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문제의 해결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시작하자는 말
종교 개혁자들, 회개를 외치면서 실천한 사람들
기독교 신앙에서 현상에 대한 해석의 원칙 가운데 하나는 “우연은 없다”다. 만일 기독교인이 ‘우연’이라는 한 단어를 허용한다면 그 순간부터 ‘이신론자’의 논리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신론(理神論)은 하나님이 온 세상과 자연법칙을 만들고 자신은 역사에 전혀 개입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두산백과사전은 이 주장을 “성경을 비판적으로 연구하고 계시(啓示)를 부정하거나 그 역할을 현저히 후퇴시켜서 그리스도교의 신앙 내용을 오로지 이성적인 진리에 한정시킨 합리주의 신학의 종교관”이라고 가르친다. 이런 신학적 관점은 자연재앙을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으로 해석하는 태도를 경멸한다.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물리현상일 뿐이라고 본다. 자연재앙을 하나님의 진노라고 해석하는 사람은 여전히 르네상스 이전의 전 근대적 사고를 벗어나지 못한 고루(固陋)한 자일뿐이다.
흥미로운 점은 자연재앙을 하나님의 진노라고 해석하는 보수적인 입장을 비판하는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가 프로이트의 심리학을 지지한다는 사실이다. 프로이트의 주장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 기반을 둔 부분이 많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나 나르시시즘(narcissism) 등이 대표적이다. 프로이트의 주장은 이런 식으로 그리스 로마 신화에 기반을 두고 심리학 체계를 세운 부분이 많다. 계몽주의자들의 논리에 의하면 프로이트의 주장은 신화에서 벗어나지 못한 전근대적 사고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이신론적 사고를 가진 사람들은 성경적 해석은 무식한 해석이라 비판하지만, 프로이트의 논리에는 타당성이 있다고 손을 들어준다.
이제 우한 바이러스와 메뚜기 떼가 온 세상에 창궐하게 된 사태를 어떻게 보는 것이 성경적인지 생각해 보자. 메뚜기 떼는 기온 변화에 의한 우연이라고 보는 기독교인들이 많다. 또 우한 바이러스로 인해 대한민국이 어려움에 처한 것은 ‘인재’(人災)라고 보는 기독교인들이 많다. 어떻게 주장하든지 이 두 가지 관점에는 공통점이 있다. 하나님의 주권을 빼고 생각하자는 점이다. 표현만 다를 뿐 원리에는 차이가 없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는 믿음의 눈이 아니면 우연이나 인재처럼 보이는 것들로 가득하다. 다윗이 인구조사를 한 후에 내려진 전염병은 어찌 보면 우연처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성경은 다윗의 범죄 때문이었다고 가르친다(삼하 24:1).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18명이 치어 죽은 사건은 인재처럼 보인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눅 13:5)는 하나님의 경고로 해석하셨다. 회개하지 않은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본보기였다는 말이다.
신앙은 해석의 문제이다.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그의 신앙이다. 인간이 타락한 후부터 인생의 수많은 문제를 하나님 빼고 해석하는 것을 당연히 여긴다. 환경이나 남 탓으로 해석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아담은 자신의 죄를 하와 탓으로 돌렸고, 하와는 뱀의 탓으로 돌렸다. 타락한 인간에게 소망이 없는 것은 문제의 해석과 진단을 이렇게 잘못하는 데 있다. 해석과 진단이 잘못되면 솔루션(solution/해결책)을 찾을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면 해석과 진단이 달라지고 해결책이 명확해진다. 여기서 복음의 위대함이 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진단한다. 그리고 구원이 발생한다.
그러나 작금의 몇몇 기독교 지도자들은 성경적인 해석과 진단을 부정한다. “자연재앙을 죄 때문이라고 판단하지 말라”고 한다. “정죄보다 위로와 격려로 재난을 극복하자”고 한다. 이런 주장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도 할 수 있는 해석임에 틀림없다. 성경은 인간의 모든 비극과 문제가 죄에 있음을 명확하게 가르친다. 아마도 21세기에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라고 반박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런 주장에 대해 로이드 존스 목사는 “우리가 20세기 중반에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문제들 또한 완전히 새로울 것이라는 생각은 오늘날 사람들이 범하고 있는 가장 치명적인 오류 중에 하나입니다. 그런 생각은 전후 세계니 과학 시대니 원자 시대니 기독교 후기 시대니 하는 말들로 포장되어 교회의 활동과 사고에까지 스며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부 헛소리입니다. 새로울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라는 말로 명쾌하게 지적한다.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명료하게 해석하고 진단해야 한다. 모든 비극의 문제를 죄의 문제부터 진단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주님은 앉은뱅이를 고치신 후에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 5:14)고 하셨다. 중풍 병자의 병을 고치시면서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막 2:5)고 하셨다. 죄와 아무 관계없어 보이는 문제를 죄와 관련하여 지적하셨다.
그러나 작금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자꾸 정죄하지 말고 위로와 격려로 극복하자고 한다. 죄 문제로 보지 말라고 한다. 한국교회의 현 주소를 보라. 눈먼 것, 병든 것, 저는 것으로 예배하는 일이 다반사다. 기독교인들의 도덕적 타락은 불신자들도 공감한다. 간음, 동성애, 탈세, 부정부패가 교회 안에서도 동일한 비율로 일어난다. 세상 속에서 교회가 구별된 모습이 없다. 이런 교회를 향하여 위로와 격려가 먼저인지, 회개가 먼저인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위로와 격려는 회개한 자들의 몫이다. 자꾸 평안하다 안전하다를 외칠 것이 아니다. 이런 메시지를 볼 때마다 예레미야서에서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렘 8:11)는 말씀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오해하지 말라 예배당에 앉아서 회개만 하면 된다는 말이 아니다. 모든 문제의 해결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시작하자는 말이다. 관계를 회복한 후에 비로소 빛 된 삶을 살 수 있다. 종교 개혁자들은 회개만 외친 사람들이 아니다. 회개를 외치면서 실천한 사람들이다. 역사상 성경적인 그리스도인들은 회개하고 가정과 직장과 캠퍼스와 정치와 교육의 영역에서 신자다운 삶을 실천했다. 질병이 창궐할 때, 회개만 외친 것이 아니라 질병을 퇴치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착각하는 것은 회개와 실천을 구분했다는 점이다. 회개는 했다고 하지만 가정과 직장과 캠퍼스와 정치와 사회에서는 회개한 그리스도인을 찾아 볼 수 없다. 교회당에서는 회개했다고 하면서 여전히 불법하고, 간음하고, 이기적이고, 불충실 하고, 방탕하다. 이런 기독교인들에게 많은 사람들이 고통 받고 신음한다. 요즘 기독교인들이 다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작금의 문제를 죄의 문제로 섣불리 연결 시켜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제고해보자는 뜻이다. 이런 그리스도인들에게 과연 위로와 격려가 먼저인지, 회개의 선포가 먼저인지 생각해 보자. 신문에 기록된 한 줄이 마음을 끈다. “한국교회 지도자들도 스스로의 교만과 죄를 깊이 회개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라며 “그렇지 않고 단순한 우연으로 치부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역사를 이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김민호 목사(회복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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