 질병 확산의 예방에 진력하는 것은 당연하다.
불안한 정세를 걱정하며,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나라를 걱정하고 대비함은 당연한 일 아닌가? 신라의 몰락을 내다보고 걱정하여 개혁 상소 시무책 10여조를 왕에게 올린 최치원의 노력은 부질 없는 일이었는가?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 주변국 정세, 대한민국 자유 민주주의의 취약성, ‘독재'로 상징되는 북한 사회주의 체제의 위협 상황에서, 나라 걱정을 색깔론 프레임으로 터부시하거나 공산화에 대한 걱정을 반공주의 색깔론 프레임을 씌우고 배제함은 그 자체로 체제 이념의 편향성을 드러낸다.
건강한 시민의식 함양을 위한 토론 문화를 저해하는 행위이며 민주적이지 않다. 반공주의가 절대화되고 우상화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지만, 반공 자체를 공론의 장에서 배제시키는 것도 옳지 않다.
최덕성 박사
브니엘신학교 총장, 교의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