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와 교회 5] 논리도 상식도, 배려도 공감도 없어
연대하는 사회, 갈팡질팡하는 한국교회
조용하던 일상이 뒤죽박죽이다. 많은 것들이 멈췄고, 붕괴됐다. 그럼에도 온 국민이 단합하여 연대의 힘을 보여주고 있다.
반면 한국교회는 갈팡질팡하고 있다. 천주교, 불교 등이 전면 금지한 것과 달리, 한국교회는 각개전투 중이다. 천주교나 불교와 개신교를 비교하기란 사실 어렵다. 교리가 다르고 신앙의 정도가 다르며, 교회 정치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리나 신앙의 문제라면 이해할 만하다. 문제는 상식의 문제라는 점이다.
비상식으로 일관하는 한국교회
언론보도, 기고글, SNS상 목회자의 글을 보면 비상식적 행동과 발언이 난무한다. 내용은 다음과 같이 압축된다. ‘일제강점기나 전쟁 중에도 예배는 드렸다. 예배 안 드리면 더 벌 받는다. 순교정신으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죽음이 두려워서 예배를 안 드릴 수 있나.’
문장만 놓고 보면 다 맞는 말이지만, 문맥과 상황을 생각하면 비상식이다. 말과 글 속에 논리가 하나도 없다.
전쟁과 코로나19, 어떻게 보면 전쟁이 더 무섭고 시급한 상황이지만, 전쟁 때는 우리가 예배드려도 된다. 왜냐하면 전쟁 때 예배드리면 그리스도인만 피해(?)를 볼 뿐,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코로나19 때 예배드리면, 단 한 명의 확진자라도 발생할 경우 수 만명의 시민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다. 5천만 국민에게 간접적인 영향을 끼친다.
코로나19는 무증상기간이 있다. 심지어 무증상기간에도 전염력이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러니 아무리 예배당 입구에 열감지 카메라를 설치한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마스크와 손 세정제가 어느 정도 막아줄 수 있겠지만, 완전히 막지는 못한다.
코로나19에 걸렸지만 증상이 없어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예배에 참석한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어떻게 될까? 그 사람으로 인해 예배에 참석한 전체가 코로나19에 걸렸느냐와 아무 상관없이 자가 격리에 들어가야 한다.
뿐만 아니라 예배 참석자의 가족, 직장의 모든 구성원도 자가 격리에 들어가야 한다. 그렇게 되면 전체가 입게 되는 경제적 사회적 손실은 엄청나다.
이렇게 말해도 이해를 못하는 경우가 있어서 예를 들어보겠다. 500명 모이는 교회에 단 한 명이라도 감염자가 있었다면 어떻게 될까? 물론 그 감염자는 자신이 감염자인지도 몰랐는데 말이다.
500명만 피해를 보는게 아니다. 그들의 가족, 직장, 그밖의 공동체가 다 자가 격리에 들어가야 한다. 그러면 그 피해는 막심하다. 게다가 그들의 자가 격리가 끝나는 2주일이라는 기간이 더 연장되고, 코로나19와의 전쟁을 종식시키려는 모든 노력은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된다.
비교불가를 비교하지 말라
예외적인 상황에서 온라인으로 예배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말이 많다. 그런데 한 가지만 생각해 보자. 우리가 경험한 전쟁 때는 인터넷도 없었다. 그때는 각 가정에 성경책조차 별로 없던 시대다.
역사상 있었던 전염병의 시기에, 인터넷은 거의 활용되지 않던 때다. 그러니 각 가정에서 예배드리기가 만만치 않았다.
예배가 진행 중인 교회임에도 예배에 안 나오는 사람들은 순교정신이 없어서가 아니다. 믿음이 약해서가 아니다. 자기는 걸려도 되지만, 자기가 걸릴 경우 다른 사람에게 끼치는 해악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이때의 해악 역시 단순히 죽음의 문제가 아니다. 14-19세기 전염병이 끼친 영향과 2020년 전염병이 끼치는 영향이 다르다.
의학이 고도로 발달한 2020년에 전염병으로 죽을까봐 걱정하는 사람은 지극히 적다. 2020년에 사람들이 걱정하는 것은 경제적, 사회적 피해다.
전염병마다 다르다
모든 전염병 때마다 이렇게 하자는 말이 아니다. 전염병 일반과 코로나19를 단순하게 적용하지 말라. 전염병은 종류가 다양하다. 전염병마다 전염방식이 다르고 끼치는 영향도 다르다.
코로나19는 아직 정확한 감염 경로가 밝혀지지 않았다. 비말(飛沫)을 통해 감염되며, 전염력이 상당하다는 점, 특히 실내에 집단으로 모인 곳에서 전염력이 매우 크다는 점만이 밝혀졌을 뿐이다. 특히 종교집회라는 밀집 공간이 취약하다는 사실이 현상으로 증명됐다.
그렇기에 모든 전염병 때마다 공예배를 예외로 해야 하는 건 아니다. 장티푸스, 콜레라, 결핵, 천연두, 뇌염, 독감도 전염병이지만, 그 질병의 유행기간이라 해서 공예배를 예외로 하지 않는다.
사스(2002년), 신종플루(2009년), 메르스(2015년) 때도 공예배를 드렸다. 코로나19는 그 전염병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전염되기 때문에 예외로 하는 거다.
순교정신으로 해야 한다고?
차라리 순교라도 당하면 낫겠지만, 코로나19로 순교할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 치사율이 0.5%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전염율이 높은 이유는 치사율이 낮기 때문이다. 걸리자마자 죽어버리면 활동이 안 되니, 전염시킬 염려가 적다.
코로나19는 증상이 상당히 미비하다 보니 거리를 활보할 가능성이 많고, 그러다 보니 전염율이 높은 것이다. 그래서 전염을 막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예배가 무너질거라고?
상당수 목회자들이 코로나19로 인해 공예배가 무너질 거라 염려한다. 필자가 볼 때 기우(杞憂)다. 예배에 대해 사람들이 가볍게 생각할 거라고 걱정한다. 천만의 말씀이다.
적어도 필자가 목회하는 교회의 모든 교인들은 이번 기회에 공예배의 소중함을 절실히 느꼈다고 한다. 이 정도 상황으로 예배가 무너질 교회라면, 앞으로 얼마든지 무너질 가능성은 많다. 도대체 교인들을 어떻게 가르쳤길래 이 정도로 무너진단 말인가?
한국교회여, 상식을
한국교회여, 제발 상식적으로 행동하자. 어느 교회처럼 소금물로 소독하면 낫는다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말자. 예배드리면 하늘에서 신선한 공기가 내려오니 마스크가 필요 없다는 그런 몰지각한 말 좀 하지 말자. 제발. 세상 앞에서 너무 부끄러워 살 수가 없다.
불신자들이 한국교회가 이렇게 비상식적인 집단으로 인식되면 앞으로 세상을 향해 어떻게 복음을 전할 거란 말인가? 교회는 그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예방수칙을 철저히 지키고 어려움에 빠진 이들을 도움으로써, 자칫 비신자들이 교회를 오해하거나 신자들에 대한 반감을 갖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믿음과 신앙은 상식을 배제하지 않는다. 신앙은 상식을 초월하는 것이지, 상식 이하가 되는 게 아니다.
지금 현재 코로나19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죽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일상회복의 문제다. 코로나19로 일상생활이 마비되는 기간이 얼마나 오래 갈지에 대한 공포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순교정신 운운하고 있으니, 정말 창피하다.
말 안 듣는 사람 때문에 피해 보는 사람들
전 국민이 난국을 헤쳐나가려는 시점에 이해하기 힘든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뚜렷한 증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많은 곳을 아무렇지 않게 다니는 사람, 확진 판정을 받았음에도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다. 그런 사람들의 기사를 읽을 때 많은 이들이 흥분한다. 그 중에 한국교회가 포함되어 있으니 실로 화가 날 지경이다.
PT체조를 할 때 제일 마지막 숫자를 외치지 말라고 하면, 꼭 외치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자기의 실수가 자기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단 한 사람만 실수해도 전체가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기 때문이다.
코로나19 상황에 대한 일부 사람들과 한국교회 일부의 행태가 바로 그렇다. 전 국민이 함께 연대해야만 해결되는 이 시점에 몇몇 사람의 일탈은 모든 사람의 노력을 헛수고로 만든다.
많은 교회들이 모여서 드리는 예배를 잠시 멈추었다. 이러한 교회들은 하루라도 속히 모여서 예배드리고 싶다. 그런데 일부 어리석은 행위 때문에 계속 지연되고 있다. 결국 수많은 교회의 희생이 헛수고가 된다.
타인의 고민과 아픔에 공감 못하는 교회에는 미래가 없다
필자는 모든 교회의 예배가 일시멈춤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논리와 이유가 지금과 같아서는 안 된다.
제발 상식적으로 이야기하자. 논리적으로 이야기하자. 교회 다니면 저렇게 상식과 이성이 없어질 거라는 포털사이트의 댓글들을 제발 좀 보라. 그들의 조소를 들으면서 제발 좀 부끄러워 할 줄 알자.
우리는 성경의 눈으로 교회와 세상을 바라보아야 한다. 하지만 때로는 세상의 눈으로 교회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하늘을 바라보며 살지만, 땅을 향해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아픈 사회의 위기를 공감할 수 없는 한국교회의 미래는 없다.
이러다 한국교회 다 죽는다. ‘아니, 앞서는 순교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는가?’ 내가 말하는 죽는다는 건 한국교회의 미래가 죽는다는 거다.
전도의 문이 다 막혀 버릴 것이다. 논리도 상식도 없고 이웃에 대한 배려와 공감도 없는 기독교는 앞으로 전도가 불가능하게 될 거고, 결국 우리 다 죽는다는 말이다.
얼마 전 초중고 자녀를 둔 교인에게 전화로 심방했다. 전화기에서 답답한 마음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목사님~ 한국교회 목사님들은 다음 세대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이 없나 봐요. 우리 아이들이 자라면 자기가 교회 다닌다는 말을 부끄러워서 못할 것 같아요. 우리 아이들이 교회 다닐 시대에는 전도가 과연 될까요?”
한국교회가 죽어가는 것을 감지한 절규의 목소리다.
손재익 목사
(한길교회 담임)
『특강 예배모범』(흑곰북스)
『설교, 어떻게 들을 것인가?』(좋은씨앗)
『성화, 이미와 아직의 은혜』(좋은씨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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