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중세 ‘흑사병’은 하나님의 징계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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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 교수(백석대 명예교수) ‘흑사병이 유럽 사회에 끼친 변화들’

▲중세 흑사병을 표현한 그림.

▲중세 흑사병을 표현한 그림.

흑사병으로 개인주의 발달하고 상업활동 활발
사회와 경제 유동성 높아져… 자본주의의 전조
성직 지원자 격감, 무식한 이들 교회 지도자로

시작하면서

‘대역병’(大疫病) 혹은 ‘유행병’이라고 불린 ‘흑사병’(The black death)은 14세기 유럽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온 재앙이었다. 이 병이 처음 발견된 1347년부터 병세가 현저히 줄어들었던 약 2년 반 동안 이 병으로 죽은 이는 유럽에서만 2천 5백만 명에 달했다.

1351년까지 유럽 인구의 3분의 1이 분명한 원인도 모른 채 검게 물든 몸으로 죽음을 맞았다. 그렇다 해서 이 병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1352년까지 약 5년간 계속되던 괴질은 그 위세가 현저히 약화됐지만, 그 후 300여 년간 주기적으로 유럽을 휩쓸었다.

지금은 이 유행병을 흑사병이라고 부르지만 당시 사람들은 흑사병이라는 이름을 알지 못했다. 흑사병이라 부르게 된 것은, 키에네루드(R. Kjennerud)에 의하면 18세기 이후인데, 감염자의 사체가 점점 검게 변색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병에 감염되면 각혈하고 팔다리에 종기가 생기고 몸에는 검은 농포가 생겨 몇 날이 못가 죽음을 맞게 된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이 질병에 대한 대처방법을 몰라 단순히 격리시킬 정도였다. 그래서 흑사병은 중세 유럽의 대 재앙이었다고 말한다.

중세 후기 이 흑사병은 쥐와 음식물을 통해 주로 전염되는 수인성 전염병인 페스트로 추정돼 왔는데, 지난 2001년 영국 리버풀대학교 크리스토퍼 덩컨과 수잔 스콧) 교수가 공동 저술한 ‘전염병에 관한 생물학’에서는 흑사병의 원인이 검은 쥐에 기생하는 벼룩이 아니라 고열과 출혈을 일으키는 에볼라바이러스와 같은 바이러스였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들은 흑사병이 2-3일 만에 48㎞ 정도 이동했으나 쥐벼룩이 옮기는 선(腺)페스트는 1년 동안 91m 정도 밖에 이동할 수 없었으므로 흑사병이 유럽 전역을 휩쓸었던 속도로 이동할 수 없었다는 점을 그 근거로 제시했지만, 아직까지도 정확한 원인이나 감염 경로를 모르고 있다고 한다.

이 글에서는 14세기 유럽에서 창궐했던 흑사병의 시원과 전파, 확산과 소멸, 그리고 유럽사회에 기친 영향 등에 대해 소개하고, 당시 교회는 이런 질병에 대해 어떻게 인식했던가를 소개하면서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파되는 위험에 처한 한국교회의 반성적 성찰에 도움을 드리고자 한다.

1. 흑사병의 시원과 전파

이 병이 처음 발병한 것은 서양이 아닌 동양의 중국이었다. 곧 몽고, 인도, 페르시아, 시리아, 이집트로 확산되었는데, 서양인들이 이 병의 소문을 들은 것은 1346년이었다.

이들은 저 멀리 동양에서 기이하고 비극적인 질병이 창궐하고 있다는 흉흉한 소문을 들었으나, 자기들의 문제가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여행과 통신이 편리해진 오늘에도 서양인이 볼 때 중국은 먼 곳으로 치부되는데, 중세 시대 서양인들이 볼 때 중국의 재난을 듣고 위협을 느끼거나 동요할 이유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불과 1년이 못 되어, 그 질병은 유럽의 들판으로 스며들었다. 이동 경로는 다양했겠지만, 치명적인 경우는 선박을 통한 이동이었다.

배경은 이렇다. 몽고족은 크림반도 카파에 있는 제노바인들의 교역소(交易所)를 공격하고 있었다. 현재 이곳은 페오도시아(Feodosia)라 불리고 있다.

그런데 몽고족은 알 수 없는 질병으로 사망자가 속출하여 병력이 크게 감소하게 되어 공격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퇴각하기 전 치명적인 공격을 감행하기로 하고, 채 온기가 가시지 않는 죽은 시체를 성 안에 던져 넣기 시작했다. 이때 이들은 큰 투석기를 이용했다고 한다.

작전은 주효했고, 그 성은 말할 것도 없고 그 도시에 역병이 창궐하게 되었다. 이 질병으로 크림반도에서만 8만 5천명이 죽었다고 한다. 다급해진 제노바인들은 갈리선을 타고 지중해로 탈출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페스트가 유럽으로 전파된 것이다.

치명적인 접촉은 1347년 10월 일어났다. 흑해 지방에서 온 10척의 제노바 상선이 시칠리아 메시나(Messina) 항구로 입항했는데, 이 선박에는 이상한 화물이 실려 있었다. 사타구니와 겨드랑이에 계란 크기의 혹을 가진 선원의 시체였다.

시신에서는 피와 고름이 흘러나왔고, 이들의 땀, 오줌, 호흡, 배설물에서는 역겨운 냄새가 등천했다. 흑사병의 유럽 진출이었다.

물론 이것이 유럽으로 전파된 흑사병의 최초 그리고 유일한 경로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바그다드를 거쳐 티그리스 강을 따라 아르메니아를 지나 크림반도 이탈리아 상인들의 화물 수송로를 따라 유럽으로 확산된 것이다.

이 무서운 질병은 메시나 항구뿐 아니라 북이탈리아 도시 제노바와 베네치아로 확산되었고, 1348년 봄에는 시실리와 이탈리아 본토에 상륙했다. 1348년 1월에는 튀니스를 통해 북아프리카로, 마르세유를 통해 프랑스로, 3월경에는 프랑스 중부까지 전파된다.

로마와 프로렌스까지 침투했을 때는 그해 5월경이었다. 6월에는 파리, 보르도, 리옹으로, 7월에는 스위스와 헝가리로 확산됐고, 1348년에는 잉글랜드로, 그리고 그해 6월에는 런던을 공격했다. 곧 스코틀랜드로 확산됐다.

2. 무지한 대처

흑사병이 창궐하자 극도의 혼란에 빠졌다. 유럽의 어느 도시이든 마찬가지였다.

적절한 치료법을 알지 못했던 이들은 마스크를 착용하거나 세척 등과 같은 기본적 조치에도 소홀했다. 치료기구도 없었을 뿐 아니라 진단 방법도 없었고, 나타나는 증상이 감염 여부를 판단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최선의 대책은 격리와 도피뿐이었다. 즉 감염된 환자를 격리시키고, 그들로부터 가능한 멀리 도피하는 것이다. 부유한 이들은 재산을 버리고 보다 안전한 곳으로 도망쳤고, 부모는 자식을 버렸으며, 자식은 병든 부모를 내다 버렸다고 한다.

아내는 남편을 버리고 남편은 병든 아내를 멀리했으나, 누구도 그것을 탓하지 않았다. 가축들은 돌보는 이 없이 떠돌아 다녔다.

죽음을 앞둔 이들은 쓸쓸하게 죽음을 맞았고, 옛정이나 돈으로도 죽은 자를 묻을 자가 없었다. 감염의 위험 때문에 그 누구도 버려진 자들 가까이 접근하기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병자들과 신체적 접촉만이 아니라 옷에 닿는 것도 위험하다고 생각했고, 얼굴을 맞대고 쳐다보는 것조차도 무서워했다.

우한 코로나가 확산되는 오늘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문제는 격리와 도피로도 퍼져가는 역병을 막을 수 없었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들, 특히 아탈리아의 피렌체 사람들은 개와 고양이가 병원균을 옮긴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개와 고양이는 닥치는 대로 죽여 없애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했다.

병에 대한 무지는 도리어 전염을 가중시켰다. 죽은 가축들이 실제로 페스트의 확산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죽은 개들과 고양이들은 쥐가 활개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었고, 쥐의 급속한 번식은 도리어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당시 교회 지도자들도 질병 확산에 영향을 주었다. 공포의 괴질이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교황 클레멘스 6세(Clement, VI)는 1350년을 성년(聖年)으로 선포했다.

‘성년’이란 가톨릭교회에서 특별히 기념할 일이 생겼을 때 교황이 선포하는 행사년을 의미하는데, 성년에 고해성사(告解聖事)를 행하고 로마의 성 베드로와 바오로 성당을 순례하고 참배자들에게는 모든 죄가 사해진다는 대사면년(大赦免年)의 선포였다.

이 성년은 1300년 교황 보니파치우스 8세(Bonifacius VIII, 1294-1303 재위)로부터 시작됐다. 그는 100년마다 한번 씩 성년을 선포할 수 있다고 했지만, 교황 클레멘스 6세는 이는 너무 긴 기간이라는 이유로 50년 주기로 성년을 선포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1350년을 성년으로 선포한 것이다.

특히 그는 로마를 순례하는 자는 연옥을 통과할 필요 없이 바로 낙원으로 가게 된다고 선언했다.

이렇게 되자 질병에 시달린 수많은 이들이 로마로 향하는 순례 여행에 동참하면서, 질병은 확산되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불안 속에서 약 100만명의 인파가 로마로의 여행에 참여했으니, 괴질은 확산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중세 흑사병을 표현한 그림.

▲중세 흑사병을 표현한 그림.

3. 질병에 대한 이해: 질병은 하나님의 징계였을까?

이 병의 증세나 감염 경로, 확산의 원인 등의 문제는 의학적 관심을 가진 이들에게는 흥미로운 주제이겠지만, 오늘 우리의 관심사는 이 질병이 어떻게 그토록 급속도로 확산되었을까 하는 점이다. 그리고 이 질병에 대해 당시 교회는 어떻게 인식했는가의 문제이다.

질병의 확산과 질병에 대한 인식은 무관하지 않다. 질병에 대한 인식이 확산에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질병의 확산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의학적이거나 역학(疫學) 외적 요인이 더 컸기 때문인데, 그것이 바로 종교적 이유였다. 그렇다면 당시 사람들은 질병을 어떻게 인식했을까?

14세기 유럽인들은 자기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질병에 대해 아는 바 없다고 했지만, 질병의 주된 원인에 대해서는 분명한 해답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인식이었다. 인간이 당하는 모든 고통은 하나님의 징계이며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본 것이다.

그래서 그 시대 사람들은 이 페스트가 전능자가 내리는 시련이며, 그 시대의 죄악에 대한 징벌 혹은 보복이라고 믿었다. 14세기에는 연옥설이 유포되고 있었고, 단테의 ‘신곡’을 통해 연옥과 지옥의 생생한 모습을 연상하고 있었다.

질병으로 인한 고통과 죽음은 지옥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생각했고, 사후에도 누군가의 중재로 연옥으로 옮겨갈 수 있다고 믿었기에, 이 질병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체념했다.

이 질병은 하나님이 내리시는 징계인데, 누가 감히 이 징계를 거역하거나 피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체념할 수밖에 없었고, 죽더라도 단지 사죄의 은총을 기대했을 뿐이다.

이런 종교적 태도가 병에 대한 저항 의지를 앗아갔던 것이다. 이른바 ‘성년의 해’에 1백만 넘는 이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로마로의 순례 여정에 동참한 것은, 병으로부터의 치유가 목적이 아니라 죄로부터의 사면을 원했기 때문이다.

질병을 하나님의 징계요 심판이라는 등식의 기계적 인식이 결과적으로 이 병의 확산에 영향을 준 것이다. 그래서 필립 지글러(Philip Ziegler)는 그의 책 ‘흑사병(The Black Death)’에서 “역병이 확산되는데 있어, 이런 종교적 신념보다 더 적절한 환경을 조성해 준 것은 없다”고 썼을 정도였다.

이와 함께 유럽인들은 거듭된 흉작과 인구 증가로 기근에 시달리고 있었고, 영양 부족으로 병과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 못했다. 다시 말하면 흑사병이 유럽에 도래했을 때 저항할 힘조차 없는 이들이 병을 맞았고, 그것은 하나님의 징계라고 인식한 것이다.

이런 인식이 가져온 또 다른 결과가 ‘자의적 보상 행위’ 그리고 ‘채찍질 고행단’의 출현이었다.

사망자가 늘어나자 하나님의 도움을 구했고, 설사 죽더라도 천국의 보상을 갈망했다. 이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기꺼이 교회에 바치므로 보상과 위안을 얻고자 했다. 미리 알아서 나의 모든 것을 바침으로서 징계로부터 보상받고자 한 것이다.

또 다른 방식이 고행(苦行)이었다. 이 질병이 하나님이 내리신 형벌이라 여긴 이들은 자기 몸에 채찍질을 가함으로서 하나님의 진노를 가라앉히려 한 것이다. 이 또한 일종의 보상 심리였다.

이들은 최소한 낮에 두 번, 밤에 한 번씩 자신의 옷을 벗고 자신의 몸에 채찍을 가했다. 하나님의 징계에 앞서 스스로 징계를 받음으로 하나님의 노여움을 해소해고자 했던 것이다. 이들이 ‘채찍질 고행단’인데, 흑사병이 유행하는 기간 그 수행자가 가장 많았을 때는 약 80만명에 달했다고 한다. 헤르포르트는 이렇게 썼다.

“채찍은 일종의 막대기였으며, 커다란 매듭이 있는 세 개의 줄이 달려 있었다. 매듭에는 바늘처럼 날카로운 쇠붙이로 된 징이 박혀 있었는데, 그 길이가 밀의 낟알 정도였다. 그들은 이러한 채찍으로 자신의 벌거벗은 몸을 때렸다. 그 결과 몸이 부어오르고 시퍼래졌으며 피가 땅에 흐르면서 이런 일이 행해지는 교회 벽에까지 튀었다. 그들이 너무 세게 채찍질하는 바람에 징이 살에 막혀서 렌치로 빼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Henry of Herford, Liber de rebus memorabioribus, 281).”

영국의 레프(G. Leff)는 ‘중세의 이단(Heresy in the Middle Ages)’이라는 자신의 책에서 “채찍질 의식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이들이 감정을 분출할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방법 중의 하나였다”고 썼다. 그러나 채찍질 의식도 심리적 효과는 있었으나 이 질병으로부터 기인하는 고통을 감소시켜주지 못했다.

문제는 ‘질병이 하나님의 징계’라는 기계적 인식이었다. 모든 인간사가 하나님의 수중에 있고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자 운행자라는 점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인간의 책임을 간과하기 쉽다. 그 결과 몸과 육체를 관리하지 못한 인간의 책임과, 질병에 대한 과학적 접근을 원천적으로 간과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행운의 부적이 유행하기도 했고, 그리스도 상(像), 마리아 상, 성구함 등이 역시 인기 있는 ‘액막이용’으로 유통되기도 했다. 주술을 행하기도 하고 미신을 따르기도 했고, 가짜 의약품이 활개 치기도 했으며, 향수나 식초를 몸에 바르기도 했지만, 그것이 고통을 완화시켜 주거나 역병을 막아내지 못했다.

▲이상규 박사. ⓒ크투 DB

▲이상규 박사. ⓒ크투 DB

4. 유럽에 남긴 변화들

14세기 흑사병에 대해 소개하면서 이 질병이 유럽 사회에 어떤 변화를 초래했는가를 정리하면서 이 글을 맺고자 한다.

흑사병의 시작도 불분명했지만, 병의 쇠퇴도 분명치 않았다. 엄청난 전쟁을 치른 뒤 이 병의 위세가 서서히 감소되더니, 유럽의 폐허 위에 고요가 찾아왔다. 그러나 역병이 가져온 후유증은 금방 사라지지 않았다.

약 2년 반 만에 인구의 3분의 1이 죽었으니 그것이 남긴 사회적 변화는 가히 혁명에 비견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제1차 세계대전과 비교하기도 한다.

인구가 감소하자 자연히 인건비가 상승했고, 부와 권력을 누리던 지주들은 파산했으며, 중세의 특징이던 봉건주의도 붕괴됐다. 정치나 경제적인 면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변화가 나타났다.

영국의 경우 프랑스어가 널리 사용되고 있었으나, 많은 프랑스어 교사들이 목숨을 잃게 되자 영어가 서서히 지배적 언어로 대치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라틴어는 서서히 소멸되었다. 이것은 자국어 발전의 자연스런 귀결이었다.

영국에서의 국제어의 약화는 보편 교회론의 기둥을 허무는 결과를 가져왔다. 약간의 과장이기는 하지만, 영국이 계속 프랑스어로 말하고 라틴어로 글을 썼다면 종교개혁은 일어나지 않았으리라는 주장에도 일말의 진실은 있다고 하겠다.

예술 분야도 변화를 보여주었다. 흑사병을 경험하면서 고통 받는 이들과 징벌 받는 이들, 그리스도의 수난, 지옥의 고문 등 고통과 죽음은 예술작품의 주제가 되었고, 해골과 시체가 주로 등장하는 ‘죽음의 무도’라는 장르가 발전한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피렌체의 산타 크로체 성당에 그려져 있는 오르카냐(Orcagna)의 ‘죽음의 승리’라는 작품이었다. 앞날을 헤아릴 수 없었던 생존자들은 자신도 언제 죽음으로 다가서게 될지 알지 못하자, 도덕적 삶에 의미를 두지 않았다.

충격적일 정도로 도덕은 땅에 떨어졌고, 금욕이나 절약은 무의미했다. 술 취한 매춘부들도 자기의 처지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방자하게 행해도 탓하지 않았고, “먹고 마시자. 내일 우리는 죽을 테니까”라고 자포자기하게 된다. 기다릴 미래가 없었던 중세인들의 대응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흑사병으로 인한 사회 변화가 가져온 결과는 광범위했다. 개인주의가 발달하고 상업 활동이 활발해졌으며, 사회와 경제의 유동성도 높아졌다. 이러한 변화가 자본주의의 태동을 알리는 전조였다.

더 큰 변화는 교회 내부의 변화였다. 프랑스 역사가 자클린 브로솔레에 의하면 성직 지원자의 격감으로 무식하고 무지한 이들이 교회의 지도자로 세워지게 되었다. 그는 “이런 무지가 교회를 더욱 타락하게 하여 결국 종교개혁의 원인을 제공했다”고 썼다.

인간 역사에 가장 큰 변화를 가져 온 것은 질병과 전쟁, 그리고 자연재해였다는 주장은 사실이다.

이상규 박사(백석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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